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2025]경기도를 보면 이재명·김문수를 안다

“경기도를 보면 이재명·김문수가 보인다" 6.3일 조기 대통령 선거에서 선택을 고민하는 유권자들 사이에서 나도는 말이다. 공교롭게도 이번 대선은 두 명의 전직 경기도지사, 이재명과 김문수의 대결로 사실상 압축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경기도지사를 한 사람은 대통령이 못 된다"던 징크스가 깨졌다. 김 후보는 2006년 7월부터 2014년 6월까지 제32~33대 민선 최초 연임 경기지사 출신이다. 이 후보는 2018년 7월 35대 경기지사에 당선된 후, 3년 남짓 임기를 소화하다가 대선 출마를 위해 2021년 10월 사퇴했다. 대한민국 인구의 약 25%, GDP의 21%를 차지하는 경기도는 국가행정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도지사로서 어떤 철학으로 정책을 설계하고 어떤 성과를 만들어냈는지를 비교하면, 미래 대통령으로서의 국가 경영능력과 철학을 가늠할 수 있다. ◇복지와 공정성을 중시한 이재명 행정 이재명 후보의 경기도지사 시절은 한 마디로 기본소득과 지역화폐 등 '삶의 질 향상' 추진으로 요약됐다. 2018년부터 2021년까지 경기도를 이끌며 이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특히, 전국 최초로 전 도민에게 지급한 '경기도 재난기본소득'은 코로나19 국면에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정책은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전례 없는 위기 상황에서 전국 최초로 모든 도민에게 1인당 10만 원을 지급한 것으로, 경제적 충격을 완화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후보는 재난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지급해 소비를 지역 내로 유도하고,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가도록 설계했다. 이러한 방식은 소비 진작과 지역경제 회복에 효과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기도 재난기본소득은 2020년 한국공공정책평가협회와 한국거버넌스학회가 주최한 '우수행정 및 정책사례 선발대회'에서 광역지방정부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정책적 우수성도 인정받았다. 특히, 경기도의 선제적인 대응은 타 지방정부 및 중앙정부의 재난지원금 정책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돼 의미가 크다. 당시 경기도가 실시한 도정 평가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9%가 도정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특히 코로나19 대응과 재난기본소득 정책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배달앱 독과점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도입한 공공배달앱 '배달특급'도 눈에 띈다. 이러한 정책들은 적극적인 국가 개입을 통한 복지 확대와 공정성 강화를 지향하는 그의 철학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과감하고 실용적인 행정, 현장에서 발로 뛰며 주민들과 함께하는 행정으로도 주목받았다. 이 후보는 경기도내 1700여곳의 명승지, 계곡, 유원지 등에 수십년간 자리잡고 있던 무허가 영업시설을 커다란 마찰없이 점주들과의 협의 끝에 철거해 '현장 중심 행정가'로 부각됐다. 성남시장 시절 수도권 유일의 '개시장'인 모란시장의 도살·판매를 중단시킨 일도 유명했다. 이 후보는 또 사회적 공정성과 포용성을 강조하면서 △사회적경제 기업 지원센터 확장 △공정특별위원회 운영(납품단가 후려치기 근절) △무상 산후조리비, 무상교복 지원 △청년기본소득 도입 등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밖에 이 후보는 성남시장 시절 전국 기초 지자체 최초로 공공의료시설인 '성남시의료원'을 추진, 2020년 문을 열었다. 민간 중심 의료체계의 허점을 보완, 공공성을 회복하겠다는 취지였다. 실용+복지 중심이라는 이 후보의 정치 철학을 잘 보여주는 정책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성장과 기업 유치를 강조한 김문수 행정 김문수 후보의 2006~2014년 두 번에 걸친 재선 도시자 시절은 '상정 동력 구축'으로 요약된다. 성남 판교테크노밸리, 수원 테크노밸리, 화성 동탄테크노밸리로 이어지는 '트라이앵글'을 구축해 한국형 실리콘밸리 조성을 추진한데 애썼다. 특히 판교 테크노밸리와 평택 고덕 삼성전자 산업단지 조성 등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의 성공적 추진을 이끌어 내 경기도를 첨단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업 유치와 신도시 개발은 지역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민간 활성화와 시장 친화적 정책을 중심으로 한 그의 경제 철학을 보여준다. 또 다른 주요 성과로 수도권 대중교통 통합 요금제 도입을 들 수 있다. 2004년 서울시의 대중교통 체계 개편 이후 2년 넘게 지연되던 환승 할인 제도를 2006년 7월 지사 취임 후 재협상을 통해 2007년 7월부터 시행했다. 이를 통해 도민들의 교통비 부담을 줄이고 이동 편의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교통 정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의 최초 기획자이기도 하다. 김 후보는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GTX를 전국 5대 광역권으로 확장하겠다는 철도망 계획을 공약하기도 했다. 2013년 200억 원을 투입해 설립 추진한 아주대 중증외상센터는 의료 인프라 강화로 도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수도권정비계획법, 공장건축총량제, 개발제한구역 등 각종 규제를 완화해 기업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으며, '민원전철365'와 같은 행정 서비스를 도입해 도민들의 편의를 높이고 행정의 효율성을 강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역과 경제의 동시 성장을 추구하기도 했다. 김 후보는 도지사 시절 △경제자유구역 지정 추진 △중소기업 전용 산단 확대 △ 한류우드 조성 및 고양 방송영상밸리 유치 △일자리재단 설립 △직업 훈련 프로그램 확대 △해외투자 유치단 운영 등에 주력했다. 또 민간과 협력하는 선별복지 실현을 위해 △경기도 꿈나무카드(저소득층 아동 급식 지원) 도입 △다문화가정지원센터 확대 △의료취약지 공공의료 확충 △민간 사회복지기관 자율 운영 강화 등을 추진했다. 도지사 시절 이재명 후보가 지방정부의 독립적 정책 실행력을 보여줬다면 김문수는 중앙정부와의 조율을 중시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SNS·디지털 커뮤니케이션 기반의 고속정치를 통해 파급력을 높였던 이 후보에 반해, 전통적 정무 운영 스타일을 택한 김 후보의 확장성은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 후보가 전 계층 대상의 '보편복지'를 채택했다며, 김 후보는 취약계층 중심의 '선택적 복지' 라는 상반된 전략을 구사했다. 결론적으로, 이 후보는 경기도지사 시절 복지 기반의 기본권 보장과 공공의 역할을 강조한 '진보적 실용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줬다. 김 후보는 규제 완화와 민간 중심 성장, 일자리 창출에 집중한 '자유시장 중심의 보수주의자'로 도정을 운영했다. 이처럼 이재명과 김문수, 두 전직 경기도지사의 정책과 철학은 뚜렷한 대비를 보인다. 유권자들은 이들의 과거 도정 경험을 바탕으로 국정 운영 방향을 예측하고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도지사 경험이 이번 대선을 통해 향후 한국 전체에 어떻게 확장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연숙 기자 youns@ekn.kr

[대선 2025]“군소후보라 부르지 마라”…반란 꿈꾸는 소수정당·무소속 후보들

이번 6.3 대통령 선거에는 주요 정당 후보 외에도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 구주와 자유통일당 후보 등 소수 정당 후보와 황교안·송진호 무소속 후보 등도 출마했다. 지난 2022년 3월 9일에 실시된 제20대 대선에서 총 14명의 후보자가 등록하고, 선거 직전 일부 후보의 사퇴로 인해 최종적으로 12명이 경쟁한 것에 비해서는 다소 적은 수의 후보자가 대선 레이스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들 군소 독립 후보들의 출마는 단순한 표 분산을 넘어, 한국 정치의 다양성과 유권자 선택의 폭을 넓히는데 기여하며 다양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다. ◇해고노동자를 위했던 '거리의 변호사' 대통령 후보 되다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기호 5번)의 별명은 '거리의 변호사'다. 용산참사, 쌍용차 해고, 세월호 참사 등 주로 사회적 참사와 노동 문제 현장에서 약자와 동행해왔다. 강원도 태백(출생 당시 강원도 장성군 장성읍)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서울대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현재 민주노동당 대표, 법무법인 두율의 변호사로 활동 중이며, 앞서 제8대 정의당 당대표이자 민주노동당 초대 당대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노동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금속노조, 민주노총 등 주요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며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헌신했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과 노동법 개정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 왔다. 그는 노동자들의 법적 권리를 지키기 위한 법률 자문과 소송 지원을 통해 노동운동의 법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항상 노동자와 함께 했던 권 후보는 특히 해고노동자나 기초생활수급자 등 돈이 없는 이들이 법적 도움을 호소하면 무료 변론이나 변호비용 대출을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왜 이번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냐는 물음에는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내란종식과 사회대개혁을 위해서"라고 단언했다. 그는 14일 페이스북을 통해 “내란종식과 사회대개혁의 핵심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을 갈아엎는 것"이라며 “특히 노동에서 정규직, 비정규직, 특고, 플랫폼노동자, 프리랜서 등으로 나뉘어 발생하는 각종 격차와 차별, 이것을 해결하는 일이 우리 사회 불평등 해소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고 대선 출마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기본급 정상화, 임금격차 해소, 정당한 직무가치 인정, 방학중 무임금 해소 등 무엇하나 정당하지 않은 요구가 없다"며 “비정규직 차별 해소와 노동자의 건강하고 안전한 노동환경 쟁취에 앞장서 온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언제나 함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권 후보는 민주노동당 계열에서 권영길 전 의원에 이은 두 번째 인물이자, 세 번째 대선 출마자로 기록된다. 그의 이번 대권 도전은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와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는 평가다. ◇보수진영 가치 회복과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 위해 출사표 구주와 자유통일당 후보(기호 6번)는 고려대 생명과학대학,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법학석사)하고 현재 자유통일당 최고위원이자 법무법인 비트윈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구 후보는 법조인으로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입문해 자유통일당 내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판문점 도보다리 남북 회담 당시 북한 김정은 위원장에게 건넨 것으로 알려진 USB에 국가 기밀이 담겨있다는 이유로 자유통일당을 대리해 소송을 진행한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 4월 29일 자유통일당 필승 결의대회에서 전광훈 목사, 구주와 변호사, 손상대 전 언론인, 이종혁 전 의원이 경선 후보로 선출됐으며, 이 중 피선거권 박탈로 출마가 불가능한 전광훈 목사를 제외한 3인 중 구주와 변호사가 최종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그는 보수 진영의 가치 회복과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핵심 비전으로 내세우며 대선 레이스에 돌입했다. 구 후보는 수락연설에서 “저는 진실과 정의, 자유를 외칠 사람"이라며 “반드시 낡은 정치 세력을 교체할 대통령이 되어 반국가 세력 집권 저지를 위한 자유 우파 정당 대통합과 보수 정권 재창출의 초석이 되겠다"고 말했다. 이어 “이념 좌편향 된 시민, 노동, 여성, 환경 단체와 공수처, 선관위, 헌법재판소 등의 국가 기관에 대한 개혁이 절실하다"며 “권력은 내려놓을 줄 알 돼 책임은 끝까지 다하는 정치로 자유와 통일과 번영을 함께 누릴 통일 대한민국을 위해 제 모든 것을 헌신하겠다"고 강조했다. 구 후보는 △낡은 정치 교체 및 젊은 대통령 실현 △반국가 세력 집권 저지를 위한 자유 우파 정당 대통합 △보수 정권 재창출을 위한 대연정 거국내각 구성 △사전 투표 폐지 및 전면 수개표 실시 △국가기관 전면 재개편 △자유, 통일, 번영을 함께 누리는 통일 대한민국 건설 헌신 등의 주요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는 지난 13일 동대구역 광장에서 열린 집중 유세에서 “7명의 대선후보 중 병역을 제대로 이행한 사람은 저 하나 뿐"이라며 “군대 안 간 사람은 절대 찍지 말아야 한다. 찍을 가치가 전혀 없다"고 강조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 '부정선거' 음모론 내세운 전직 국무총리 황교안(기호 7번) 후보는 서울 출신으로 성균관대 법대를 나와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공안부 검사, 검사장 등을 거친 법조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전후해 국무총리, 대통령권한대행 등을 지냈으며 그 후 제2대 자유한국당 대표, 초대 미래통합당 대표 등을 지내며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황 후보는 2019년 자유한국당의 대표로 선출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보수주의와 법치주의를 강조하며 안보 강화와 경제 성장, 전통적 가치 수호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다.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종로구에 출마했으나 낙선, 선거 후 대패의 책임을 지고 당대표직을 사퇴했다. 이날은 그의 63세 생일이었다. 그는 당시 총선 대패의 충격이 컸는지 현재까지도 부정선거 음모론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 국민의힘이 대승한 2022년 지방선거를 제외한 2020년 국회의원 선거, 2022년 대선, 2024년 총선은 물론 국민의힘 경선까지 모두 부정선거라는 주장을 펼치는 중이다. 2021년에는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했으나, 2차 컷오프에서 4위 안에 들지 못해 탈락했다. 이후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해 보수 진영의 통합과 국가 안보 강화, 경제 회복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역시 낙선했다. 그는 당시 법치주의와 공정한 사회 구현을 강조하며, 국민 통합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비전을 밝힌 바 있다. 황 후보는 국민의힘의 대선 후보 교체 과정에 대해 “경선 무력화는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보수 진영의 재정립과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강조하며 또 다시 이번 대선에 출사표를 던졌다. 대통령 출마 후보 등록을 마친 후에는 “국민의힘을 탈당하고 무소속 출마를 결심한 것은 오직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함"이라며 “정통보수의 가치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난 10일 페이스북을 통해 “정통 보수세력, 깨어난 청년들과 대한민국을 자유민주공화국으로 살릴 새 길을 가겠다. 절대 도중에 중단하지 않겠다. 끝까지 가겠다"며 대선 레이스 완주 의지를 밝혔다. ◇정당정치 피로 넘는 '선경제 후정치' 실현 내걸어 황교안 후보와 함께 무소속으로 출마한 송진호 후보(기호 7번)는 전북특별자치도 고창 출신으로 전주해성고등학교 졸업 후 현재 사단법인 글로벌데이터자산공제회 이사장, 사단법인 한국사회경제연구소 이사장, 사단법인 독도수호연합회 총재 등을 맡고 있다. 송 후보는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잔디광장에서 공식 출정식을 열고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했다. 그는 이날 연설을 통해 “정당정치의 피로를 넘는 새로운 민심의 물결을 일으키겠다"며 국민 삶의 현장과 직접 연결된 경제공약을 선포했다. ​출정식에서 그가 내건 슬로건은 '국민 속으로, 민생 앞으로'. 이는 국민과 더 가까이에서 소통하겠다는 그의 의지에서 비롯됐다. 송 후보가 내세운 또 하나의 대표적인 슬로건은 바로 '선경제 후정치'다. 정치적 대립이나 이념 논쟁보다는 먼저 대한민국 경제를 살리는 데 집중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실천하는 준비된 경제 대통령'으로 소개하며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경기 침체, 가계부채, 부동산 문제 등 복합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출마했다고 강조했다. 이들 군소 정당 및 독립 후보들의 출마는 단순히 표 분산을 넘어, 한국 정치의 다양성과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특히 한국 정치의 다양성과 대의민주주의의 확장에 의미를 둘 수 있다. 분명한 점은 이들의 목소리가 대선 판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더라도, 한국 정치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과 함께,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며 유권자들에게 선택을 받을 수 있을지 이들의 행보가 주목된다. 김연숙 기자 youns@ekn.kr

[대선 2025]

6월 3일 치러지는 조기 대선은 보수·진보 양강 구도에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가 가세한 3파전 양상을 띠고 있다. 외신들은 그를 '세대 교체의 상징'이라 평가하면서도, 보수표 분산과 젠더 및 세대 갈등 심화 가능성을 동시에 지적한다. 이 후보 스스로도 '세대교체'와 '정치개혁'을 내세우고 있다. 특히 가장 강력한 후보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과거'로, 자신은 '미래' 규정하며 기존 정치권의 관행을 탈피하고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하려는 전략을 펴고 있다. 다만 세대·성별 갈등을 부추겨 정치적으로 활용한다는 비판에 휩싸여 있는 등 일부 유권자들 사이에서 '비호감도'가 높다는 것이 약점으로 꼽힌다. 국민의힘 대표 시절 '명태균 게이트'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상계동 안드레아에서 하버드 엘리트로 이 후보는 198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수월 씨는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금융권에 몸담았고, 어머니 김향자 씨는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가정에서 교육적 분위기를 형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작년 22대 총선 당시, 정치인 아들의 유세차에 처음 오른 어머니 김향자 씨는 아들의 지지를 호소하며 아파트 주차장서 3시간 울었던 일을 꺼내 이준석과 함께 눈물을 흘렸던 일화가 소개되기도 했다. 그는 성동구에서 태어났으나 이듬해 바로 상계동으로 이사해 상계동 성당에서 세례명 안드레아로 영세를 받았다. “어릴 때 숨바꼭질하고 놀던 곳이 상계동 성당"이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지역 사회와 공동체 속에서 자랐다. 상계동에서 보내온 이러한 성장 배경은 훗날 그가 '개천에서 용이 난' 인물로 회자되는 근간이 됐다. 이준석 본인도 '상계동 정서'를 입버릇처럼 언급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 고향으로 상계동을 자부해왔다. 1990년대 후반 그는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에서 1년씩 거주하며 현지 국제학교에 다녔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그가 글로벌 감각을 지닌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다. 해외생활 이후 뛰어난 성적과 재능을 보인 이준석은 서울과학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한 후, 2003년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KAIST)에 입학했다. 그러나 몇 달 뒤 KAIST를 자퇴하고 같은 해 가을 미국 하버드대에 합격해 유학길에 올랐다. 하버드에서의 폭넓은 배움은 이준석의 가치관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공인 컴퓨터공학·경제학뿐 아니라 정부·동아시아학 등 인문사회 강의를 수강하며 기존 정치·사회에 대한 시각을 재정립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훗날 이러한 경험이 자신에게 “정부의 역할은 최소화하고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고전적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심어줬다고 회고한 바 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연설에 감명을 받아 말의 힘을 인식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기술과 창업에도 관심이 많았던 이준석은 2011년 지식경제부가 주관하는 SW 마에스트로 프로그램 1기에 선정되어 소프트웨어 전문가 과정에 참여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중소기업청의 청년창업 지원금을 받아 IT 벤처기업 '클라세스튜디오'를 창업했다. 클라세스튜디오는 자격시험 기출문제 앱 '테스트바다' 등을 개발한 스타트업으로, 이준석은 대표로서 직접 개발과 경영을 이끌었다. ◇'박근혜 키즈'가 되다 2011년 이준석의 삶에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찾아왔다. 그가 만든 교육봉사 단체인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배나사)'의 봉사 현장에서였다. 이 후보는 2007년 하버드대 졸업 후 산업기능요원으로 근무하며 여가 시간을 활용해 중·고등학생을 무료로 지도하는 봉사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이 단체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무료 수학 강의를 제공하는 비영리 단체로, 이준석 본인이 대표 교사를 맡고 있었다. 당시 한나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인 박근혜는 청년층과의 소통을 강화할 방안을 찾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렇게 젊은 세대와 진정성 있는 소통 창구를 모색하던 중, 이준석의 교육 봉사활동에 주목해 박 의원의 전격적인 방문이 이뤄졌다. 박근혜는 2시간가량 이준석 및 봉사단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젊은이들의 열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며칠 뒤 이준석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 외부위원으로 전격 영입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2011년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패배 이후 비상 상황이었고, 박근혜는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이 시점에 젊은 층과의 소통과 미래 지향적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상징적인 인물로 이준석이 낙점된 것이다. 이른바 '박근혜 키즈'로 정치권에 입문하는 순간이었다. 26세 하버드 출신의 무명 청년이 보수 거대정당의 비대위원으로 발탁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언론은 그를 '20대 하버드 출신 벤처사업가'라며 크게 주목했다. 이 후보는 2012년 초 박근혜 비대위 체제에서 당 혁신 작업에 참여하며 특유의 논리적 언변과 참신한 시각을 선보였고, 이듬해 총선에서 서울 노원병 지역에 출마하기에 이르며 정치인으로서 본격 행보를 시작했다. 비록 국회의원 선거와 이후 보궐선거에서 잇따라 고배를 마셨지만, 그는 시사토론 방송 등을 통해 인지도를 쌓으며 청년 정치인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30대 초반이던 2015년 새누리당 혁신위원장을 역임하고, 2016년에는 고향인 노원병에 재도전하는 등 정치권에서 입지를 넓혀나갔다. 이준석과 박근혜의 인연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상당 기간 이어졌다. 박근혜 정부 초기 이준석은 청년 보수 정치의 대표 아이콘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준석은 박근혜 정부의 폐쇄적인 인사 스타일과 소통 부재를 지적하며 점점 비판적 태도를 취했고, 2016년 국정농단 사태 이후 공개적으로 박근혜 정부와의 거리를 뒀다. ◇세대교체 기수로서의 부상과 대선 도전 이 후보는 2021년 헌정사상 최초의 30대 제1야당 당대표에 선출되며 정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기성 정치문법에 도전하는 행보로 큰 관심을 모았고, 2030 세대의 전폭적 지지 속에 보수 진영의 간판 정치인으로 급부상했다. 당 대표로서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의 당선에 공을 세우면서 이 후보의 정치적 앞날도 '만개'하는 듯 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 및 '윤핵관' 등 친윤 세력과의 당내 갈등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른바 '성상납 의혹' 등이 터져 나왔고, 2022년 7월 당원권 정지 6개월의 징계 끝에 쫓기듯이 대표직에서 물러난 그는 2023년 12월 개혁신당을 창당했다. 중도우파를 표방하며, '좌도 우도 아닌 앞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세대교체와 정치개혁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이준석은 개혁신당 창당과 함께 작년 4월 제22대 총선에서 경기 화성시 을 지역구에 출마해 국회의원 배지를 거머쥐며 재기에 성공했다. 민주당 우세 지역이었지만 통계를 바탕으로 전술을 잘 세우고 지역구 전역을 발로 누비는 '개인기'로 역전승에 성공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이번 대선에선 기득권 양당 구도의 벽을 허물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외신들도 이 후보를 주목하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공통적으로 △美 관세 압박 국면에서 이 후보의 뚜렷한 통상 로드맵 부재 △성별‧세대 이슈에 치우친 메시지 리스크를 지적하면서도, '대선 이후 보수 재편의 핵심 카드로 남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그를 “36세 하버드 출신, 대북 강경론을 앞세운 신세대 보수 아이콘"으로 소개하며 반페미니즘 논란, 북한 인권·제재 강화 촉구 발언 등을 조명하기도 했다. 영국 가디언은 2022년 대선 직전 “독설적 '남성 권익' 화법으로 젊은 남성표를 결집시킨 인물"이라며 이준석을 '독(毒)성 젠더 정치'의 상징으로 묘사한 바 있다. 최근에는 작년 11월 동덕여대 시위 보도와 관련 “이준석 의원이 여성 시위를 '야만적'이라 비난했다"는 발언을 인용하며 성 대결이 다시 격화될 조짐을 경고했다. 실제로 그는 한국 정치사에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는 기대와 함께, 군소정당 후보로 과감히 대권에 도전하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개천에서 난 용'이라는 수식에 걸맞게, 비교적 평범한 가정의 아들이 세계 최정상 교육을 거쳐 청년 리더로 성장한 사례로 회자된다. 상계동 반지하에서 보낸 유년 시절부터 하버드의 캠퍼스를 누빈 청년기까지 축적된 다양한 경험은 그의 정치 철학과 행보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후보는 이번 대선에 '압도적 새로움'을 기치로 내걸고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겠다는 목표다. 기존 정치권의 관행을 탈피하고,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정치에 반영하려는 노력을 지속하며 새로운 정치 세력의 가능성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가 “100% 단일화 해야 한다"고 나섰지만 그는 '노답 정당'이라며 일축하고 있다. 그러면서 “어려운 것에 도전해서, 가치를 지키면서 정치 철학을 이어가는" 노무현 정신을 구현하겠다며 완주 의지를 다지고 있다. 한 정치 전문가는 “이 후보가 새로운 세대의 정치 변화를 상징할 수 있는 인물이긴 하나, 동시에 정치적 경륜 부족, 갈등 유발형 리더십, 구체적 정책 미비, 당내 기반 취약 등으로 인해 국정 운영자로서의 신뢰 부족이라는 강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면서 “돌풍을 일으켜 현재 여론조사 지지율 평균인 5%보다 얼마나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느냐에 따라 그의 정치적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15%를 넘을 경우 차차기 주자로 설 수 있겠지만 5%안팎이라면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연숙 기자 youns@ekn.kr

[대선 2025] ‘운동권 황태자’→‘꼿꼿 문수’…위기의 보수에 구원투수 될까?

오는 6월 3일 대한민국은 조기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적 분기점을 맞는다. 12.3 계엄과 탄핵으로 촉발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보수 진영의 주요 정당 국민의힘은 극심한 혼란 끝에 결국 지난 11일 김문수 후보를 확정했다. 지난 주말 후보 선출 취소·등록, 법정 다툼, 찬반 투표, 복귀 등 사상 유례없는 '이전투구'를 거쳤지만 결국 당심은 '꼿꼿 문수'를 선택한 것이다. 김 후보의 인생·정치 이력은 복잡하다. 1970~80년대엔 노동운동의 상징적 인물 '전태일'의 친구로 살았다. 그의 한을 풀어주겠다며 노동현장에 투신, 엘리트 운동권의 황태자 길을 걸었다. 1990년대 동구권 붕괴 후엔 전격 보수로 전향, 국회의원·도지사를 거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렸다. 경기도지사 시절 119 전화 통화 소동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꼰대'로 낙인 찍혀면서 위기를 맞았다. 한때 정치권에서 멀어져 야인으로 지내면서 전광훈씨 등 극우 진영에 합류하기도 했었다. 윤석열 정부에서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발탁됐다가 지난해 12월3일 비상계엄 사태 후 국회에서 '빛의 순간'을 맞이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본회의장 '폴더 사과' 요구에 국무위원들 중 유일하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이다. 보수 유권자들에게 '의리·신념의 정치인' 이미지를 얻었다. '꼿꼿 문수'로 거듭나면서 이후 보수 진영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를 차지, 결국 국민의힘 후보로 출마하는데 성공했다. ◇'가난한 엘리트', 노동자 속으로 김문수는 1951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어린 시절 극심한 빈곤을 경험했다. 고단한 생계를 이어가던 김문수는 대구에 위치한 경북중학교와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70년 서울대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대학에 들어간 1970년대는 박정희 체제 아래에서 학생운동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김문수는 당시 유신체제 반대 시위와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다. 이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 및 제적이 반복되었고, 이후 1994년 25년 만에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난한 엘리트 김문수는 스스로 노동자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는 대학에서 '후진국사회연구회'에 가입해 용두동 청계천변 판자촌에 가서 살고, 고 김근태 전 의원의 권유로 대학생 신분을 숨기고 구로공단의 드레스 미싱 공장에 취업했다. 이른바 '서울대 출신 위장취업 1세대'의 시작이다. 이후 인천·부천 지역 공장에서 본격적으로 노동 현장에 뛰어든 김문수는 당시 평화산업, 새한전자 등 전자 부품 공장에서 조립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위해 활동했다. 낮에는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노동자들을 모아 야학을 운영하거나 노조 결성 활동을 주도했다. 새한전자 조립라인에서 일하던 당시, '노동자 권리 찾기' 소책자를 나눠주다가 사측에 발각되어 해고당한 일이 있다. 이 일은 당시 언론에도 보도되며 노동계 내부에서 그를 '진지한 실천가'로 평가하게 된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문수는 1980년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을 거쳐 1985년 민주노조운동의 효시로 불리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협의회(인민노련)를 결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1986년 인천 5·3 민주항쟁 과정에서는 구속과 해직을 반복했다. 김문수는 회고록에서 “그 시절이 나를 만들었다. 공장의 분진과 소음, 냄새 속에서 나는 진짜 사람 냄새를 배웠다. 그래서 정치인이 되어서도 사람 냄새 나는 정치를 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YS의 발탁, 보수 정치 입문 김 후보는 1992년 대선까지만 해도 백기완 민중당 후보를 돕는 등 운동권내 PD진영을 대표하는 좌파 활동가였다. 하지만 동구권의 몰락이 본격화된 1990년대에 들어서며 보수 정치인으로 전향했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제안으로 보수 진영인 민주자유당에 입당, 1996년 총선에서 당시 신한국당 후보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했다. 그는 1990년대 초 노동운동이 이념 투쟁 중심으로 흐르자 실망감을 느꼈다고 회고하며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운동권과는 다르다"며 거리두기를 선언했다. 당시 노동계로부터는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김 후보는 국회의원이 된 후엔 노동운동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복지·현장 중심 정책을 강조하면서도, 보수적 질서관을 견지하는 정치인으로 변모해 나갔다. 특히 3선 의원을 거치며 노동 전문가로서 복지·노동 입법에 깊이 관여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활동을 통해 '현장을 아는 국회의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김문수는 점점 더 자유주의·보수주의 노선을 강화했다. 그는 스스로를 '실패한 사회주의자'라고 칭하며 “자유와 시장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철학을 확고히 했다. 이는 그의 정치 노선이 진보에서 보수로 이동하는 상징적 계기가 됐으며, 그가 이후 '강성 보수 정치인'으로 자리잡는 이정표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문수의 보수적 색채는 경기도지사 시절 그의 보수행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2006년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소속으로 경기도지사에 첫 당선됐다. 당시만 해도 그는 '중도보수' 이미지로 중도층의 지지를 얻었으며, 경기도를 균형적으로 운영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수도권 대중교통 통합, 중소기업 지원정책 등 실용주의 정책을 중심으로 행정을 운영했다. 특히 수도권 대중교통 환승할인제 도입은 김문수 도정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2010년 재선에 성공한 이후 김 후보는 더욱 분명한 보수적 색채를 드러냈다. '경기도 교육개혁', '복지지출 구조조정', '낙태 반대' 발언 등은 기존 진보 진영과의 대립각을 세우는 전환점이 됐다. 그는 “복지는 무조건적인 확대가 아니라 지속 가능성"이라며 선별복지론을 주장했고, 이는 보수층에게 크게 어필했다. ◇대선과 당권 도전, 실패의 연속 김 후보는 2010년 이후 한때 '야인'으로 생활하는 등 정치 이력의 부침이 컸다. 2012년 새누리당 대선 경선에 참여했으나 박근혜 후보에게 밀려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이후 2018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박원순 후보에 패하며 낙선했다. 그 이후에도 경기도지사 재도전, 자유한국당 대표 경선 출마 등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특히 2020년엔 전광훈의 자유통일당에 합류하면서 '아스팔트 태극기'로 상징되는 극우 정치인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김문수 후보는 현재까지도 △반공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기독교 세계관 중시 △노조 개혁론을 통한 보수의 정체성 복원을 끊임 없이 시도 중이다. 그는 북한 체제를 '전체주의'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의 안보는 '한미동맹'과 '자유민주 진영' 안에서만 보장된다고 주장한다. 국가개입 최소화, 규제 철폐, 민영화를 통한 시장경제를 지지하며, 독실한 개신교인으로서 신앙에 기반한 윤리정치를 강조한다. 아울러 대기업·공공부문 노조의 기득권화를 비판하며 '실질적 노동자 보호'를 내세우기도 한다. 이러한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그를 지지하는 세력 또한 △정통 보수세력 △기독교계 우파 단체 △자유시장 경제주의자들 △일부 노동계 내부 반문 정서층이 기반이 되고 있다. 김 후보는 현재 보수 성향 강성 지지층과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의 전통 보수 인사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TK(대구·경북) 기반 정서와 맞닿아 있어 지역적 기반이 탄탄하다. 독실한 개신교 신앙과 생명존중·가족 가치 중심의 발언으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를 비롯한 종교 우파 단체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규제 철폐,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주장해 시장경제 중심 보수주의자, 자영업자, 중소기업계 등으로부터도 상대적으로 지지율이 높다. 일부 비주류 노동계 인사들도 그가 과거 진보노동운동 출신이었던 점 때문에 현 노조 체제를 비판하면서도 노동 현실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점에서 지지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김 후보의 강점은 뚜렷한 철학과 오랜 정치 경험, 원칙 중심의 언어이다. 반면 중도 유권자에겐 배타적적으로 보이는 강성이미지, 종교·성소수자·여성 관련 과거 발언 리스크, 백범 김구의 '국적' 발언 논란 등 역사관 논란 등은 약점으로 꼽힌다. 보수 강성 지지층 외 외연 확장의 한계, 통합보다는 분열적 리더십이라는 비판 등 리스크도 존재한다. 6.3 조기 대선은 단순한 정권 재창출이 아닌 향후 보수 정치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그가 이재명이라는 강력한 진보 진영 후보를 상대로 윤석열 정부 이후의 대한민국을 보수 진영의 뜻에 맞게 설계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김연숙 기자 youns@ekn.kr

[대선 2025]흙수저 아이콘 이재명, ‘악마화’ 뚫고 ‘국민통합’ 이룰까

제21대 대통령을 뽑는 6.3 조기 대선의 중심에 이재명이 다시 섰다. 2022년 대선 패배 후, 각종 사법 리스크와 정치적 역풍, 일부의 집요한 '악마화' 공세에도 불구하고 유력한 대권 후보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흙수저 아이콘'에서 인권변호사·불사조로 2024년 1월 2일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 현장 시찰 중 기자들과의 문답을 진행하던 한 정치인이 왼쪽 목 부위를 흉기로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를 흘리며 현장에서 쓰러진 이는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어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이 사건은 정치권과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안겼다. 가난과 차별을 뚫고 올라선 '흙수저의 아이콘' 정치인 이재명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면서도 살아 남아 다시 한 번 대중들의 뇌리에 각인된 순간이다. 이재명은 경기도 안동에서 태어나 성남시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극심한 빈곤으로 생업을 위해 공장에 들어가 '소년공'으로 일했다. 산업재해로 인해 신체장애까지 얻었다. 당시 입은 신체장애로 한여름에도 반팔 옷을 입지 못했던 일은 슬픈 일화로 남아있다. 이 후보는 열다섯 살 무렵 성남의 야구글로브 제조 공장에서 프레스에 왼팔 손목이 끼어 뼈가 부서졌다. 해고가 두려워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바람에 성장판이 손상됐다. 팔뚝에 있는 뼈 두 개 중 하나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면서 팔이 뒤틀렸다. 그때 입은 장애로 왼팔은 곧게 펴지지 않는다. 쭉 뻗어보아도 안쪽으로 휘어 있어 어색해 보인다. 소년공 시절의 설움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작업반장이 한참 어린 소년공들을 구타하고 가혹행위를 하는 것도 일상적이었다. 게다가 이 후보는 독한 화학물질에 오래 노출돼 후각세포가 망가지면서 냄새를 잘 맡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의 굴곡진 삶은 이 후보의 미래 행정가, 정치인으로서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러한 경험은 그의 정치적 정체성에 강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검정고시를 거쳐 중앙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한 차례 낙방의 고배를 마신 뒤 1986년 사법고시 1, 2차를 통과했다. 이듬해 사법연수원에 입소해 연수생으로서 첫 발을 뗐다. 민주화의 격동기를 거치며 이재명의 정치적 정체성은 더욱 뚜렷해 졌다. 1988년 7월 전두환 정권이 임명한 대법원장을 노태우 정권이 유임하려 하자 사법연수원생들과 전국의 판사 430명이 반대 성명을 내는 '2차 사법파동'이 일어났다. 당시 사법연수원생 185명이 '사법부 독립에 관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초안 작성자가 연수생 이재명이었다. 이는 이재명이 세상을 향해 낸 첫 외침으로 알려졌다. 인권과 노동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변호사 이재명은 이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힘썼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그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실용주의·사회적 약자 보호 행정가 2010년 성남시장에 당선된 후에는 복지 확대와 재정건전성을 동시에 달성한 '실행형 리더십'으로 주목받았다. 시장 이재명은 취임 직후, 성남시의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5200억 원 규모의 부채 상환을 유예하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이후 적극적인 재정 개혁과 세수 확보를 통해 부채를 감축하고 재정 건전성을 회복했다. 특히 청년배당, 무상교복, 공공산후조리원 도입 등 생활 밀착형 정책은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또 재임 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실화를 다룬 영화 '귀향'의 상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의 지원으로 성남시민 7만여 명이 이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그의 관심과 지원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하지만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비난에 시달리도 했다. 당시 3대 무상복지정책인 청년배당·무상산후조리원·무상교복에 대해 시의회 다수당인 새누리당은 시 재정을 파탄 낼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박근혜 정부도 교부금 삭감과 지자체 권한 축소로 대응했다. 2016년 6월 이재명은 광화문 광장에 천막을 치고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그는 박근혜 정권의 조치가 지방자치를 말살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단식농성 11일째 민주당 지도부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며 중단을 청했다. 변방에 머물던 행정가가 중앙정치의 다크호스로 떠 오른 순간이다. 2010년부터 2018년까지 성남시장을 역임하며 다양한 혁신적 정책을 추진해 주목을 받았던 이재명은 재임 기간 동안 287개 공약 중 총 270개를 이행, 약 94.1%의 공약 이행률을 기록했다. 2018년 경기도지사에 오른 후에는 기본소득과 지역화폐 정책을 선도하며 '전국구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이 시기 그는 성남시장 때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행정과 복지 정책, 공정성을 강조한 개혁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코로나19 방역 선도, 재난기본소득 지급 등에서 빠른 결정력과 실행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기도 주요 계곡 지역에 우후죽순 자리를 잡고 있던 불법 천막·식당들을 긴밀한 협의 끝에 큰 소란없이 신속하게 철거한 것도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정치적 철학은 기본소득형 정책 확대로 실천됐다. 경기지사 시절 그는 경기도 내 만 24세 청년에게 연 100만 원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청년기본소독을 단행했다. 이는 지금도 소득과 무관하게 모든 청년에게 지급하는 보편적 복지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이와 유사한 농민기본소득은 일부 시군에서 시범 실시한 뒤, 도 전체로 확대 추진했다. 농가당 연간 60만 원을 지급해 농촌 소득기반 강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확한 예산 관리와 책임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발휘했다. 이재명 지사는 경기도지사 재임 당시 회의 도중 한 기관장이 예산 소요를 두루뭉술하게 답변하자 “업무 방해하지 마세요!"라고 질책하며 정확한 예산 계산을 요구한 사례가 있다. 당시 “나의 1분은 경기도민의 1364만 분"이라며 행정의 효율성과 책임감을 강조한 일화는 유명하다. ◇ 2번의 대권 도전 실패, 2전 3기 이룰까 소년공에서 인권변호사, 성남시장, 경기도지사로 성장한 이재명은 2017년 대선에서 첫 출사표를 던졌다. 당시 비록 당내 경선에서 21.2% 득표에 그쳤지만, 성공적인 중앙정치 데뷔라는 평가를 얻었다.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게 0.77% 차이로 아쉽게 석패한 후에는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정치적 입지를 더욱 굳혔다. 당내 주도권을 빠르게 확보하며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 다만 2030세대 남성들, 소위 '이대남' 사이에서는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여기에는 이재명 후보를 '위험한 정치인'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복지 중심 정책이 2030세대의 관심사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재명 후보는 지난 8일 페이스북을 통해 '어르신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그는 기초연금 부부감액을 단계적으로 줄여 어르신 부부가 좀 더 여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돕고, 일하는 어르신의 국민연금 감액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임플란트 건강보험 적용 연령은 낮추고 개수는 늘리는 한편 △'어르신 돌봄 국가책임제' 시행 △지역사회가 함께 돌보는 통합돌봄 확대 △간병비 부담 완화 △의료 취약계층을 위한 '주치의제도' 확대 △경로당 등 노인여가복지시설에 대한 지원 확대 △'맞춤형 주택연금' 확대 및 공공신탁제도 도입 등을 약속했다. 최근에는 △공정 △실용 △미래비전을 강조하며 청년층 지지 회복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청년층의 자산 형성, 일자리, 주거 안정, 사회 안전망 강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발표했다. 청년미래적금 및 재무 상담 프로그램 도입과 가상자산 제도화 등을 통해 청년층의 자산 형성을 돕고, △구직활동 지원금 확대 △자발적 이직 청년 구직급여 제공 △직업교육 프로그램 확산 등 청년층 일자리 지원에 적극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무주택 청년 지원을 위한 △공공주택 공급 확대 △월세 지원 및 세액공제 확대 △상생형 공공기숙사 확대 등도 약속했다. 최근 이재명 후보는 그의 저서 '결국 국민이 합니다'를 통해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것 같아도 결국 국민이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강조한다. 정치의 주체는 국민이며, 국민의 참여와 의지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핵심임을 강조하는 메시지다. 정치란 국민의 삶을 개선하고 공공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분명한 점은, 정치인은 국민의 도구로서 이러한 국민의 뜻을 실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뜻을 실현할 진정한 리더십을 갖춘 정치인은 누구인지 6월 3일 4400만 유권자의 손에 의해 판가름 날 전망이다. 김연숙 기자 youns@ekn.kr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