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핵 정국이 수습된 이후 가라앉았던 원-달러 환율이 다시 1400원대로 치솟으며 가뜩이나 원자재 수입 비중이 큰 철강과 석유화학 업계에 시름을 안기고 있다. 이미 철강석과 석탄 수입가격이 오른 상태에서 원가율을 더 끌어올릴 유인이 더해진 데다 최근 하락세를 보인 국제유가 효과마저 앗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발 관세 상향와 글로벌 공급 과잉 등으로 고환율의 수출증대 효과도 기대하기 쉽지 않아 이중삼중의 어려움에 처해 있다. 문제는 한국과 미국간 통상협상 지연, 미국과 중국 간 양보 없는 무역 갈등이 원화 가치 하락세를 부추길 가능성마저 높아 환율 불확실성이 더욱 증폭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13일 철강·석화 업계와 금융권에 따르면, 이날 원-달러 환율은 한때 1430원선을 넘어섰다. 비상계엄이 촉발한 탄핵 정국 이후 대선 기간을 거치며 1400원선 아래로 떨어진 이후 지난달 24일부터 1400원선을 상회해 왔다. 그나마 기획재정부·한국은행이 공동 메시지를 통해 “외환당국은 최근 대내외 요인으로 원화의 변동성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시장의 쏠림 가능성 등에 경계감을 가지고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구두개입을 밝혀 환율이 1420원대로 진정됐다. 이처럼 환율이 오르면 기업이 원자재를 수입하며 지불하는 원화가 늘어난다. 글로벌 시장에서 거래하는 원자재 가격이 달러를 기준으로 두기 때문이다. 철강사들은 고로에서 쇳물을 만드는 핵심 원료인 철광석과 석탄을 주로 호주와 캐나다 등에서 조달한다. 석유화학 산업의 기초 원료인 원유는 중동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들여온다. 포스코는 올해 상반기 철광석과 석탄을 조달하는데 총 6조7156억원을 썼다. 같은 기간 현대제철은 2조5369억원을 주고 매입했다. 해당 비용은 전체 원가의 32.8%와 23.5%를 차지했다. 고환율로 원화 기준 원재료 조달 비용이 늘면 이미 90%를 넘어선 원가율이 더 높아질 수 있다. 철광석 가격 자체가 오르는 최근 흐름도 부담이다. 지난 10일 시카고 선물 거래소(CME)에서 철광석 가격이 톤(t)당 105.74달러로 저점을 찍었던 7월 1일보다 13.2% 올랐다. 각국이 철강산업 보호무역 장벽을 높이면서 저가 밀어내기식 수출 물량이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영향을 미쳤다. 이에 더해 철강 제품에 수입 관세 50%를 부과하는 미국 행정부의 정책이 비용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실이 포스코와 현대제철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두 철강사가 올해 3~12월 미국에 총 2억8100만달러(원화 약 4000억원)의 관세를 납부할 것으로 집계됐다. 석화사와 정유사도 원유와 나프타 등 원료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마찬가지로 고환율이 달갑지 않다. SK에너지는 원유 12조1799억원을 매입했다. HD현대오일뱅크는 정유 공정을 위해 원유 9조4485억원를 샀다. 정유사들은 100%에 가까운 원가율을 보이는 데다 부채비율도 100%를 넘어 재무체력을 키워야 하는 상황이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 등 석화사들은 대표적인 기초 원료인 나프타를 해외에서 수입하거나 국내 정유사가 수입 원유로 정제한 것으로 조달하기에 환율 변동에 따른 원가 상승 가능성을 예의 주시 중이다. 다만 올해 들어 원유와 나프타 가격이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어 그나마 숨통이 트여 있다. 환율 불확실성 지속 여부는 국내보다는 외부 요인이 좌우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말 이후 지속됐던 고환율 기조는 비상계엄 사태 이후 대외신인도 하락과 탄핵 정국 장기화에 따른 국내 불안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미 무역협상 지연과 미중 무역갈등 같은 요인이 겹쳤다. 대미(對美) 투자와 수익 배분, 원-달러 통화 스와프 체결 등 구체적인 내용을 두고 한미 양국이 의견을 좁히지 못했다. 중국 정부가 희토류 수출 제한 조치를 발표하면서 자원 공급망이 흔들렸다. 여기에 미국 행정부 셧다운이 원화 가치 하락을 부추긴 만큼 당국과 업계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승현 기자 jrn72benec@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