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중후장대산업을 떠받치는 후판 시장에 중국산 저가 수입물량이 들어오면서 국내 철강사들은 한동안 '마음고생'을 했다. 우리 무역당국의 반덤핑 판정으로 한숨 돌렸지만 국내 기업이 보세제도를 활용해 중국산 후판에 일정 부분 의존하고 있어 속앓이가 여전하다. 그렇기에 반덤핑 조치를 넘어 국내 철강사의 후판 기술력이 중후장대산업 공급망을 탄탄하게 받쳐줄 전략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6일 철강협회와 업계에 따르면, 올해 1~3분기 국내 철강사들의 중후판 생산량은 약 630만톤으로 전년 동기와 비교해 2.7% 줄었다. 국내 판매는 5.2% 늘어난 462만톤을 기록했다. 지난해보다 생산이 줄어도 판매가 늘어난 이유는 중국발(發) 저가 수입 후판에 대해 국내 통상당국이 반덤핑 관세를 매긴 영향으로 풀이된다. 현대제철은 지난해 중국산 저가 후판을 대상으로 반덤핑 제소를 낸 뒤 무역위원회는 올해 8월 국내 철강사들의 피해를 인정하며 최대 34.1% 수준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에 후판을 수출해온 중국 철강사 중 9곳은 5년간 수출 가격을 올리겠다는 약속을 내걸기도 했다. 철강업계 한 관계자는 “반덤핑 판정이 나온 이후로 국내 철강 시장에서 후판 가격이 정상 수준으로 올라왔다"며 “철강사 입장에서는 그나마 한숨 돌리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두께가 6㎜ 이상인 철판을 가리키는 후판은 한국이 건설과 중공업 등 중후장대(重厚長大)산업을 키울 수 있었던 토대다. 후판 제조는 충분한 강도와 압력 분산을 위해 균일한 두께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라, 얇고 튼튼한 판만큼 만들기 쉽지 않다. 두꺼울 후(厚)와 널빤지 판(板)의 한자어가 뜻하는대로 후판은 여느 철판 재료와 마찬가지로 쇳물을 직육면체 형태로 주조한 슬라브를 달궈 압력을 주는 열간압연 공정을 거쳐 일정한 두께로 만들어진다. 원하는 두께로 얇게 펴진 철판은 냉각대로 이동해 천천히 식히는 '안정화' 작업을 하면 후판이 완성된다. 후판은 국내에서 건설과 조선 같은 중후장대 산업과 역사의 궤를 같이 한다. 동국제강이 1971년 국내 최초로 생산했고, 뒤이어 포스코(당시 포항제철)가 1972년 시장에 선보이며 국내 중후장대 산업의 성장을 뒷받침해왔다. 현대제철도 2010년 후판 초도물량 생산을 시작하며 국내 후판시장은 철강 빅3 구도가 됐다. 두께를 균일하게 만들어야 선박과 인프라 같은 구조물을 설계도대로 오차를 최소화해 지을 수 있고, 여러 요인으로 발생하는 압력이 한 지점으로 모이지 않는다. 제조 공정에서 니켈이나 망간, 질소 같은 원소들의 함량을 조절해 영하 200℃보다 낮은 저온에도 견디거나 부식에 특별히 강한 특성 등 원하는 물성을 만들어낸다. 만들기 쉬워 보이는 '두꺼운 철판'은 쓰임새가 중후장대 중심으로 무궁무진하다. 민동준 연세대 신소재공학부 명예교수는 “후판은 조선부터 플랜트, 대형 구조물, 해상풍력, 방위산업 등 중후장대와 인프라 산업에 필요한 제품"이라며 “후판이라는 이름이 하나지만 품질 수준에 따라 철강사들이 고도화된 기술을 적용한 제품들에 명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후판 시장에서 한국 철강사들이 중국보다 앞서는 요인로는 조선용 후판 기술이 꼽힌다. 선박은 온도가 낮은 바다를 항해할 때도 견뎌야 하기 때문에 연성-취성 전이온도(DBTT)를 충분히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 철강재는 온도에 따라 끊어지는 특성이 달라진다. 철강재는 압력을 받을 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나면서 견디는 '연성'과 형태가 변하지 않다가 압력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확 찢어지는 '취성'을 가지고 있다. 연성과 취성 가운데 무엇이 나타나느냐는 대체로 온도에 따라 결정된다. 연성이 취성으로 바뀌는 온도가 DBTT다. 철강재는 저온에서 취성을 가지기 때문에 DBTT보다 낮은 온도에서 큰 힘을 받으면 똑 끊어진다. 극지방 주변처럼 바닷물 온도가 어는점에 가까운 지역을 항해할 때도 압력을 견디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액체 상태로 운반하기 위해 영하 200도℃ 안팎으로 낮은 온도를 견뎌야 하는 수소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탱크도 저온취성을 견디는 후판 소재가 필수다. 이같이 저온에서 나타나는 취성(저온취성)을 견디는 철강 소재는 압연 공정과 철강재 분자 구조, 첨가물 함량 등이 모두 맞아떨어져야 만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고망간강은 망간을 5분의 1 내외로 첨가한 강재로, 망간으로 획득한 강점 중 하나가 저온에서 나타나는 취성(저온취성)을 견딘다는 것이다. 이준호 고려대 신소재공학부 교수는 “조선용 후판은 DBTT가 고성능 여부를 가른다"며 “한국 철강사들은 고망간강을 비롯해 저온취성에 강한 조선용 후판을 중심으로 두각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성능이 강화된 후판을 제외한) 나머지 일반적인 후판은 중국 철강사들이 워낙 낮은 가격에 공급하고 있어 한국 시장은 반덤핑 관세 부과로 대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기술적 우위와 반덤핑 조치에도 한국 철강사들은 저가 중국산 후판에 대한 근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물성이 특별히 뛰어나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 쓰이는 범용 후판은 결국 가격 경쟁력에 따라 수요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반덤핑 최종 판정에도 저가 중국산 제품이 들어오는 경로가 '보세구역'에 있다. 보세제도는 관세법에 따라 수입 제품에 대해 관세 징수를 유보할 수 제도로, 국내에서 어떤 산업이나 시장을 키우기 위해 특정 구역을 대상으로 지정할 수 있다. 조선산업의 경우 조선소쪽 보세구역에 중국 같은 해외 국가로부터 후판을 들여와 배를 건조한 뒤 해외 선주에 인도하면 최종적으로 관세를 물지 않는 구조다. 한국 조선사들은 가격 경쟁력으로 추격하는 중국 기업을 고려해 당장은 중국산 후판으로 원가를 낮추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좀 더 멀리 내다보면, 한국산 구매 감소로 철강기업들이 흔들려 모든 후판을 중국 철강사에 의존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철강업계와 조선업계가 가격 경쟁력이냐 원자재 공급망 안보냐를 두고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다른 철강업계 관계자는 “요새는 중국산 후판도 어느 정도 한국산 수준으로 잘 만들기 때문에 조선사들이 보세제도를 통해 들여오고 있다"며 “10여년 전 조선사들이 글로벌 업황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중국산 철강사들에 주문을 넣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기술력이 성장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철강사들과 조선사들은 후판 가격을 두고 분기 또는 반기 단위로 협상하면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해왔다. 이러한 줄다리기를 반복하는 한계를 넘어 양측이 후판 산업에서 볼 피해를 최소화할 길을 정부와 업계가 모색해야 한다는 주문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기된다. 민동준 교수는 “중국산 저가 후판제품에 대한 정부의 반덤핑 판정은, 낮은 후판 가격으로 수요자들이 구매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는 뜻을 담고 있다"면서 “조선사들이 반덤핑 조치를 받은 중국산 후판을 보세제도를 이용해 들여오는 것이 맞는지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조선사들이 저가 소재라는 '독배'를 들지 않도록 철강사들은 조선업계가 원하는 고부가 후판 개발과 생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정부는 담합 우려 해소와 공정한 수준의 후판 가격 형성, 고부가 소재 개발 노력 등으로 조선업계와 철강업계 간 오랜 딜레마를 해소하는 역할을 자처해야 할 것"이라고 민교수는 지적했다. 한국과 미국 간 조선업 협력 국면에서 조선용 철강소재도 탈(脫)중국 공급망 형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이준호 교수는 “미국 법령이 개정돼 미 군함 건조를 동맹국에 맡기는 길이 열린다면,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의 철강재를 쓰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 때를 대비해 한미 간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나간다는 관점에서 철강재 원산지 문제를 외교적인 해법으로 풀어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승현 기자 jrn72benec@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