[이슈&진단 : 석유화학 퍼펙트 스톰] ④ 롯데케미칼, 증설-해외-신사업 ‘다중 위기’…“특별법만이 살 길”

국내 석유화학산업이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다. 정부는 지난달 20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나프타 분해설비(NCC)의 연 270만~370만톤 감축을 축으로 한 구조조정의 큰 방향을 제시했다. 석화업계 10개사도 연내 자율구조 개편안을 제출하기로 했다. 에너지경제신문은 생존의 기로에 선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위기 실태와 원인, 정부의 관련산업 정책 및 해법 시나리오·실행 트랙을 짚어본 뒤 주요 석유화학업체별 구조개편 선택지와 재무·고용 파급을 차례로 점검해 '누가, 무엇을, 언제' 바꿔야 하는 지를 입체적으로 조명해 본다. 롯데케미칼의 상황 역시 여타 석유화학 업체들과 마찬가지로 위태롭다. 중국과 중동의 과도한 증설로 인한 글로벌 공급 과잉이라는 구조적 문제에 더해 주요 해외 투자처의 부진과 상대적으로 더딘 신사업 전환이라는 내부적 과제까지 겹치며 '다중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재무 상태는 이미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수년 째 지속되는 영업손실 탓에 현금 창출력이 약화되자 한국신용평가·한국기업평가·나이스신용평가 등 국내 3대 신용 평가사는 올해 6월 롯데케미칼의 신용 등급을 'AA'에서 'AA-'로 일제히 하향 조정했다. 신평사들은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인해 향후 2년 내 흑자 전환이 불확실하며, 단기간 내 재무 부담 완화가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했다. 롯데케미칼의 위기는 해외 자회사에서 증폭됐다. 특히 2017년 인수한 말레이시아 자회사 LC타이탄은 10개 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며 그룹 전체의 재무 건전성을 위협하는 '아픈 손가락'이 되고 말았다. LC타이탄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에 사업장을 둔 동남아시아의 대표적인 석화 기업이다. 이곳은 △에틸렌 △폴리에틸렌(PE) △폴리프로필렌(PP) 등 석화 제품 원료를 생산한다. 2010년 롯데케미칼이 1조5000억원에 인수한 LC타이탄은 롯데케미칼의 지분 74.7%를 보유한 말레이시아 상장사로, 연간 수천억원의 이익을 내 해외 사업의 선봉이자 그룹의 주요 캐시 카우로 성장했다. 그러나 롯데케미칼은 최근에는 업황 부진 탓에 작년부터 LC타이탄 매각을 시도해왔고, 손실을 줄이기 위해 말레이시아 파시르 구당(Pasir Gudang)의 일부 생산 시설을 일시적으로 가동 중단하기도 했다. 결국 롯데케미칼은 2024년 4분기 LC타이탄과 관련해 1조원에 달하는 손상차손을 회계에 반영하는 '빅 배스(Big Bath)'를 단행했다. 이는 향후 실적 개선에 대한 기대보다는 장기 부진의 가능성을 인정한 고육지책이다. 여기에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구 일진머티리얼즈) 인수 과정에서 발생한 3600억 원 이상의 영업권 손상차손 또한 재무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위기는 핵심 생산 기지인 여수 국가산업단지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롯데케미칼 측의 자료에 따르면 기초·첨단 소재를 생산하는 여수 산단 사업장의 매출액은 2022년 대비 2024년 7.8% 감소했고 같은 기간 지방세 납부액은 63.7%, 신설·증설·경상 투자비는 각각 68.2%, 44.5% 급감했다. 이는 기업의 위기가 곧바로 지역 경제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상황이 악화되자 여수시는 지난달 28일부터 내년 2월 27일까지 산업 위기 선제 대응 지역·고용 위기 선제 대응 지역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생존을 위해 롯데케미칼은 비핵심 자산을 매각하는 '자산 경량화(Asset-light)' 전략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파키스탄 고순도 테레프탈산(PTA, Purified Terephthalic Acid) 자회사인 LCPL 매각으로 약 979억 원을 확보했다. 또한 수처리 사업부와 일본 레조낙 지분 등도 매각해 유동성을 확보했다. 롯데케미칼은 이와 같은 자구 노력을 통해 약 1조7000억 원의 현금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대부분 차입금 상환과 운영 자금으로 소요될 전망이다. 롯데케미칼은 현재의 위기가 개별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라고 진단헤 석유화학산업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생산 설비 신·증설은 2028~2030년 경 마무리 돼 업황이 반등할 것으로 보지만 회복 강도는 불확실하다는 이유에서다. 곽기섭 롯데케미칼 기초소재사업 경영지원본부장은 “중국·중동 등 국가 단위의 추격으로 개별 기업의 대응만으로는 역부족"이라며 “특별법을 통한 빠른 사업 재편이 국가의 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수요 산업 연계·스페셜티 기술 확보·탄소 중립 투자 지원과 함께 국내 기업 간 인수·합병(M&A) 활성화를 위한 법·제도적 지원이 절실하다는 의미다. 롯데케미칼은 고부가 스페셜티 소재와 수소 에너지, 전지 소재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는 장기적인 계획이다. 단기적으로 롯데케미칼의 재무 건전성은 부진한 범용 화학 시장의 운명에 더 직접적으로 묶여 있고 신속하고 적극적인 사업 재편과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앞서 롯데케미칼은 2022년 9월과 2023년 3월 각각 롯데정밀화학과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를 연결편입해 사업 조직을 기초 화학·첨단 소재·정밀 화학·전지 소재로 재편한 바 있다. 롯데케미칼 관계자는 “기초 화학 사업과 관련, 스페셜티 확대를 위해 제품 연구·개발(R&D)를 지속하고 있고, 수소 에너지 사업 확대를 통한 포트폴리오 고도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주요 종속 회사인 롯데에너지머터리얼즈는 2차 전지 시장이 요구하는 고체전해질·리튬인산철(LFP) 양극활 물질·실리콘 음극활 물질 등 차세대 배터리 소재 개발로 미래 가치를 높이는 R&D 역량을 강화하는데 집중하고 있다"고 부연설명했다. 한편 롯데케미칼은 사업 재편 승인 기업 공시 절차를 개선한다는 입장이다. 합병·분할·양도·양수 등으로 인해 이미 발표된 공시의 변경이 불가피해 이에 대한 '변경 공시'를 추가하고 심의위원회의 심사를 거치겠다고 했다. 또한 사업 재편 완료 후 이에 부합하는 공시 발표 절차도 요청하겠다고 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이슈&진단 : 석유화학 퍼펙트 스톰] ③ LG화학, 선제적 다각화로 ‘석화 리더 회복’ 담금질

국내 석유화학산업이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다. 정부는 지난달 20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나프타 분해설비(NCC)의 연 270만~370만톤 감축을 축으로 한 구조조정의 큰 방향을 제시했다. 석화업계 10개사도 연내 자율구조 개편안을 제출하기로 했다. 에너지경제신문은 생존의 기로에 선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위기 실태와 원인, 정부의 관련산업 정책 및 해법 시나리오·실행 트랙을 짚어본 뒤 주요 석유화학업체별 구조개편 선택지와 재무·고용 파급을 차례로 점검해 '누가, 무엇을, 언제' 바꿔야 하는 지를 입체적으로 조명해 본다. 국내 석화업계 맏형격인 LG화학 석유화학(석화)사업 부문의 2021년 영업이익은 4조815억원으로 전 사업 부문 합계의 81.2%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듬해엔 1조745억원으로 축소됐고, 급기야 2023년 1434억원에 이르는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올해도 1분기 565억원, 2분기 904억원의 손실을 내며 적자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고착화된 석화업황 부진은 LG화학의 재무 신인도에도 악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올해 6월 한국기업평가와 한국신용평가는 LG화학의 신용등급을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이는 석화산업의 장기 부진과 대규모 설비 투자에 따른 차입금 확대가 회사의 재무 구조를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로 반영된 것이다. 이같은 안팎의 불리한 사업 환경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LG화학은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과거의 유산인 비핵심사업을 과감히 정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대표사례가 역삼투압(RO:Reverse Osmosis) 수처리 필터 사업부의 매각이다. 해당 사업부는 생활용수나 공업용수로 사용하기 힘든 바닷물로부터 염분을 포함한 모든 용해물질을 제거해 순도 높은 음용수·생활용수·공업용수 등을 얻어내는 해수 담수화에 관한 수처리 과정을 수행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전체 매출 기여도가 0.45%(2220억원)에 지나지 않아 신성장동력에 자원을 집중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 아래 매각이 결정된 것이다. 이밖에 여수공장 직원사택 매각, 청주 분리막공장의 저속라인 가동 중단 등 전방위적인 자산 효율화와 비용 절감 등 자구책을 실행하고 있다. LG,화학의 구조조정 칼날은 인력에도 향하고 있다. 최근 충남 대산·전남 여수 공장 내 정년을 앞둔 58세 이상 임금 피크제 직원들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절차에 돌입했다. 이 같은 조치는 정부 차원의 산업 재편 협약 이후 석화업계에서 나온 첫 가시적 조치여서 다른 기업들의 구조조정을 촉발하는 신호탄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회사는 '통상적인 경영활동의 일환'이라고 설명했지만, 업계는 본격적인 인력 구조 재편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또한, GS칼텍스와 여수 소재 나프타 분해시설(NCC)을 통합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선제적인 포트폴리오 재편과 위기 대응 능력은 LG화학을 전통적인 석화기업 중에서 '가장 회복력 있는' 기업으로 만들고 있다. 이는 LG화학의 진정한 강점이 위기를 상쇄할 수 있는 다각화된 포트폴리오에 있다는 평가에 기반한다. 첨단소재사업은 정보통신(IT)·가전 산업의 기술 변화와 자동차 경량화, 전기차 등 자동차 산업의 트렌드에 맞춰 핵심 소재를 개발하고 생산·판매하는 사업이다. 올해 상반기 LG화학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23조5388억원, 9144억5000만원으로 집계됐다. 이 중 첨단소재사업 부문의 비중은 매출 5.6%, 영업이익 20.6%를 기록했다. 석화사업 부문이 매출의 39.5%를 차지했지만, 영업이익에선 마이너스(-16.1%)인 점과는 대조를 이룬다. LG화학 관계자는 “IT·가전, 자동차 산업의 빠른 기술 변화에 맞춰 기술 제품 개발과 고객 맞춤형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며 “엔지니어링 소재와 전지재료 영역에서 사업 기회가 확대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전했다. 경영진의 전략은 명확하다. 범용 화학제품의 비중을 낮추는 대신 전지 소재·친환경 소재·신약 등 '3대 신성장 동력'으로 전환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체 투자의 60% 이상을 신성장동력에 집중하고 있으며, 오는 2030년까지 이들 사업의 매출 비중을 현재 23% 수준에서 50% 수준인 25조원까지 늘리고, LG에너지솔루션을 제외한 전체 매출 50조원을 달성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웠다. LG화학 미래 비전의 핵심에는 전지소재 사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자리잡고 있다. 특히, 미국 테네시주에 4조원 가량 투자해 건립 중인 양극재 공장은 회사의 전략적 선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공장은 완공 시 연간 12만 톤의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될 예정으로, 단일 공장 기준 북미 최대 규모를 자랑함과 동시에 테네시주 사상 가장 큰 해외 직접 투자(FDI) 사례로 기록될 전망이다. 이는 단순한 생산 능력 확대를 넘어 미국 내 전기차 공급망의 핵심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려는 전략적 포석으로 풀이된다. 아울러 전체 양극재 생산능력을 현재 14만톤에서 내년 20만톤로 확대하고, LG에너지솔루션 외 고객사 비중을 40% 이상으로 늘려 시장 지배력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LG화학은 차별화된 성능을 위한 연구·개발(R&D) 강화와 생산성 개선을 통한 원가 경쟁력 지속성 확보, 고부가 제품 중심의 포트폴리오 전환 등의 노력을 통해 스페셜티 소재 사업자의 모습을 갖추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LG화학 관계자는 “전지재료 사업은 고성능 전기차를 위한 하이니켈 양극재(양극활 물질)뿐 아니라 빠르게 성장하는 중저가 세그먼트를 고려해 고전압 미드 니켈, 리튬 망간 리치(LMR) 배터리, 리튬 인산철(LFP) 등의 맞춤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한 연구와 투자를 병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올해 상반기에는 전구체 신공정 적용 양극재를 국내 최초 양산하여 성능과 비용, 친환경 측면의 차별화된 맞춤 솔루션을 제공했다"며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사업은 내재화된 원재료를 기반으로 한 차별화된 고부가가치 제품과 리사이클 원료 기반의 친환경 제품으로 시장을 선도해 나가고 있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이슈&진단 : 석유화학 퍼펙트 스톰] ② 정부는 당근과 채찍, 정치권 특별법 추진…기업들 ‘눈치게임’

국내 석유화학산업이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다. 정부는 지난달 20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나프타 분해설비(NCC) 감축을 축으로 한 구조조정의 큰 방향을 제시했다. 석화업계 10개사도 연내 자율구조 개편안을 제출하기로 했다. 에너지경제신문은 생존의 기로에 선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위기 실태와 원인, 정부의 관련산업 정책 및 해법 시나리오·실행 트랙을 짚어본 뒤 주요 석유화학업체별 구조개편 선택지와 재무·고용 파급을 차례로 점검해 '누가, 무엇을, 언제' 바꿔야 하는 지를 입체적으로 조명해 본다. 정부가 한계에 봉착한 석유화학산업의 자율조정 기능에 기대할 수 없고 현재의 구조적 위기를 넘길 수 없다고 판단해 결국 '하향식 개입' 전략을 선택했다. 이는 단순한 구제 금융이 아니라 명확한 목표와 인센티브, 그리고 불응하면 위협을 결합한 '다운 사이징'을 통해 더 강한 산업을 만들겠다는 강제적 구조조정의 성격을 띤다. 정부 산업 부처가 제시한 석유화학 구조개편 정책의 핵심은 모든 지원이 업계의 고통스럽고도 선제적인 자구 노력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이는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고, 국민의 세금이 경쟁력 없는 한계 기업을 연명시키는 데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다. '선 자구 노력, 후 지원' 원칙은 정부 발표에서 일관성이 유지됐다. 당국의 메시지는 명징하다.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생산 설비를 감축하고, 인수·합병(M&A)을 추진하며, 재무 구조를 개선하는 등 구체적이고 신뢰할 만한 계획을 연말까지 내놔야 △금융 지원 △세제 혜택 △규제 완화와 같은 종합 지원 패키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정부는 과거 호황기에 안주하며 무분별한 설비 증설에 나섰던 석유화학업계 역시 위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경고한 것이다. 따라서, 기업에 뼈를 깎는 수준의 자구책 마련 요구는 실용적인 동시에 일종의 책임 추궁의 당위성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접근 방식은 과거 조선·철강 등 주력 산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나타났던 한국형 산업 정책 모델의 연장선상에 있다. 정부는 막연한 권고를 넘어 구체적이고 정량적인 감축 목표를 보여줬고, 이를 통해 석화업계가 공급 과잉 문제의 심각성을 정면으로 마주하도록 강제했다. 정책의 핵심은 국내 NCC의 에틸렌 생산 능력을 총 270만~370만톤 줄이는 것이다. 이는 전체 생산 능력의 최대 25%에 해당하는 막대한 규모인데, 이는 이번 구조조정 방안에서 가장 실질적이고 파급력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흥미로운 점은 정부가 이 감축 물량을 기업별로 할당하지 않고, 업계 자율에 맡겼다는 것이다. 이는 경쟁 관계에 있는 기업들 사이에 생존을 건 치열한 협상과 눈치 싸움을 유발하는 고도의 전략이다. 이미 외부 컨설팅 보고서(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는 여수산단에 위치한 7개의 에틸렌 공장 중 2~3개를 폐쇄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이는 감축이 가져올 냉혹한 현실을 예고한다. 정부는 일부 기업이 경쟁사의 희생에 편승해 이익만 챙기려는 유인을 차단하기 위해 강력한 처벌 조항을 마련했다. 이는 구조조정의 성공을 위한 핵심적인 장치다. 또한, “다른 기업들의 설비 감축 혜택만을 누리려는 '무임 승차' 기업은 정부의 어떠한 지원에서도 배제될 것"이라고 명백히 경고했다. 이 위협은 산업 공동의 구조조정 노력에서 흔히 발생하는 '죄수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설계됐다. 개별 기업의 이기적인 선택이 결국 공멸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협력에 나서지 않는 상황을 막기 위해 비협조적인 행동에 높은 비용을 부과하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주요 석화기업의 금융권 위험 노출액 규모를 약 30조원대로 추산하고 있다. 이 가운데 30~40%는 회사채 등 시장성 차입이고 나머지는 은행권 대출이다. 일단, 사업 재편 계획 확정전까지 기존 여신 회수 등을 만류키로 했다. 5대 시중 은행과 정책 금융 기관들은 자구 계획 수립과 계획의 타당성이 확보될 경우 채권 금융 기관 공동 협약을 체결해 3조원 규모의 정책 금융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정책의 방점은 범용 제품(Commodity) 위주에서 고부가가치 제품(Specialty) 중심으로 전환해 수익성을 제고토록 하는 것에 찍혀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연구개발(R&D) 확대와 기업인수합병(M&A)를 통한 포트폴리오 재편에 지원 사격을 한다는 방침이다. 아울러 설비 폐쇄 등으로 발생할 수 있는 지역 경제·고용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산업 위기 선제 대응 지역' 지정 등을 검토하고 고용 유지 지원금 등을 제공할 계획도 있다. 정부의 이러한 접근 방식은 한국 산업 정책의 특징인 '조율된 자본주의(Orchestrated Capitalism)'의 전형을 보여준다. 정부는 어떤 기업을 살리고 어떤 기업을 퇴출시킬지 직접 결정하지 않는다. 대신 명확한 감축 목표와 공동의 희생 원칙, 그리고 준수에 대한 보상이라는 '게임의 규칙'을 설정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런 규칙 안에서 고통스러운 세부 사항을 기업들이 스스로 협상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국가의 방향 제시와 시장 기반의 실행을 결합한 방식이다. 따라서 이번 석유화학산업 구조개편의 성패는 정부가 이 섬세한 균형을 얼마나 잘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고, 무임승차 방지 조항은 이 모델의 가장 중요한 강제이행 장치라고 업계는 해석한다. 석화산업 구조개편 작업에는 정부뿐 아니라 여야 정치권도 개입할 태세다. 석유화학 업계의 요청에 따라 정치권이 지원 사격에 나서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일 국회에서는 '석유화학산업 지원 특별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가 개최됐다. 이날 엄찬왕 한국화학산업협회 부회장은 “석화는 국가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보호해야 하는 필수 주력 산업으로, 자동차·전자·건설 등 주요 전방 산업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매우 큰 핵심 소재를 공급해 국내 산업 생태계와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고 언급했다. 엄 부회장은 “생태계의 연쇄 붕괴 방지를 위해 석화업계 지원이 따라야 하는데, 특별법이 제정되면 법적 근거가 확보돼 기업의 적극적인 사업 재편 유도가 가능하고 경영 불확실성을 해소할 수 있다"며 “중장기적 관점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고부가·친환경 소재 생산을 위해 장기·제도적 혁신 전환의 발판이 마련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철규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장은 “이번 공청회는 석화 산업 재편을 위한 제도적 틀을 마련하고 업계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데에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라며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이슈&진단 : 석유화학 퍼펙트 스톰] ① 수출역군에서 생존위기산업 전락…민관 안일한 대응 화근

국내 석유화학산업이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다. 정부는 지난달 20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나프타 분해설비(NCC)의 연 270만~370만톤 감축을 축으로 한 구조조정의 큰 방향을 제시했다. 석화업계 10개사도 연내 자율구조 개편안을 제출하기로 했다. 에너지경제신문은 생존의 기로에 선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위기 실태와 원인, 정부의 관련산업 정책 및 해법 시나리오·실행 트랙을 짚어본 뒤 주요 석유화학업체별 구조개편 선택지와 재무·고용 파급을 차례로 점검해 '누가, 무엇을, 언제' 바꿔야 하는 지를 입체적으로 조명해 본다. 한때 석유화학(석화) 산업은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심장이자 수출의 역군이었다. 그랬던 석화업계는 전례 없는 구조적 위기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서게 됐다. 과거의 호황을 이끌었던 성공 방정식은 이제 생존을 위협하는 족쇄가 됐다. 따라서 '버티면 다시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의 유통 기한은 끝났다. 이번 위기는 단순한 경기 순환의 하강 국면이 아닌, 산업의 패러다임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는 거대한 지각 변동이다. 이번 위기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는 단연 중국의 전략적 선회를 꼽을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석유화학 산업의 성장은 한국의 선진 제조 역량과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세계 최대 석화 제품 수입국이던 중국의 폭발적인 수요를 충족시키는 단순하고 강력한 모델에 기반했다. 이 모델은 나프타 분해 시설(NCC) 설비에 대한 수조 원대의 막대한 자본 투자를 정당화했다. 그랬던 중국이 완전 자급 수준의 생산 능력을 갖춤에 따라 한국 석화 산업 지형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이는 한국의 핵심 수출 시장이 소멸했음을 넘어 중국이 저가 제품으로 역내 시장을 잠식하는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음을 의미한다. 실제 중국의 석화 제품 자급률은 2023년 90%를 상회했고, 일부 범용 제품은 100%를 넘는다. 반면 한국의 대중국 석화 수출액은 2013년 235억달러였지만 2023년 170억달러로 급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단순히 매출의 일부가 증발한 것이 아니라 산업 성장 동력을 담당해온 엔진이 멈춰 섰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변화의 근원에는 중국 정부 주도의 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 중국 정부는 공급망 내재화를 목표로 석화 자국 기업들의 대규모 설비 증설을 독려해 왔다. 그 결과 중국의 에틸렌 생산 능력은 2020년 3227만톤에서 2024년 5440만톤으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과시하며 전 세계 증설 물량의 약 64%를 차지했다. 결국 한국 기업들은 가장 큰 시장을 상실했고, 이제는 여타 아시아 시장에서 차별성 없는 중국의 저가 제품과 힘겨운 경쟁을 벌여야 하는 이중고에 처하게 됐다. 현재 전 세계적 공급 과잉은 전례 없는 수준이라는 게 업계 중론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고유가 시대에는 원가 구조의 차이가 기업의 수익성을 좌우한다. 저유가 시대에는 중동과 한국 간 원가 격차가 크지 않았지만 배럴당 60달러대인 요즘 같은 때에는 원료 기반의 차이가 수익성의 현격한 차이를 낳는다. 저렴한 에탄 가스를 원료로 사용하는 중동이나 미국과 다르게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 NCC는 근본적인 원가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중동 산유국들은 석화 산업 육성 의지를 꾸준히 갖고 있었지만 자금력·인프라 부족으로 대규모 투자를 감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근래 들어서는 고유가로 막대한 자금력을 확보해 '원유 직투입 석유화학 공법(COTC, Crude Oil To Chemical)'을 적용한 공격적인 설비 투자를 감행했다. 비근한 예로 아람코의 자회사 에쓰오일은 9조원을 들여 울산 석화단지에 이와 같은 시설을 건립하고 있다. 미국 역시 셰일 혁명을 바탕으로 에틸렌 생산을 급격히 늘리며 시장을 포화 상태로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는 러시아산 저가 제품이 아시아 시장으로 유입되는 결과를 낳으며 가격 하락을 더욱 부채질했다. 과거의 경기 순환적 하강과 현재의 구조적 위기를 구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거의 경기 사이클은 업계 수익성이 좋으면 투자가 집중되고, 그 결과 공급 과잉으로 수익성이 하락하면 투자가 위축된다. 이후 공급 부족이 발생하면 다시 수익성이 회복되는 순환 구조의 논리로 작동했다. 그러나 이는 업계 참여자들이 비슷한 원가 구조와 수익성을 공유할 때만 가능한 얘기다. 지금은 원가 구조가 판이하게 다른 경쟁국이 시장의 법칙을 바꾸고 있다. 원가 경쟁력이 뛰어난 중국이나 중동, 미국 등은 한국 석화 회사들이 손실을 보는 구간에서도 이익을 낼 수 있다. 시장이 한국 기업에 유리한 방향대로 굴러가지 않음을 정부 또한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글로벌 공급 과잉이 예고됐음에도 국내 석화업계는 과거 호황에 취해 오히려 설비를 증설했고 고부가 전환까지 실기했다"고 지적하며 업계의 안일한 대응이 위기를 심화시켰다고 말했다. 막대한 고정 자산 투자의 전제 자체가 붕괴되자 석화업계가 과거의 성공을 위해 투자했던 생산 설비는 이제는 부채를 늘리는 '자본의 함정(Capital Trap)'으로 변했다. 단순한 불황 극복이 아니라 산업의 자본 구조 자체를 재편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필요한 이유다. 구조적 위기가 기업 재무에 미친 영향은 파괴적이다. 산업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재정적 붕괴가 현실로 다가왔고, 이는 정부가 직접 개입하게 된 계기가 됐다. 주요 기업들의 실적은 처참한 수준이다. 한국 석화 1위를 오랜 기간 굳혀온 LG화학의 석유화학부문의 2022년 영업이익은 1조745억원이었지만 이듬해에는 도리어 영업손실 1434억원을 내며 적자로 돌아섰다. 롯데그룹의 가장 큰 계열사인 롯데케미칼은 수년 째 적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실정이고, 한화솔루션 또한 수익성이 급격히 나빠졌다. 이러한 개별 기업의 부진은 석화 산업계의 심리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지난 6월 30일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기업경기전망지수(BSI)에서 석화 업종은 72를 나타내 기준치인 100을 크게 밑돌았다. 이는 극도로 비관적으로 전망한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 석화의 위기는 단순 재무제표상의 숫자에 그치지 않고 관련 업계의 상징인 여수 국가산업단지의 미래까지 위협하고 있다. 2022년 111조5094억원의 매출을 올리던 여수 산단은 입주 기업들의 실적 악화 탓에 신규 투자가 급감했고, 고용 불안 심화 등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고 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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