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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헌의 체인지] APEC, 한국의 외교적 주도권과 실질 성과

무대 위의 조명이 한곳에 모였다. 순간 공기의 밀도가 달라졌다. 경주, 그 낯익은 도시가 세계의 중심이 된 밤이었다. APEC 정상회의가 막이 오르자 시선은 곧 하나의 장면으로 빨려 들어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이 마주 앉은 그 순간이었다. 짧은 악수 뒤, 회담은 단숨에 본론으로 치달았다. 곧이어 발표된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패키지. 숫자만 봐도 숨이 막히는 금액이지만, 의미는 따로 있었다. 연간 200억 달러 이하로 분할 투자한다는 방식이었다. 단기적 이벤트가 아닌, 장기적 파트너십의 신호였다. 한국을 '일시적 거래상대'가 아니라 '미래의 시장이자 기술 동맹'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상징이었다. 한국은 미국에 “우리는 당신의 시장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고, 미국은 “그렇다면 당신은 신뢰할 만한 동맹이다"라고 답한 것이다. 한 문장의 교환이 이번 회담의 핵심이었다. 한미 협상의 진짜 성과였다. 이어진 안보 회담에서 미국은 한국의 숙원 사업인 '핵연료 추진 잠수함' 개발을 사실상 승인했다.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단순한 무기체계의 확보가 아니라, 미국이 핵심 군사기술을 공유하는 협력선에 한국을 올려놓았다는 의미였다. 이제 한국은 공조의 중심으로 이동한 것이다. '따라가는 안보'에서 '주도하는 안보'로의 변환점, 이번 승인에 담긴 진짜 의미였다. 거대 투자와 핵잠 승인은 APEC의 본회의보다 훨씬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세계가 주목한 건 회담장안 공동선언문이 아니고 회담장 밖에서 이어진 한국과 미·중·일의 연쇄 회담이었다. 실질적 약속, 구체적 행동, 한국이 그 중심에 있었다. 과거 APEC이나 ASEAN 회의가 열릴 때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늘 미국과 중국, 혹은 일본의 움직임에 쏠렸다. 의장국은 진행자에 머물렀고, 회담의 무게중심은 늘 '외부'에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경주는 외교의 지리적 무대가 아니라 외교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한국이 의장국으로서만이 아니라 실질적 조정자이자 협상가로 무대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드물다. ASEAN이나 G20에서도 의장국이 일정한 존재감을 드러내긴 하지만, 양자·삼자 회담을 동시에 주재하며 경제와 안보의 양축을 모두 흔든 경우는 손에 꼽힌다. 그러나 한국은 이번에 전례 없는 방식을 만들어 다자와 양자를 동시에 이끄는 '무대의 연출자'로 바뀐 것이다. 물론 남은 과제가 없진않다. 먼저 이번에 발표된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약속이 단순한 선언에 머물지 않게 하는 일이다. 한국 정부는 거대한 합의를 구체적 산업 전략으로 연결해야 하고, 기업들은 이를 실행 가능한 사업계획으로 세분화해야 한다. 이번 협상은 단순한 유치 실적이 아니라, 향후 10년 한국 산업의 지형을 다시 그릴 '구조적 약속'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이제 투자라는 숫자가 아니라 내용의 시간이 필요하다. 반도체, 인공지능, 방산, 청정에너지 같은 전략산업에 어떤 방식으로 그 자금이 흘러들지, 어떤 기업이 주도하고 어떤 지역이 중심이 될지가 중요하다. 외교가 현실경제로 연결될 때, 그것이 비로소 '국익'이 된다. 핵연료 추진 잠수함 사업도 그렇다. 미국의 승인 선언은 시작일 뿐이다. 진짜 성과는 기술협력과 연료공급, 그리고 제작역량 확보로 이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한국이 자주적 안보 역량을 갖추려면, 단순한 첨단 무기 도입을 넘어 자체 제작 체계를 세워야 한다. 이를 위해선 국내 방위산업 생태계를 새로 짜고, 연구·인력·제조 라인을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동시에 국제사회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한 투명성 확보도 필수적이다. 핵 관련 기술은 언제나 국제 규범과 감시의 대상이다. 한국은 '평화적 이용'이라는 원칙 위에서 신뢰를 증명해야 한다. 미국과의 동맹은 투명성 위에서만 단단해진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번 성과들을 APEC 틀 안에서 제도화하는 일이다. 지금의 외교적 존재감이 일회성 이벤트로 소모된다면, 어떤 성과도 오래가지 못한다. 미국, 중국, 일본을 포함한 핵심국을 하나의 협력 구조로 묶어내는 경제·안보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외교의 무게중심은 '이벤트'가 아니라 '시스템'에 있을 때 유지된다. 외교는 말보다 결과로 평가된다. 이번 회담은 '말'이 아니라 '실행'을 예고한 자리였다. 이제 남은 일은 분명하다. 합의를 현실로, 약속을 구조로 바꾸는 일이다. 그것이 한국에게 남긴 진짜 과제이자, 앞으로의 도전이다.

[김병헌의 체인지] 협상은 끝났지만 계산은 시작됐다

교착 상태였던 협상이 한순간에 움직였다. 한·미 정상의 건배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긴 인내의 결실이었다. 외환시장 불안, 산업계의 긴장, 여야의 정치 공방 속에서 한 줄기 돌파구가 열린 것이다. 3 5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숫자와 함께, 우리는 보호무역의 높은 벽을 넘어 또 한 번의 '경제 안보의 줄타기'를 완성해냈다. 그러나 “극적 타결"이라는 말이 끝을 뜻하지 않는다. 이제 본격 시작이다. 협상의 핵심은 단순한 관세율 조정이 아니다. 협상 테이블 위에 오른 것은 우리의 외환 안정, 산업 구조, 대미 투자, 나아가 미래의 기술 주권이었다. 미국은 '전액 현금 투자'를 요구했지만 최종 합의안은 3 500억 달러 중 2 000억 달러 현금, 1 500억 달러 조선업 협력으로 정리됐다. 현금은 연간 200억 달러 한도, 외환시장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포함됐다. 여기에 투자 손실 방지를 위한 공동위원회 구성, 상업적 합리성 검증, 20년 원리금 회수 조건이 붙었다. '협상'이 아니라 '공학' 수준의 계산이 들어간 타결에 가깝다. 조선업 협력 사업 1 500억 달러는 단순한 산업 지원이 아니다. 미국이 필요로 하는 해양운송·방위 인프라 분야를 한국이 맡아 공동 개발하는 구조다. 현금은 줄이되 산업 동맹을 강화한 것이다. 협상단의 세밀한 전략이 돋보였다. 달러를 지키면서 신산업의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지만 최종합의까지 멀었다. 구체적인 프로젝트 구성, 수익 배분 비율, 원금 보전 방식은 모두 추후 세부 협의로 남았기 때문이다. 완성본이 아니라 '설계도'만 마무리됐다. 추가 협의의 세부 쟁점은 다섯 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연간 투자 시기 조정 조건이 있다. 외환시장이 요동칠 때 투자 일정을 얼마나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공동위원회의 구성 방식. 투자 대상을 결정할 실질적 권한이 한·미 어느 쪽에 있느냐는 협상의 핵심 줄기다. 원리금 상환 비율 문제도 상존한다. 20년 안에 회수되지 않을 경우 수익 배분 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이 조항은 향후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또 조선업 협력 사업의 보증 구조도 확정되지 않았다. 정부가 보증을 얼마나 떠안고, 민간 기업이 어느 수준까지 참여할지가 시장 신뢰를 좌우한다. 마지막으로 환율 급등 시 긴급 중단 메커니즘이 남아있다. 자본 유출이 현실화될 경우 투자 집행을 얼마나 신속히 제어할 수 있느냐는 외환 방어의 결정적 변수다. 이번 협상의 숨은 뇌관이 이 다섯 축이며 타결의 완성도를 결정할 잔여 과제다. 겉으로는 합의의 틀이 갖춰졌지만, 세부 내용은 이제부터다. 외환·산업·통상·금융이 교차하는 다층 협상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그럼에도 이번 타결이 던지는 의미는 분명하다. 미국 주도의 보호무역주의 속에서도 한국은 자유무역의 잔존 공간을 확보했다는 평가다. 상호 관세율을 15%로 맞춘 것은 일본·EU와 동일한 수준이며, 이는 우리 수출 경쟁력의 방어선이기도 하다. 특히 자동차 관세가 25%→15%로 하향되면서 현대자동차·기아 등 주요 수출기업은 숨통을 틔웠다. '15%'는 동시에 새로운 시험대다. 한국 제조업의 평균 영업이익률이 5~10%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관세 부담은 여전히 버겁다. 미국 현지 생산이 늘면 국내 투자 여력이 줄고, 일자리의 국내 유지율은 떨어진다. 외교적 성공의 협상일지언정, 산업의 현장은 더 팽팽해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과 EU의 사례를 주목해야 한다. 일본은 인프라 중심의 '제로 리스크 투자', 즉 손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정부 보증형 프로젝트만 합의했다. 반면 한국은 산업 협력과 시장 개방을 병행했다. 일본은 방어형, 한국은 진출형 모델이다. EU 역시 미국과의 협상에서 관세 상쇄 대신 기술 공동표준 제안을 통해 산업 주도권을 확보했다. 한국은 이번에 자금과 기술, 외교를 동시에 걸었다. 그만큼 리스크와 보상이 모두 크다. 결국 문제는 타결이 아니라 지속성이다. 합의가 단기적 안정을 주는 대신 중장기 부담으로 돌아오지 않으려면, 다음 세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첫째, 달러 유동성 방어선 구축이다. 미국 투자 집행이 시작되면 환율은 즉각 반응할 것이다. 정부는 외환시장 개입보다 장기 스왑라인 확충 등 구조적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산업 리디자인이다. 대미 투자로 빠져나갈 자본만큼 국내 산업에 신산업 펀드를 유입해야 한다. 조선, 반도체, 배터리, AI, 항공 등 핵심 전략산업의 내수 생태계도 단단히 세워야 한다. 셋째, 통상외교의 다변화 속도전이 더욱 절실해졌다. 미국에만 시선을 고정하면 일본·EU, 나아가 아세안 시장의 경쟁력이 무너진다. 시대엔 한발 빠른 다변화가 생존 전략이다. 주목할 것은 반도체 부문의 불확실성이다. 정부는 “우리 측은 반도체 관세에서도 경쟁국인 대만과 비교해 불리하지 않은 수준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 측 발표는 조금 온도가 달랐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이번 합의에 반도체 관세 조정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SNS를 통해 주장했다. 명시적 품목관세 인하는 반도체에 대해 아직 잠정적이며, 품목별 리스크도 여전히 남아 있다. 자동차 관세 인하는 구체화됐지만 “언제부터 적용하느냐"가 정부 절차에 달려 있다는 보완도 존재한다. 양국 발표 간의 차이는 단순한 어휘 차이가 아니다. 이는 산업계에 '신뢰의 시계'를 맞추는 문제다. 미국이 세부 문서 서명 전까지는 관세 부과 조정, 프로젝트 선정, 수익구조 변화 가능성 등을 열어두었음을 의미한다. 반도체가 품목관세 테이블 위에 올라갔다는 사실만으로 호재라 할 수 있지만, 그만큼의 불확실성도 남아 있다. 협상 타결은 이제 첫 페이지다. 외환·산업·무역·기술이 교차하는 다층 협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녹록치 않다. 환율을 지키고, 산업을 재편하며, 통상외교를 재구성해야 한다. 새로운 출발선 위에 서 있는 지금, 한국 경제는 이제부터다.극적인 타결보다 더 어려운 것이, 냉정한 지속임을 알아야 한다.

[김병헌의 체인지] 뜨거운 증시, 거품인가 회복인가

요즘 증시가 뜨겁다. 카카오톡 단체방마다 주가 이야기가 오가고,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요즘은 주식이 답이야"라는 말이 자연스럽다. 반도체, 조선, 방산을 중심으로 주요 종목이 신고가를 경신하면서 투자심리가 한껏 달아올랐다. 올해 들어 코스피는 세계 주요국 가운데 가장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이른바 '미친 장세'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지금의 상승이 실질적인 회복의 신호인지, 아니면 과도한 기대와 유동성이 만든 착시인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낙관론자들은 이번 상승을 '정당한 재평가(Re-rating)'로 본다. 그동안 저평가돼 왔던 한국 증시의 구조적 한계가 완화되고, 글로벌 투자자들이 다시 한국 시장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과거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요인이던 낮은 배당성향, 불투명한 지배구조, 정책 불확실성이 최근 개선되고 있다. 일부 기업은 배당을 늘리고, 자사주 소각 등 주주환원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정부 역시 기업 가치 제고를 위한 제도 개선 방안을 내놓으며 시장의 체질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반면 신중론자들은 “기대가 이익을 앞서간다"고 지적한다. 현재 주요 업종의 주가수익비율(PER)은 글로벌 경쟁사보다 높게 형성돼 있다. 조선주는 미국의 기술주보다, 방산주는 글로벌 방산 대기업보다 비싸다. 그러나 이들 기업이 아직 기술력이나 시장 확장에서 뚜렷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이번 상승이 실적이 아닌 기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실물의 성장 없이 오르는 주가는 언제든 조정받을 수 있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여전히 회복 중이다. 주요 기관들은 내년 성장률을 1.6~1.9%로 전망한다. 2%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성장이지만, 그 안에서 구조적 변화의 조짐은 나타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은 사이클 회복과 AI 수요 확대의 수혜를 받고 있고, 조선과 방산 업종은 수주 경쟁력 강화를 통해 체질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동시에 2차전지, AI, 바이오 등 신성장 산업으로의 투자도 확대되고 있다. 실물은 더디지만 방향성은 분명하다는 평가다. 다만 유동성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저금리 기조와 풍부한 시중 자금이 주식시장으로 몰리며 상승세를 키우고 있다. 부동산 시장이 정체된 상황에서 '돈의 피난처' 역할을 주식이 대신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거품의 잠재 위험을 내포한다. 실물보다 빠르게 오른 주가는 언제든 되돌림이 가능하다. 결국 지금의 장세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해소'와 '유동성 버블의 팽창'이라는 두 얼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환율과 물가 또한 증시 흐름의 중요한 변수다. 원화는 2022년 이후 주요국 통화 중 가장 약세를 보였고, 수입 물가 상승으로 체감 인플레이션이 여전히 높다. 그러나 환율 약세를 단순히 경제 취약성의 신호로만 해석하긴 어렵다. 엔저로 반사이익을 누리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고부가 산업 중심의 구조로 재편 중이다. 원화 약세는 수출기업의 수익성 개선을 도와 단기적으로는 주가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럼에도 구조적 과제는 분명하다. 국내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외국인 자금이 충분히 유입되지 않는 현상은 여전하다. 2012년부터 올해 8월까지 한국의 해외 증권투자는 7917억 달러에 달하는 반면, 외국인의 국내 증권투자는 2900억 달러 수준에 그쳤다. 이처럼 내국인끼리 사고파는 '내수형 증시' 구조는 시장의 깊이를 제한한다. 결국 글로벌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면 상승세의 지속 가능성에도 의문이 남는다. 지금의 증시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분명 과열의 조짐은 있지만, 그 안에 깃든 구조적 변화의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단기 상승이나 하락의 방향이 아니라 그 상승이 무엇에 기반하느냐이다. 실적과 혁신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승은 허상으로 끝나지만, 산업 경쟁력과 제도 개선이 동반된 상승은 진짜 회복의 신호가 될 수 있다. 정부와 시장 모두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오르게 하자"는 구호가 아니라 “왜 오르는가"를 냉정히 분석하는 일이다. 산업 혁신 없이는 성장의 바닥을 깰 수 없고, 금융정책의 정상화 없이 자산시장의 균형도 불가능하다. 단기 부양보다 체질 개선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기술, 인력, 제도 — 어느 하나 혁신 없이 버티려는 경제는 결국 정체된다. 지금의 한국 증시는 불안한 거품이자, 동시에 새로운 기회의 문턱에 서 있다. 이 상승이 허상으로 꺼질지, 아니면 진짜 회복의 서막이 될지는 결국 실물경제가 답할 것이다. 결국 시장은 언제나 냉정하다. 실물보다 앞서간 주가는 결국 현실을 따라 내려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하강을 충격이 아닌 조정으로 만드는 것이 진짜 경제의 힘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포도, 맹목적 낙관도 아닌 냉정한 균형감이다.

[김병헌의 체인지] 캄보디아 사태···기회의 문이 닫히면, 청년은 국경 밖으로 떠난다

서울 강남의 밤은 여전히 환하다. 하지만 그 불빛 속에 앉은 청년의 얼굴엔 그림자가 짙다.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그의 눈에 '월수입 1000만 원 가능'이라는 문장이 반짝인다. 마지막 희망을 거는 손끝이 '지원하기'를 눌렀다. 그 선택이 인생의 경계선을 바꾸어 놓았다. 몇 달 뒤, 그는 캄보디아의 범죄단지에서 구조 요청 메일을 보냈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어디 있습니까." 그 짧은 문장이 지금 이 나라 청년들이 보내는 구조 신호이자, 한 사회의 무관심이 낳은 기록이었다. 캄보디아 사태는 단순한 외교 실패가 아니다. 그건 국가가 청년의 절박함을 외면해온 세월의 결과다. 정부는 “현지 경찰에 신고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말에는 한국 사회의 무책임과 체념이 응축돼 있다. 외교의 실패는 사건으로 남지만, 청년의 방치는 구조로 남는다. 우리는 이 사건을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흘려보내고 있지만, 그들의 절규는 오래전부터 이 땅에서도 들려오고 있었다. 청년 취업자는 1년 새 10만 명 넘게 줄었고, 비정규직 비율은 38%를 넘어섰다. 제조업 일자리는 14개월 연속 감소했다. 청년 네 명 중 한 명이 계약직으로 사회에 들어선다. 면접장은 점점 좁아지고, 합격 통보는 희귀해졌다. “경험이 없어서 탈락했습니다." 같은 문장이 반복된다. 경험할 기회를 얻지 못한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기회를 막아온 사회의 책임이다. 우리는 청년에게 언제까지 '스스로의 무능'을 증명하라 강요할 것인가. 대학은 여전히 이론의 섬 위에 있고, 기업은 즉시 쓸 수 있는 인재만 원한다. 정규직은 과보호되고, 비정규직은 버려진다. 청년이 정규직 문을 두드릴수록 그 문틈은 더 좁아진다. 정부는 매년 '청년 일자리 종합대책'을 발표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이름만 달라질 뿐 본질은 늘 제자리다. 정책은 소리만 요란하고, 현장은 변하지 않는다. 정년 연장과 주4.5일제는 이미 자리를 가진 세대의 안락을 위한 제도일 뿐, 아직 자리를 얻지 못한 세대의 구명줄이 아니다. 캄보디아로 떠난 청년들이 그토록 위험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돈 때문만이 아니다. 이 땅에 남아 있을 이유를 잃었기 때문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사람들, 더 이상 시도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 그들이 떠난 자리엔 불안이 남고, 그 불안은 다시 누군가의 절망으로 이어진다. 이런 순환이 몇 번이고 반복되면 한 세대 전체가 '패배의 감정'에 익숙해진다. 독일은 대학과 기업이 함께 설계한 도제 시스템으로 청년이 졸업과 동시에 '현장 경험자'로 사회에 들어설 수 있도록 만들었다. 스위스는 청년 인턴의 임금을 정부가 일정 부분 보조하고, 정규직 전환 시 세제 혜택을 준다. 일본은 지방 중소도시에 청년 고용과 창업 클러스터를 만들어 수도권 집중을 완화했다. 그들은 청년을 '보호의 대상'이 아닌 '경제의 주체'로 다뤘다. 청년이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길을 국가가 설계해준 것이다. 반면 우리는 여전히 단기 알바성 대책과 공허한 구호만 되풀이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구조다. 청년이 졸업과 동시에 사회와 이어지는 통로, 기업이 청년을 채용할 이유가 생기는 인센티브, 지역이 청년을 품을 수 있는 생태계, 무엇보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을 일자리 정책의 일관성이다. 기회의 문을 여는 일은 거창한 혁신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상식을 실행으로 옮기는 용기다. 캄보디아에서 죽어간 청년의 메일은 외교부의 스팸함에 묻혔다. 지금 이 땅에서도 수많은 청년이 매일 이력서라는 이름의 구조 요청을 보내고 있다. 그들의 절박한 신호에 국가는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직접 신고하라"는 말로 책임을 미루고 있는가. 청년의 절망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의 무능이 낳은 결과다. 기회의 문이 닫히면 청년은 국경 밖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엔 언제나 위험이 기다린다.우리가 외면한 청년의 메일이 캄보디아의 비극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그 메일을 읽을 시간이다. 그리고 응답할 시간이다. 청년을 구조하지 못하는 사회는 스스로의 미래를 구조할 수 없다. 변화는 제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타인의 절망을 읽어내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김병헌의 체인지] 국정감사와 권력분립의 충돌··· 헌정의 선을 그을 때

정치는 언제나 권력의 경계 위를 걷는다. 국정감사도 그중 하나다. 감사라는 이름 아래 감시와 견제는 민주주의의 필수 장치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개입'과 '간섭'의 경계로 흐려진다. 13일 시작된 법제사법위원회 국감에서 대법원장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을 놓고 충돌 논란을 빚는게 그 예다. 국회는 국민의 대표로서 사법부를 감시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고, 법원은 사법의 독립이 흔들릴 수 있다고 반발한다. 어느 쪽도 완전히 틀리지 않지만, 헌법이 말하는 삼권분립의 정신은 어느 한쪽의 '승리'로 완결되지 않는다. 국정감사는 헌법 제61조가 규정한 국회의 권한이다. 국정 전반에 대한 감사와 조사, 국민을 대신한 통제의 기능을 수행한다. 여당은 이를 통해 “국민의 눈높이에서 권력을 감시한다"고 말하고, 야당은 “행정부뿐 아니라 사법부도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기에 예외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법원 내 인사 문제나 특정 판결의 배경이 정치적 이해와 얽혀 있다는 의혹이 불거질 때, 국회의 '확인권'은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사법부라고 해서 성역이 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헌법이 규정한 권력분립은 단순히 권한의 분배가 아니라, 상호 간섭을 금지하는 질서의 합의다. 법원은 법률의 해석과 판결을 통해 최종적 판단을 내리는 기관이다. 입법부가 그 내부 판단 구조를 증인석에서 따지기 시작하면, 그 순간 사법부의 독립은 흔들린다. 비슷한 논쟁은 해외에서도 있었다. 1950년대 미국 의회는 연방대법관 몇 명을 증인으로 소환하려 했다. 특정 판결이 의회의 입장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법무부와 법학자들은 한목소리로 “이는 사법권의 독립을 침해한다"고 반대했다. 결국 대법관들은 의회 출석을 거부했고, 이후 미국에서는 사법부 수장을 청문회나 감사 자리에 세운 전례가 사라졌다. 대신, 연방대법원은 '윤리 보고서'와 '행정 투명성 문건'을 매년 의회에 제출하면서, 제도적으로 설명 책임을 다하는 방식을 택했다. 직접 심문 대신 제도적 투명성으로 신뢰를 회복한 것이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연방헌법재판소의 소장이나 판사들은 국회 청문회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 사법평의회와 헌법위원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법원 행정이 통제된다. 프랑스에서는 아예 사법부에 대한 국정감사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국가는 모두 '견제는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통해 권력분립을 살아 있는 시스템으로 만든다. 우리의 경우, 국회가 대법원장을 증인으로 부르려는 시도는 헌법상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헌정의 역사에서 “할 수 있다"가 곧 “해야 한다"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민주주의는 절제가 있어야 지속된다. 여당은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다"는 국민 여론을 배경으로, 사법권을 '책임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반면 야당은 “정권이 사법부를 길들이려 한다"고 반발하며, 대법원장의 출석은 '정치적 압박'으로 본다. 결국 한쪽은 투명성을, 다른 한쪽은 독립성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문제는 이 논쟁의 밑바닥에 '사법 불신'이라는 공통된 뿌리가 있다는 대목이다. 정치가 법원을 신뢰하지 못하고, 국민이 판결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견제와 개입의 경계는 더욱 희미해진다. 국회가 대법원장을 불러 세워 질문을 던진다고 해서 신뢰가 복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법부가 정치의 무대에 서는 순간, 재판의 권위는 정치적 해석에 잠식된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1988년, 제5공화국 청문회 당시 사법부의 일부 인사들이 정치적 책임 논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당시 국회는 대법원장 출석 요구를 끝내 철회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사법부를 국회의 증인석에 세우는 순간, 권력분립의 마지막 선이 무너진다."그 선을 넘지 않음으로써, 한국 민주주의는 최소한의 헌정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재판의 투명성, 법원행정처의 권한 남용, 판사 인사제도의 폐쇄성 등은 꾸준히 비판받아왔다. 하지만 그것을 고치기 위한 방식이 '정치적 청문회'가 되어선 안 된다. 미국처럼, 사법부가 스스로 국민 앞에 행정 보고를 제출하고, 윤리 감시 제도를 강화하는 방식이 보다 지속 가능하다. 국정감사와 권력분립의 충돌은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국회가 사법부를 감시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사법부도 정치로부터 독립할 권리가 있다. 양쪽 모두 헌법의 일부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헌법이 요구하는 것은 '모두의 권리'보다 '각자의 절제'다. 견제는 필요하지만, 신중해야 한다. 개입은 유혹적이지만, 헌정의 질서는 그것을 금한다. 민주주의의 품격은 힘을 어떻게 쓰느냐보다, 어디서 멈추느냐로 판가름난다. 국정감사는 감시의 눈이지만, 그 눈이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헌정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사법부가 독립을 잃는 순간,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도 함께 흔들린다. 오늘의 논란은 단지 대법원장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앞으로도 헌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느냐의 시험대다. 견제의 힘과 절제의 미학, 그 중용의 지점이 지금은 어딘지 정확히 알 수없지만 모두의 노력과 연구,시행착오를 통하면 적절한 지점은 반드시 나올것이다. 여기서부터 진짜 민주주의는 자란다.

[김병헌의 체인지] 이재명 정부, ‘실용’의 끝은?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 어느날 밤 서울 도심의 한 카페. 스무 살 청년들 서넛이 유튜브 정치 채널을 보며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누군가는 대법원장을 조롱하는 밈을 공유하고, 또 다른 이는 “이번 부동산 대책으로 무조건 집값은 떨어진다"며 장담한다. 현실은 결코 단순하지 않지만, 그들의 스마트폰 속 세계는 한 편의 쇼처럼 흘러간다. 문제는 이 환상과 흥분이 점점 더 사회의 의사결정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는 원래 제도와 법, 차가운 숫자와 데이터에 근거해 움직여야 한다. 지금은 감정과 영상, 팬덤과 음모론이 제도를 압도하고 있다. 대법원장을 둘러싼 의혹이 국회의 의제가 되고, 사실 확인보다 유튜브 채널의 해석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합리적 토론은 자취를 감추고, 여론조사 수치만이 진실인 것처럼 소비된다. 결국 정치가 냉정한 판단을 잃고 흥분의 무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경제와 외교도 걱정스럽다. 지금도 지지부진한 한미 관세 협상을 보자. 정부는 3500억 달러 투자와 관세 15% 인하를 성과라고 홍보했지만, 따져 보면 이익보다 손해가 크다. 한국은 이미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무관세 혜택을 받고 있었고, 투자 규모는 GDP 대비 일본이나 유럽보다 훨씬 무겁다. 투자 성격조차 불분명한 상황에서 합의서 한 장 없이 “성공"이라 포장한 것은 현실을 가린 자화자찬일 뿐이다. 국가 재정을 담보로 한 거대한 모험을 “성과"라 부르는 것은 책임 있는 협상이 아니라 눈속임에 가깝다. 아파트로 대표되는 부동산 정책은 더 심각하다. 문재인 정부가 5년 동안 28번 대책을 쏟아내고도 실패했던 이유는 수요 억제와 공공임대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 역시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주택담보 대출을 제한하고, LH 중심의 공급 확대를 내세웠지만, 정작 민간 건설사들은 움츠러들었다. 서울의 아파트 공급은 오히려 줄고, 청년들의 내 집 마련 꿈은 멀어졌다. 공공임대 확대가 근본 해법이 될 수 없음은 이미 입증됐다. 하지만 집권 세력은 여전히 민간 공급보다는 표심 관리에 유리한 방식에만 집착한다. 시장은 더 왜곡되고 집없는 서민들의 고통은 커져만 간다. 에너지 정책 역시 불안하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실험으로 원전 생태계가 붕괴된 뒤 이제야 회복 기미를 보이는데, 이재명 대통령은 원전 건설 백지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재생에너지가 중요하다는 데 이견은 없지만, '15년이 걸린다'는 이유만로 원전 포기 가능성에 자락을 깔아놓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국가 에너지 안보는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업계도 투자를 멈추고 인재는 해외로 빠져나갈 수 밖에 없다. 단순한 정책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근간을 흔드는 선택이 되는 셈이다. 정치도 과거의 그림자가 가시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반대 진영을 몰아붙였다면, 이재명 정부는 내란 청산을 내세우며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국회는 합의와 타협 대신 거대 여당의 단독 처리가 일상화되었고, 관행은 무너지고 있다. 제도와 규칙이 무너진 자리에는 선동과 진영 논리뿐이다. 국민은 점점 정치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대립과 갈등이 깊어진다. 더 큰 문제는 많은 시민들이 이런 정치 속에서 오히려 '힘을 가졌다'는 착각에 빠진다는 대목이다. 유튜브와 SNS는 짜릿한 정치적 흥분을 제공한다. 지지자들은 자신이 국가의 주인공이 된 듯한 환상을 맛본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검찰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범죄자들은 무죄를 받기 쉬워졌고, 피해자들은 변호사비 부담에 시달릴 일만 남았다. 정치적 흥분은 달콤하지만, 실제 삶은 더 고단해진다. 결국 손해는 국민이 본다. 이재명 정부의 문제는 몇 가지 정책 실패가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환상에 기대려 한다는 것이가장 큰 문제다. 관세 협상에서 포장된 성과, 부동산과 에너지 정책에서 반복되는 오류, 청산 정치라는 이름의 대립과 갈등, 팬덤 정치와 음모론이 제도를 압도한다. 현실을 외면하고 눈앞의 환상에 취한 결과다. 정치는 흥분과 쇼의 무대가 아니다. 차가운 이성과 냉정한 계산 위에서만 나라가 굴러갈 수 있다. 지금처럼 환상과 감정에 기대는 정치가 계속된다면, 이재명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단순히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깊고 심각한 위기로 향할 수밖에 없다.

[김병헌의 체인지] 루스벨트의 교훈과 민주당의 선택

1937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추진했던 '사법부 개편 계획'은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대공황 극복을 위해 뉴딜 입법을 밀어붙였지만 연방대법원은 잇따라 위헌 결정을 내렸고, 이에 루스벨트는 대법관 정원을 늘려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끌어내려 했다. 언론은 이를 “사법부 길들이기"라 규정했고, 여론은 거세게 반발했다. 결국 계획은 무산되었고, 권력과 사법의 경계가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교훈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그 기억은 지금 한국 정치가 맞닥뜨린 장면과 묘하게 겹쳐진다. 지난 2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민주당은 단독으로 조희대 대법원장 청문회 개최를 의결했다. 헌정사상 처음있는 일이다.대법관과 부장판사, 한덕수 전 총리까지 포함됐다. 민주당은 “사법부가 의혹을 키우고 있다"고 몰아붙였고, 국민의힘은 “사법부를 단두대에 세우려 한다"며 퇴장했다. 그래도 민주당은 30일 결국 조희대 대법원장 등의 불출석으로 '대법원장 없는 대법원장 청문회'를 강행했다. 이어 오는 13일과 15일 대법원 현장국감을 통해 조 대법원장의 대선 개입 의혹 파헤치기를 이어간다. 민주당이 이같이 초유의 카드를 꺼내든 이유는 여러 갈래로 읽힌다. 무엇보다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이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된 것이 결정적 계기다. 통상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까지는 평균 994일이 걸리는데 이번 사건은 단 34일 만에 결론이 났다. 이례적 속도는 정치적 개입 논란을 자극했고, 민주당은 “사법부의 정치 개입"으로 규정하며 반격의 명분으로 삼았다. 청문회를 통해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불러낸다면 그 판결을 단순한 법리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의혹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 있고,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 또한 정치 공방 속에 희석된다. 앞으로도 대통령 관련 재판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고려하면, 국회가 사법부를 불러냈다는 선례가 압박이 될 수 있다. 사법부는 어떤 판결을 내리든 정치적 시비를 피하기 어려워지고, 그만큼 독립성은 위축된다. 설령 증인들이 불출석하더라도 “사법부가 의혹을 회피한다"는 프레임을 만들어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그러나 대법원장이 국회 증인석에 서는 순간, 입법부가 사법부를 직접 조사하는 모양새가 된다. 삼권분립의 경계는 급격히 허물어지고, 사법부는 독립 기관이 아닌 정치 권력의 심문 대상처럼 전락한다. 사법부 독립 원칙을 흔드는 행위다. 여기에 정치적 색채의 의혹이 청문회에서 다뤄진다면 국민은 판결문보다 정치적 해석에 귀 기울이게 된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깊다고는 하지만 정치가 법정을 대체하는 광경은 낯설고 불편하다. 판사와 검사가 증인석에 앉아 정치인들에게 호통을 듣는 모습은 익숙지 않은 장면이고, 이는 곧바로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인상을 남길 수 있다. 루스벨트의 실패가 말해주듯 권력이 사법부에 직접 개입하려는 시도는 대체로 역풍으로 끝난다. 일본에서도 1970년대 정치권이 대법관 인사에 개입하려다 여론의 저항을 받았고, 최근 헝가리와 폴란드는 집권 여당이 사법부를 장악하려다 '민주주의 후퇴'라는 국제적 비판과 함께 유럽연합의 제재를 받았다. 민주당의 시도 역시 사법부 길들이기라는 낙인을 남길 수 있고, 훗날 정권 교체 시 역공의 빌미가 될 수 있다. 결국 국민의 신뢰를 상실한 권력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와 국제 사례가 남긴 분명한 교훈이다. 국회는 청문회라는 권한을 정파적 목적에 따라 남용하지 않아야 한다. 사실관계가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회동설이나 재판 거래 의혹을 앞세워 대법원장을 증인석에 세우는 방식은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해친다. 사법부 역시 자정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판결의 속도와 절차적 공정성에 대한 국민의 의문이 있다면 이를 해명할 책임은 사법부에 있다. 국민 신뢰는 판결문의 법리보다 절차의 투명성에서 비롯된다. 언론과 시민사회 또한 정치가 짜놓은 프레임을 그대로 중계하기보다 사실에 기반한 감시와 검증으로 민주주의의 균형을 지켜야 한다. 무엇보다 입법, 행정, 사법 어느 한 축도 일방적으로 우월해서는 안 되며, 권력 분립과 견제라는 헌법적 원칙을 존중하는 절제가 시급하다. 루스벨트의 '사법부 개편 계획'이 좌초된 이유는 단순히 정치적 힘의 부족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민의 신뢰라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정치가 맞닥뜨린 상황도 다르지 않다. 대법원장 청문회라는 초유의 시도가 정치적 주도권을 가져다줄 수는 있어도, 사법부 독립을 흔드는 순간 민주주의의 근간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권력은 사법을 잠시 압도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의 신뢰를 잃는 순간, 그 권력은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결국 변화는 여기서 시작돼야 한다. 정치가 법 위에 군림하는 순간 국민은 더 이상 법치를 신뢰하지 않는다. 권력은 사법을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국민의 신뢰 없이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김병헌의 체인지] 역사의 기시감과 이재명 대통령

1980년 가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발 뉴스는 언론을 점령했다. 국보위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 하에서 신군부세력이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매일같이 국보위의 '새 법률 공포' 속보가 쏟아졌고, 불과 6개월 동안 189건의 법률이 만들어졌다. 법은 권력자의 도구였고, 재판은 각본 있는 연극이었으며, 야당은 허깨비에 불과했다. 국민은 숨죽였다. 그 시절을 살았던 이들은 지금도 황당한 그때의 공기를 기억한다. 45년이 흘렀다. 사람들 사이에서 묘한 기시감이 올라온다. 특히 당시를 겪은 국민들에게는 어디서 본 장면 비슷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최근 행보가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기 때문이다. 노동 편향 입법, 특별재판부 추진, 야당 배제 전략,대법원장에 대한 탄핵 움직임 등…. 당시 국보위가 기업만 바라봤다면 지금 민주당은 노조만 바라본다. 방향과 본질은 다를지 몰라도 행태는 얼핏 비슷해보인다. 힘이 원하는 쪽 손만 들어주는 편파 입법. 국보위 시절 판사들은 이미 정해진 결론을 읽고 황급히 법정을 빠져나갔다. 민주당이 말하는 특별재판부는 구성이 된다면 그 재판의 복사판과 유사해질 것이다. 원하는 결론을 내기 위해 판사까지 직접 짜겠다는 발상은 상식적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야당 배제는 더 노골적이다. 국보위가 반대 세력을 몰아냈듯, 민주당은 국민의힘을 '내란 세력'으로 낙인찍는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정청래 민주당 대표가 “내란 종식"을 외치며 정치적 몰이를 하는 장면은 80년대 국보위의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현명한 국민들은 다 안다. 잘못된 계엄 선포사태가 빌미였지만 진짜 내란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정치적 내란 상태를 인위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전략의 색채가 짙다. 당시와 다른점은 민주당의 폭주(?)와 달리 이재명 대통령의 언어는 결이 다른다는 대목이다. 정청래 대표가 '내란 척결'을 외치면 이재명 대통령은 '국민 통합'과 '절차적 민주주의'를 말한다. 이 모습도 보기에 따라 1980년의 최규하 당시 대통령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게 한다. 최규하 당시 대통령은 명목상이지만 최고 지도자였다. 그래도 국민은 그에게 최소한의 합리성을 기대했다. 전두환이라는 실세는 따로 있었고 역사의 큰 물줄기는 그를 삼켜버렸다. 이재명 대통령은 물론 그와는 확연히 다르다.민주적 절차에 따른 '진짜 대통령'이다. 하지만 최근 겉모습은 적지 않게 닮아 간다. 민주당의 폭주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지만 전적으로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항상 민주주의의 형식을 말하지만, 그 형식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기대를 걸었던 지난 8일 여야 대표와의 회담 이후 에도 달라진 것은 없다. 민주당의 폭주를 완충하는 언어만을 제공할 뿐, 근본적으로 방향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최규하 당시 대통령과 닮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민주당이 지금처럼 이어진다면 국민은 '야당 없는 정치'의 위험을 체감할 것이다. 보수층은 물론이고 중도층과 청년층도 국보위의 기억을 떠올릴 가능성은 커진다. 그러면 내년 지방선거는 단순한 지역 권력 교체가 아니라 '선거혁명'으로 기록될 공산도 없지 않아 보인다. 민주당의 '내란 프레임'은 역풍이 될 수 있다. 정치적 내란 상태를 선거까지 끌고 가려는 전략은 결국 국민의 심판을 부르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45년전과 무대만 다를 뿐, 주연은 역시 국민이다. 역사는 늘 같은 교훈을 남겼다. 권력은 취하면 무너진다. 국보위가 그랬듯, 권력을 독점한 세력은 이유가 정당해도 국민의 제동에 걸린다. 민주당이 아무리 입법을 밀어붙이고 특별재판부를 주장하고 각종 개혁과 내란 종식을 외쳐도 한계가 있다. 국민은 기시감을 기억한다. 그 기억을 투표장에 가져갈수 있다. 이 대통령의 입장에선 최 전 대통령을 닮았다는 주장이 제기되면 심기는 몹시 불편할 것이다. 민주정 체제에서의 엇박자는 질서 안의 '주도권 싸움'이라면, 전두환-최규하의 경우는 '권력 찬탈'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폭주의 가운데 있으면서 폭주를 끝내 제어하거나 책임지지 못한다면...이 대통령도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완충 장치로 존재하다가 퇴장할 수도 있다는 가설이 성립한다 . 1980년대의 불행한 상황의 끝이 민주화 혁명이었다면 2020년대 중반의 민주당 행태는 민주주의 균형 보정을 위한 '선거혁명'으로 비화될 수 있다. 새정부 출범이 고작 100일이 막 지난 시점이다. '협치' '경제' '통합'을 강조하는 대통령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김병헌의 체인지] 검찰 폐지 논쟁...개혁인가 주도권 싸움인가

정치사의 큰 분기점은 언제나 권력 내부의 균열에서 비롯된다. 지금 여권이 맞닥뜨린 '검찰 개혁'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한 제도 개편이 아니다. 대통령과 당 대표라는 두 축이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권력의 균형을 흔들고 있다. 제도 개혁을 넘어, 누가 여권의 진짜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를 가르는 시험대처럼 보인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국무회의에서 “너무 세게 밀어붙이면 국민 여론이 등을 돌릴 수 있다"고 말했다.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며 합리적 토론을 강조한 것이다. 정청래 대표는 의원연찬회에서 “개혁은 자전거 페달과 같아 멈추면 쓰러진다"며 속도전을 주문했다. 지체는 곧 패배라는 절박한 메시지로 읽힌다. 대통령은 절제와 균형을, 대표는 돌파와 속도를 말하고 있는셈이다. 겉으로는 같은 목표를 향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는 권력의 향방을 두고 서로 부딪치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김대중 정부의 금융개혁, 노무현 정부의 검찰개혁이 신중론과 속도전 사이에서 동력을 잃었던 경우가 지금 상황과 오버랩 된다. 검찰 개혁 논쟁은 '검찰 폐지'라는 급진적 구상으로 옮겨가고 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검찰을 '공소청+중대범죄수사청'으로 재편해 법무부 산하에 두자는 구상을 내놓았다. 검찰에 대한 대통령의 권한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다. 반대로 민형배 의원은 검찰이라는 명칭을 아예 없애고, 중대범죄수사청을 행정안전부 산하에 두자고 맞선다. 정청래 대표의 기조와 맞닿아 있다. 검찰청을 남겨 재편하느냐가 아니다. 이름 자체를 지워버린 다음의 이들의 선택은 단순한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 주도권을 누가 쥘 것인가를 결정짓는 문제로 여겨진다. 임은정 검사장은 지난 29일 대통령이 임명한 핵심 참모들을 '검찰 개혁 5적'이라 지목하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현직 검사장이 권력 핵심부를 '도적'이라 규정한 초유의 사태다. 이른바 '도적'으로 불린 이들을 주요 자리에 앉힌 장본인이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양측의 본색도 일부 드러난 셈이다. 단순한 내부 갈등이 아니라, 권력 내부의 균열이 얼마나 깊은지를 여실히 드러낸 일면으로 보인다. 과거 박정희 정권 말기에도 내부 인사들의 반발이 체제 균열의 전조가 되었음을 소환해낸다. 검찰은 정치권력의 칼이자 동시에 서민을 지켜온 방파제였다. 만약 검찰이 폐지된다면 정치권력과 재력가들은 수사망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높아질 수 있겠지만, 반면 일반 국민은 사법적 약자로 더욱 내몰릴 수 있다. 검찰 폐지는 정치인의 방패를 두껍게 만들지만, 서민의 보호막을 걷어내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 직후 프랑스에서 사법제도의 혼란으로 범죄가 급증했던 사례에서 법적 공백에 가장 약한 계층이 누구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대통령에게 검찰은 억압의 칼이자 동시에 통치의 칼이다. 만약에 이 칼을 버린다면 여당 의원들이 과연 대통령을 두려워할까. 정치적 리더십의 약화를 불러올 수 있다. 권력의 칼을 스스로 무디게 하는 선택을 하기는 쉽지않을 것이다. 국민 앞에서 직접 토론회를 열겠다는 대통령의 구상은 노무현 정부 시절의 '검사와의 대화'를 연상시킨다. 민주당이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토론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을것이다. 국민 여론 악화를 의식한 것으로 추정된다. 슬로바키아 등 극소수 나라가 검찰 해체를 단행했지만 사법 권력의 분산 과정에서 혼란을 겪었다. 이는 곧바로 권력자들의 이익으로 귀결되었지만 권력의 중심은 크게 흔들렸다. 이른바 이재명 대통령과 정청래 민주당 대표의 '명-청 대전'은 표면적으로는 검찰 개혁 논쟁이다. 하지만 권력 향방을 가르는 대결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문제는 다른곳에 있다.국민적 관점이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는 사실이다. 검찰 개혁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이어질 것인가, 아니면 권력자들만의 안전장치로 변질될 것인가. 여권은 국민에게 책임있게 답해야 한다. 국민은 검찰이 권력의 칼날이 아니라 법 앞의 평등이라는 최소한의 안전망을 원하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못하듯 개혁의 이름으로만 권력 다툼을 숨기지 못한다. 이번 논쟁에서 국민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개혁이 아니다.

[김병헌의 체인지] 관세와 안보, 합의의 디테일이 국익을 가른다

관세협상은 숫자의 전쟁처럼 보이지만 문장의 싸움이다. 한 줄의 정의가 가격을 흔들고 하나의 날짜 표기가 선적을 바꾼다. 작은 문구의 모호함은 소송을 부른다. 그래서 합의문이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공동성명은 표지이고 실질적인 내용은 부속서와 서한 교환에 있다. 이번 한미정상 회담의 목표는 단순하다. 우리로서는 합의의 디테일이다. 발효 시점, 예외와 유예의 범위. 품목별 단계, 원산지의 정확한 기준에 불복 절차등 무수히 많다. “신뢰하되, 검증하라."는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말은 외교에서는 안전벨트다. 신뢰는 태도, 검증은 시스템. 둘이 함께 있을 때만 약속이 오래 간다. 회담 상대 모두 “이겼다"고 말하고 싶을 때의 유혹은 모호함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이행의 타임라인이 중요하다. 수치로 약속하고 날짜로 책임을 져야한다. 공동성명문보다 부속서, 서한 등의 문서 텍스트가 필요하다. 시장도 불확실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상황에서는 안보가 관세보다 무겁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주요의제로 떠오른 미군의 배치는 비용과 신호의 조합이다. 상시 주둔은 확실한 억제가 분명하다. 반면 비용을 클 수 밖에 없다. 순환 배치는 유연하지만 위기 시 반응과 지역 수용성이 변수가 된다. 변수도 일종의 모호함이라 우려가 있다. 파생되는 재배치·임무 조정은 부담과 권한의 재설계로 이어진다. 방위비 총액이 전부가 아니다. 방위비의 용도는 유연하게 가져가면 된다. 물론 기준은 국익이다. 같은 돈으로 더 강한 억지력을 사면서 가치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 국익에 매물되어 경제와의 흥정은 오히려 수렁으로 끌려들어갈 공산이 커다는 게 전문가 다수의 지적이다. 관세와 안보를 교환하는 순간 리스크는 폭증한다. 우리의 안보이지만 우리의 기여는 단계화해햐 한다고 본다. 한미간 정보 공유. 후방 지원. 연합훈련. 비전투 영역 등에서 우리가 먼저 가이드 라인을 정해야 한다.주한 미군 때문에 미국에 대해 운명적 태생적 '을의 외교'라고 볼 필요는 없다. 벗어날수 있는 길이 없지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가치외교다. 방위비 증액을 최대한 줄이고도 동맹의 실익을 유지하려면 미국측이 안보의 접점을 넓히라고 주장할수 있다. 말처럼 녹록치는 않을 것이다. 초강대국과의 협상이라 해도 원칙을 담보한 실용외교가 빛을 발할수 있다. 미국이 '가격과 역할'을 말할 때 우리는 '가치와 책임'으로 대응하는게 정답이다. 비용의 언어를 가치의 언어로 전환하면 숫자는 달라질수가 있다. 국내용과 대외용을 갈라치면 비용은 늘어난다. 대통령실과 외교·국방·산업 라인의 문장을 한 줄로 맞춰 투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회담 전에 목표와 레드라인, 상호이익 포인트를 공개하는게 낫다는 게 중론이다. 국민과 국회가 알고 있으면 협상장에서 '국내 제약'은 오히려 힘이 될수 있다. 설명은 변명이 아니다. 레버리지다. 원칙을 먼저 합의하고, 세부를 적고, 이행을 못박고, 평가를 예고하고 차선책도 준비해야한다. 합의가 늦어지면 즉시 가동할 국내 카드가 별도로 있어야 한다. 한시적 안전장치. 세제·금융 완충. 수입 다변화와 재고 전략 등이 될수있다. 준비된 국가는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 정치적 수사는 균형을 잃기 쉽다. 자주를 말하되 동맹을 깎지 말아야 하고 동맹을 말하되 종속처럼 들리게 하면 실패다. 외교의 문장은 야당이 읽어도 이해돼야 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다고 본다. 기업이 읽어도 실행이 떠올라야 한다. 동맹이 읽어도 상대에 대한 존중이 느껴져야 한다. 언어는 무기지만 협상의 실력은 정확한 조준이다. 국내의 규율도 외교적인 신용이다. 재정 건전성 로드맵을 내고 규제 총량의 상한도 걸어야한다. 언제 어디서 얼마를 줄이고, 무엇을 어떻게 풀지 날짜와 방법과 숫자로 제시해야 외교 성과가 시장에 흡수된다. 관세의 문장을 부속서로 다듬는 집요함. 방위비 항목을 성과 중심으로 돌리는 실용. 재배치와 임무의 단계를 명문화하는 신중함. 세 가지를 충족한다면 회담 사진은 역사의 기록이 되고 합의 문장은 우리의 자산이 된다. 정상회담장은 늘 비슷하다. 레드카펫. 촘촘한 시계. 쌍방간의 공손한 미소... 그러나 진짜 승부는 몇 분 사이에 결정난다. 핵심 문장을 바꿀 몇 분. 우리의 경제와 안보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숫자를 넣을 불과 몇 초에 절차를 합의할 한두 마디면 끝난다. 부속서의 항목명. 서한 교환의 문구. 이행 타임라인의 날짜.박수보다 서명이 대한민국 앞날을 지킨다. “말은 날아가고, 글은 남는다"는 라틴 격언이 마지막 체크리스트다. 여기서 국익을 우선한 새로운 대미 실용 외교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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