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발 지정학 리스크가 길어지면서 국내 물가를 둘러싼 긴장감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국제유가 상승에 더해 비료, 곡물 가격까지 연쇄적으로 들썩이면서 물가 압력이 에너지에서 식품 전반으로 확산될 조짐이다. 주요 글로벌 투자은행들도 한국의 물가 전망치를 잇달아 끌어올리며 경고 수위를 높이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정책 대응이 일부 완충 역할을 하고 있지만, 고유가와 고환율이 맞물릴 경우 물가 상승 흐름이 예상보다 길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힘을 얻는다. 5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센터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길어져 비료 조달에 문제가 생길 경우 올해 2분기 국제곡물(밀·옥수수·콩·쌀) 선물가격지수가 전 분기보다 6.4%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비료 공급 차질로 재배 면적이 줄 수 있고, 국제유가 상승으로 바이오연료 수요가 늘면 곡물 가격이 추가로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료 가격은 이미 큰 폭으로 올랐다.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달 중동 지역 요소 수출 가격은 톤당 670달러로 전월보다 38.1%, 지난해 같은 달보다 172.3% 상승했다. 같은 기간 세계질소비료지수는 전월 대비 35.2%, 전년 동월 대비 168.6% 올랐다. 비료 생산의 핵심 원료인 천연가스 선물 가격도 지난달 메가와트시(MWh)당 53유로로 전월보다 62.4%, 전년 동월보다 126.4% 상승했다. 곡물과 유지류 가격도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지난달 콩 선물 가격은 톤당 430달러 수준으로 전월보다 4.2%, 전년 동월보다 16.5% 올랐다. 대두유 선물 가격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34.2%, 팜유는 11.7% 상승했다. 국제유가 상승에 따른 바이오디젤 수요 확대 기대가 가격을 밀어 올린 것으로 분석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한 지난달 세계 식량가격지수도 전월보다 2.4% 상승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이 식량 가격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막시모 토레로 FAO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전쟁이 40일 넘게 이어지고 원자재 비용이 상승하면 농부들은 재배면적을 줄이거나 비료를 덜 쓰는 작물로 전환해야 한다"며 “이는 내년까지 식량 공급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도 중동 전쟁으로 비료 공급망 혼란이 심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에너지와 비료, 운송비가 함께 오르면 식량 생산과 공급, 가격 전반의 불확실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골드만삭스도 최근 보고서에서 비료 가격 상승에 따른 공급 감소가 향후 곡물 가격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골드만삭스는 “전 세계 질소 비료 거래의 4분의 1이, 질소 생산의 핵심 원료인 LNG의 약 5분의 1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며 “비료 공급 감소로 비료 살포가 지연되면 수확량이 감소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농부들도 옥수수같이 비료를 많이 쓰는 작물에서 비료를 적게 쓰는 대두 등 작물로 전환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내 비료 수급은 단기적으로는 버틸 여력이 있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주요 요소 비료 업체가 이달 말까지 공급할 수 있는 완제품을 보유하고 있고, 추가로 3개월 치를 생산할 수 있는 원자재를 확보하고 있어 7월 말까지 비료 공급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게 농림축산식품부의 설명이다. 다만 한국은 여전히 중동 지역 요소 비료 의존도가 43.7% 수준이고, 이 가운데 호르무즈 해협을 거치는 물량이 38.4%를 차지해 중장기 불확실성은 남아 있다. 이 같은 대외 변수는 국내 물가 전망에도 반영되고 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주요 IB 8곳이 제시한 올해 한국 소비자물가 상승률 평균 전망치는 2월 말 2.0%에서 3월 말 2.4%로 높아졌다. 한국은행이 2월 제시한 2.2% 전망치보다 높은 수준이다. 기관별로 보면 바클리는 1.9%에서 2.5%로, 씨티는 1.9%에서 2.6%로, 골드만삭스는 1.9%에서 2.4%로, JP모건은 1.7%에서 2.6%로 각각 전망치를 상향 조정했다. HSBC와 노무라도 기존 전망치를 2% 중반 수준으로 높였다. 뱅크오브아메리카와 UBS를 제외한 대부분 기관이 물가 전망을 올렸다. 일부 기관은 물가가 일시적으로 3%를 웃돌 가능성도 제기했다. JP모건은 중동발 에너지 가격 충격이 아직 지표에 완전히 반영되지 않았다고 보고, 상황이 실질적으로 개선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5~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를 넘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씨티도 같은 기간 물가가 2.8~3.3% 수준에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시장은 아직 3월 물가 지표만으로 충격의 크기를 판단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국제유가 상승이 소비자물가에 반영되기까지는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석유류 가격이 먼저 오르고, 이후 운송·물류와 공산품, 가공식품, 축수산물, 외식서비스 등으로 영향이 확산하는 경로가 예상된다. 비료 가격 상승이 농산물과 식품 가격에 반영되는 데도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고환율도 부담 요인이다. 원·달러 환율이 1500원 안팎에서 움직이면 석유류뿐 아니라 곡물과 식품 원재료, 농축수산물 등 수입 물가 전반에 압력이 커진다. 국제유가 상승과 환율 상승이 동시에 나타날 경우 물가에는 이중 부담이 생긴다. 정부는 유류세 인하와 최고가격제, 특별관리 품목 운영 등을 통해 단기 충격을 완화하고 있다. 일부 품목에서는 정책 효과가 나타났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공급 측 충격이 장기화할 경우 정책 대응만으로 물가 상승 압력을 제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태현 기자 cth@ekn.kr
2026-04-05 15:00 최태현 기자 cth@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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