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송전망 딜레마 中] 文·尹도 못했는데 李는 할까…관건은 ‘주민수용성’

한국이 AI·반도체 3대 강국 도약을 선언하면서, 그 핵심 인프라인 '에너지 고속도로'(초고압직류송전망, HVDC) 구축 사업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이 사업은 문재인·윤석열 정부 모두 추진 의지를 밝혔음에도 속도를 내지 못한 대표적 난제로 꼽힌다. 핵심 원인은 분명하다. 송전선로가 지나는 경과지 주민들의 반발이다. 특히 2014년 밀양 송전탑 사태 이후 사실상 모든 건설이 멈춘 상태다. '송전탑은 들어오면 평생 고통만 남는다'는 인식이 뿌리 깊고, 환경·경관 훼손, 전자파 우려, 재산가치 하락 등으로 민원과 소송이 반복돼왔다. 문재인 정부 시절 “전력망 확충 조기 착공"이 국정과제로 포함됐지만, 실제 사업은 대부분 타당성 조사 단계에서 멈췄다. 윤석열 정부 역시 “AI 시대 대비 전국 송전망 확충"을 강조했으나, 한국전력공사(한전)의 재정 악화와 주민 반발로 인해 진척이 없었다. 정부는 전문가들이 제안한 민간참여 모델이나 특수목적법인(SPC) 방식 도입에도 소극적이었다. 결국 “정부는 추진 의지만 있고, 한전은 여력도 명분도 없으며, 주민은 끝까지 반대하는 구조"가 굳어졌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AI 산업과 재생에너지 확산을 뒷받침할 송전망 인프라 확충이 시급하다"고 강조하며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을 '국가 전략 인프라 프로젝트'로 격상시켰다.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한전의 단독 추진 구조를 개편해 민간 발전사·투자기관이 참여할 수 있는 '개방형 송전망 사업 구조'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법적 근거가 명확치 않아, 실제 민간 참여가 가능하려면 전기사업법 및 송전특례제도 개정이 필요하다. 결국 이번 정부가 속도를 내기 위해선, 정치적 결단과 사회적 설득이라는 두 축을 동시에 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대규모 전력망 건설은 단순한 기술·재정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송전망 건설에 속도를 내기 위해선 결국 '주민수용성(Community Acceptance)'을 확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2014년 밀양 송전탑 사태가 대표적이다. 당시 한전이 밀양지역에 송전탑 52기 설치에 나서자 일부 주민들과 환경·시민단체들이 건설 반대시위를 벌였다. 반대시위가 격해지면서 경찰과 격한 상황까지 벌어졌고, 주민이 자살하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주민수용성을 해결하는 가장 현실적인 해법은 세 가지로 꼽힌다. 직접보상 강화로 토지보상 외에도 발전이익 일부를 지역 주민에게 배분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방안이다. 기부채납 방식도 있다. 송전설비 경과지 주민이 원하는 공공시설(체육관, 도서관, 의료시설 등)을 송전사업자 측이 제공하는 방식이다. 주민 참여형 모델 도입도 검토할만 하다. 주민들이 송전망 운영 수익 일부를 배당받는 '에너지 협동조합형 구조'를 추진하는 것이다. 이같은 방식들은 이미 해외에서는 여러차례 적용된 바 있다. 독일·덴마크 등은 대규모 송전선 건설 시 지역주민이 일정 비율의 지분을 보유하게 하여, '피해의 당사자'에서 '이익의 주체'로 전환시키는 방식을 채택했다. 국내에서도 전남 신안, 경북 영천 등 일부 지역에서 주민참여형 태양광·풍력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둔 사례가 있다. 송전망도 이와 유사한 '이익공유형 모델'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견해다. 한전은 이미 부채비율이 200%를 넘어서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송전망 사업을 추진할 여력도, 정치적 리스크를 감당할 이유도 없다"고 토로한다. 한전 내부에서도 “정부 정책은 속도전을 외치지만, 정작 실행 주체에게는 수단도 책임도 불분명하다"는 불만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송전망 사업을 민간에 개방해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된다. 통신망이나 철도처럼 일정 기준을 충족한 민간 사업자가 송전선 건설·운영을 맡고, 정부와 한전이 이를 감독하는 구조다. 그러나 정부는 '국가 기반망의 민영화 논란'을 우려해 아직까지 문을 열지 않고 있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기술도, 예산도 아닌 사회적 수용성이다. AI·데이터센터·반도체 산업이 전력 대전환기를 맞이한 지금, 송전망 확충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한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송전탑이 아니라, 신뢰의 탑을 먼저 세워야 할 때"라며 이재명 정부가 과거 정부들이 넘지 못한 '주민의 벽'을 넘는다면 '에너지 고속도로'를 통한 AI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AI와 송전망 딜레마上]AI 3대 강국 속도전…‘에너지 고속도로’ 탄력

AI 수요 폭증과 데이터센터 인프라 확대가 이재명 정부의 국정과제인 에너지 고속도로, 즉 전력망 혁신을 부추기고 있다. 경주 APEC 정상회의 이후 한국이 AI·반도체 핵심 허브로 부상하는 분위기다. 엔비디아의 GPU(그래픽처리장치) 투자발표까지 더해지면서 이를 구현하기 위한 전력망·송전 인프라 혁신도 신속하게 추진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경주에서 마무리된 2025 APEC 정상회의는 단순한 외교 행사를 넘어 한국이 AI·반도체 경쟁의 중심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신호탄이 됐다. 행사 기간 중 젠슨 황 NVIDIA(엔비디아) CEO의 한국 방문과, 국내 반도체 기업들과의 GPU 공급 및 공동 투자 계획 발표도 관심을 모았다. 이처럼 한국은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분야에서 '세계 3대 강국 진입'이라는 속도전을 본격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전략이 현실로 작동하려면 전력의 공급 체계, 즉 송전·전원 인프라가 뒷받침돼야 한다. 에너지업계에서는 AI 인프라 투자가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한국의 에너지정책은 전력 인프라 혁신, 즉 현 정부의 국정과제인 '에너지 고속도로' 구축 없이는 투자 속도와 산업경쟁력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경고도 동시에 제기된다. 인프라가 준비되지 않은 채 산업 확장만 앞선다면 경쟁력 확보는 허상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4일 전력통계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4년 동안 발전설비는 18.7%가량 늘어난 반면 송전선로 확충은 2.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에너지 고속도로'나 '대형 발전소의 대량 전력'을 실어나르는 송전망이 부족하다고 할 때, 가장 핵심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765kV 송전망과 345kV 송전망을 포괄하는 초고압 기간 송전망이다. 특히, 대용량 전력 수송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765kV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게 부각된다. 에너지 고속도로의 목표는 먼 지역(주로 해상 풍력, 태양광 단지)이나 대형 발전소(원자력 등)에서 생산한 대량의 전력을 수도권이나 대규모 산업단지로 손실을 최소화하며 빠르게 전달하는 것이다. 765kV는 한국에서 사용되는 가장 높은 전압 레벨로, 가장 많은 양의 전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장거리 송전할 수 있는 '고속도로' 역할을 한다. 345kV 대비 송전 용량이 약 3.4배 크기 때문에, 대규모 전력망 확충이 필요할 때 765kV 건설이 핵심이 된다. 현재 국내에 건설 중인 대규모 반도체 생산설비와 AI 데이터센터에는 이같은 전력망이 발전원으로부터 연결돼야 한다. 먼저 반도체 측면에서는 경기 용인시에 조성 중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대표적이다. 해당 클러스터는 지난해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됐고, 총 면적 728만㎡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기업들이 약 360조원 규모의 민간투자를 단행할 계획이다. SK 하이닉스는 이 클러스터 내 첫 공장(fab)을 2027년까지 완공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AI 데이터센터 측면에서도 대형 투자가 진행 중이다. 인천·경기 지역에서 신규 AI 데이터센터가 구축되고 있으며, 미국의 Amazon Web Services(AWS)가 한국에 대한 투자액으로 50억달러(약 7조원)를 추가 투입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도 나왔다. 또한 전라남도에는 3GW 규모 AI 데이터센터 구축 계획도 있다. 이처럼 반도체 및 AI 인프라 구축은 산업정책의 중심에 자리 잡았지만, 여기에는 전력 공급이라는 근본조건이 따라야 한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전부터 '에너지 고속도로(energy expressway)'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고압직류송전(HVDC) 등 차세대 송전기술을 활용해, 장거리·대용량·저손실 전기를 전국적으로 공급하는 인프라 구축 계획이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30년까지 송전선로 길이를 현재 약 3만7169 circuit km에서 4만8592 circuit km로 약 30% 이상 확대할 예정이다. 이는 단지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AI·데이터센터·반도체처럼 24시간 고품질 전력을 요구하는 산업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기반이다. 산업계에서는 AI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안정적 전력 공급이 생존조건이며 반도체 공장도 대형 전력 수요처로, 전력 가격·안정성이 핵심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엔비디아를 포함해 오픈AI 등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이 AI 인프라 경쟁력을 갖췄다고 평가한 이유 중 하나는 전원믹스와 송전망의 상대적 우위 때문이다. 이는 반대로 해석하면, 송전망이 빠르게 확충되지 않거나 전원믹스가 불안정해질 경우 투자가 지연되고 사업비용이 증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정부는 반도체·AI에 대한 전략적 투자를 이어가면서도 에너지 정책은 다소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탈원전·탈가스 기조가 여전히 강하며, 이러한 전원전략이 고출력·연중가동 산업과 충돌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송전망 혁신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반도체 클러스터가 '전력난·요금상승' 등 비용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에너지업계 전문가들은 향후 정부의 에너지계획 수립에서 반도체·AI 전력 로드맵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투자 규모만큼 전력 수요를 전망하고 전원·송전 인프라 동시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는 “에너지 고속도로 조기 착공을 통해 서부해안·남부권 등 반도체·AI 클러스터 인접 지역 위주로 HVDC 전송망을 우선 구축하고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기저부하인 원전·가스·수소 연계 전원 확보, 송전망 구성 최적화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각각의 반도체 팹, AI 데이터센터마다 지리·전력조건 다른 만큼 맞춤형 인프라 구축, 고전력 수요처를 위한 전력상품·계약체계 정비, 탄소배출 저감까지 고려한 시장 설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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