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이미지

강현창 기자

안녕하세요 에너지경제 신문 강현창 기자 입니다.
  • 자본시장부
  • khc@ekn.kr

전체기사

中 딥시크가 美 규제 피해 ‘삼성전자 HBM’을 활용한 비밀 경로는?

중국 화웨이가 미국의 수출 통제를 피해 삼성전자의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확보해온 경로와 방식이 해외 반도체 분석기관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공급망의 핵심은 화웨이가 미국 제재를 우회하는 정교한 구조를 설계하고, 삼성전자는 직접 거래를 피하면서도 일정 수준의 협조를 통해 출고를 가능케 했다는 분석이다. 최근까지도 고성능 반도체에 대한 수출 통제는 미국과 중국 간 지정학적 대결의 중심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2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전문기관 세미애널리시스(SemiAnalysis)는 최근 보고서에서 삼성전자의 HBM2E 제품이 화웨이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우회 경로를 제시했다. 분석에 따르면 삼성은 자사의 중화권 유통 채널인 코아시아일렉트로닉스(CoAsia Electronics)를 통해 HBM2E를 공급하고 있으며, 이 물량은 대만의 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파라디테크놀로지(Faraday Technology)를 거쳐 패키징 전문 업체 실리콘프라임인터내셔널(SPIL·Siliconware Precision Industries Ltd.)에서 재가공된다. 이후 이른바 '패키지 형태'로 중국으로 수출된 뒤, 현지에서 HBM만 분리해 사용하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기술적 장치는 저성능 16nm급 로직 다이와의 약한 결합이다. 로직 다이는 연산 기능이 거의 없는 반도체로, 규제 회피를 위한 형식적 조합으로 해석된다. SPIL은 이 HBM과 로직 다이를 결합하면서도 '저온 솔더링' 방식으로 부착해 중국 내에서 쉽게 분리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저온 솔더링은 낮은 온도에서 접합이 분해되는 기술로, 이러한 설계를 통해 중국은 HBM을 추출해 자체 AI 칩에 재활용하고 있다. HBM의 최종 사용처는 화웨이의 인공지능(AI) 가속기 칩 'Ascend 910C'다. 이 칩은 대규모 연산 시스템 'CloudMatrix 384'의 핵심 부품으로 쓰이며, 총 384개의 Ascend 칩이 병렬로 연결된 구조다. 시스템 전체는 49.2TB의 HBM 용량과 1229TB/s의 대역폭을 갖춰, 총량 기준으로는 엔비디아의 최신 AI 서버인 'GB200 NVL72'를 능가한다. 이 CloudMatrix 384 시스템은 최근 공개된 중국의 초거대 언어모델 '딥시크(DeepSeek)'의 학습 인프라로 사용됐다. 딥시크는 2조 개 이상의 파라미터(parameter)를 가진 모델로, GPT-4에 근접한 성능을 보이며 전 세계 AI 업계에 충격을 줬다. 이 모델의 성공은 HBM 확보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화웨이의 우회 전략의 효과를 뚜렷이 보여준다. 현재 미국은 중국으로 향하는 HBM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중이다. 미국 수출관리규정(EAR)과 그 하위 조항인 외국직접산물규칙(FDPR)이 규제를 위해 작동한다. EAR은 본래 미국산 물품의 수출을 통제하는 규정이지만, 두 가지 조건에서 비(非)미국산 제품까지 규제할 수 있다. 첫째는 최소 함유 규칙(De minimis rule)'으로, 해당 제품에 미국 기술이 일정 비율 이상 포함될 경우이고, 둘째는 'FDPR'로, 미국 기술이나 미국 장비로 만든 제품은 미국의 통제를 받는다는 원칙이다. 삼성의 HBM은 케이던스·시놉시스 등 미국산 EDA 소프트웨어와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램리서치 등 미국산 반도체 장비를 통해 생산된다고 알려졌다. 따라서 FDPR 규정상 미국의 사전 허가 없이는 제재 대상인 화웨이로의 수출이 금지된다. 미 상무부는 2020년부터 화웨이를 FDPR의 구제 대상으로 지정하고, 화웨이가 '거래 당사자'로 포함되는 순간 해당 제품은 무조건 BIS(미국 산업안보국) 승인 없이는 공급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이후 2022~2024년에 걸친 고성능 AI 반도체 규제 강화 조치로 HBM 자체가 규제 대상이 되었고, 2024년 12월에는 미국 장비로 만든 고사양 HBM의 중국 수출을 사실상 전면 금지하는 규정이 추가됐다. 이에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는 규제를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중국 AI 생태계의 핵심 부품을 공급하는 구조가 필요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화웨이에 제품을 납품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삼성전자의 HBM이 중국에 전달되는 구조가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SK하이닉스의 HBM 대부분이 엔비디아·AMD 등 미국 기업에 이미 배정된 상황에서, 삼성만이 화웨이의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다는 점도 이런 구조가 만들어지는 이유로 분석된다. 실제로 CoAsia의 실적은 미국의 통상 압력 이후 급증했다. 대만 증권거래소 공시에 따르면, CoAsia의 매출은 2024년 12월 2985억대만달러에서 2025년 1월 4871억대만달러로 63% 급증했다. 2월에도 4794억대만달러를 기록해 고점을 유지하고 있다. 세미애널리시스는 이 급등이 수출 통제 직후에 발생한 점에 주목하며, 우회 공급망을 통한 HBM 출고와 연관됐다고 분석했다. 이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행정부가 반도체 수출 통제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행정부 당시 화웨이·SMIC 등을 '엔티티 리스트'에 올려 대중국 반도체 제재를 본격화한 장본인으로, 2기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중국의 AI 역량을 미국 기술로 키우게 둘 수 없다"는 입장을 반복해왔다. 이번 화웨이·삼성 간 우회 공급망 사례는 미국 내에서 “FDPR 규정의 구멍"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트럼프 행정부가 패키징 제품까지 규제 범위를 확대하거나, 한국·대만 등 동맹국 기업에 대한 사전허가 요건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이러한 회색지대 공급망은 향후 미국의 규제 확대로 인해 직접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며 “향후 미국이 패키징 제품까지 규제 범위를 확장할 경우, 지금의 공급망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강현창 기자 khc@ekn.kr

재벌 지배구조에 메스를 든 이재명…재계 ‘초긴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꼽히는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기업의 지배구조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공약을 제시하면서 재계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이 전 대표는 최근 총수 일가의 자사주 방어막까지 손대겠다는 공약도 선보인 상태다. 상법 개정에 이어 자사주 소각 의무화까지 제시한 이 전 대표의 행보에 대해, 대기업들은 '지배구조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23일 정치권 등에 따르면 지난 21일 이 전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주식시장 활성화 정책'을 발표하며, △상법 개정 재추진 △자사주 원칙적 소각 의무화 △분할상장 시 일반주주 신주 우선배정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등 기존보다 한층 강화된 기업 지배구조 개혁 공약을 꺼냈다. 재계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다. 자사주는 원칙적으로 의결권이 없지만, 이를 제3자에게 양도하면 의결권이 부활한다. 이 때문에 자사주는 총수일가가 필요할 때 '우호지분'으로 전환해 경영권을 지키는 방패 역할을 해왔다. 또 자사주는 인수합병(M&A), 교환사채(EB) 발행, 임직원 성과급 지급 등 다양한 전략적 도구로 쓰이며 기업의 유동성과 사업 확장에도 실질적인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자사주를 통한 경영권 방어는 결국, 모든 주주의 것인 회사 자산으로 특정 주주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구조적 모순이라는 지적도 있다. 또 자사주 소각은 경영권 방어뿐 아니라 자금 조달과 사업 전개의 유연성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현장의 부담이 크다는 것이 재계의 입장이다. 특히 총수 일가의 지분율이 낮은 재벌 구조에서 자사주는 유사시 '비상용 지분'으로 기능해왔다. 자사주를 일정 수량 보유하고 있다가, 적대적 M&A 위협 시 이를 우호 세력에 넘기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례는 자사주가 총수 지배력 강화에 활용된 대표적 사례다. 2015년 7월 합병 승인을 위한 주주총회를 앞두고, 일부 주주들의 반대로 합병안 통과가 불투명해지자 삼성물산은 보유하고 있던 자사주 5.76% 전량을 우호 세력인 KCC에 매각했다. KCC는 이 지분을 바탕으로 합병 찬성표를 행사했고, 이는 근소한 차이로 합병안이 가결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015년 SK C&C와 SK㈜의 합병 과정에서도 자사주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합병 전 SK㈜는 상당량의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합병 과정에서 의결권 없는 이 자사주에도 합병 신주(통합 SK㈜ 주식)가 배정되었다. 이렇게 배정된 신주는 합병 후 통합 SK㈜의 자사주가 되었다. 이 방식은 회사의 자금으로 매입한 자사주를 활용해 합병 법인의 자사주 비율을 높이고, 결과적으로 총수 일가의 지배력을 간접적으로 강화하는 효과를 낸다. 통합 SK㈜는 이후 추가 매입을 통해 25%에 달하는 막대한 자사주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이는 잠재적으로 경영권 방어 등에 활용될 수 있다. 2022년에는 KT와 현대자동차그룹이 자사주를 교환하여 상호 우호 지분을 확보하는 사례도 있었다. 양사는 약 75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맞바꾸며 서로의 주요 주주가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모빌리티 사업 협력을 내세웠지만, 소유분산기업인 KT에게는 경영권 안정화 수단이, 지배구조 개편 과제가 있는 현대차그룹에게는 우호 지분 확보라는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다 준 거래로 평가된다. 이 전 대표는 이러한 자사주 구조가 한국 자본시장의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초래하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기업의 순이익 대비 배당성향이 낮고, 자사주가 주가 부양용으로만 쓰이거나 오히려 총수의 지배력 유지에 활용되면 외국인 투자자와 기관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어 상법 개정은 그동안 이 전 대표가 꾸준히 당론으로 내세운 공약으로 재계도 이를 충분히 예상했던 바지만 부담은 여전하다. 현행 상법은 이사가 '회사'에 대해만 충실의무를 지지만, 이를 '회사 및 주주 전체'로 확대하는 방식이다. 이 조항이 도입되면 경영진이 다수 주주의 이익을 무시한 채 최대주주의 지시에만 따를 경우, 소액주주들이 이사를 상대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실제로 2020년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산업은행과의 조건부 계약으로 인해 기존 주주의 가치는 희석되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당시 일부 소액주주는 이사회가 대주주와 정책금융기관의 이해관계에 편향된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했지만, 현행법상 이사들의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려웠다. 이 전 대표는 집중투표제, 감사위원 분리선출, 전자투표 의무화 등 주주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장치를 확대하겠다는 입장을 재차 밝혔다. 이는 이사회 구성을 소수 대주주 중심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취지로, 특히 외국인 투자자나 기관의 입김이 상대적으로 약한 한국 시장에서 주주권 강화의 일환으로 주목된다. 이 밖에도 자회사 분할상장 시 모회사 일반주주 보호를 위한 신주 우선배정 제도 도입, 자회사 경영진의 위법행위에 대해 모회사 주주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등은 모두 상장사 주주구조 내 '소수의견'에 제도적 권한을 부여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다만 이러한 공약들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국회의 입법 절차를 거쳐야 한다. 현재 민주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있으나, 재계와 보수 진영은 상법 개정과 자사주 소각에 대해 “기업 자율성 침해"라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어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이 전 대표는 공약 발표 이후 “자본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 결국 기업과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며 “이번에는 반드시 개혁을 완수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 재계 관계자는 “개혁의 방향이 옳고 그르냐는 논외로 하더라도, 개혁의 강도 자체가 상당히 부담이 된다는 것은 재계 모두가 걱정하는 부분"이라며 “시장과 충분한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강현창 기자 khc@ekn.kr

SK하이닉스, 차세대 CXL 메모리 인증…HBM과 ‘찰떡궁합’

SK하이닉스가 차세대 메모리 시장 선점을 위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섰다. CXL(Compute Express Link) 2.0 기반 DDR5 메모리 모듈에 대해 고객 인증을 완료하며, 제품의 성능과 안정성을 공식적으로 입증했다. SK하이닉스는 23일 자사의 'CMM(CXL Memory Module)-DDR5 96GB' 제품의 고객 인증을 완료했다고 밝혔다. CXL은 CPU(중앙처리장치)와 GPU(그래픽처리장치), 메모리 등 컴퓨팅 자원을 고속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인터페이스 기술이다. 기존 방식보다 훨씬 빠르게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여러 장치 간 자원을 공유하고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메모리 풀링(Pooling)' 기능도 지원한다. 쉽게 말해, 서버 안의 메모리를 마치 “공유 자원"처럼 여러 장치가 필요에 따라 나눠 쓸 수 있도록 해주는 기술이다. 이로 인해 기존보다 더 적은 장비로도 더 많은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어, 전력과 공간, 비용을 절감하는 데 효과적이다. 최근 인공지능(AI) 칩의 핵심 부품으로 부상한 HBM(고대역폭메모리)과 '궁합'이 맞는 메모리로도 평가된다. HBM이 연산 속도를 책임진다면, CXL은 그 연산이 끊기지 않도록 데이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저장소 역할을 한다. 이번에 인증을 완료한 DDR5 96GB 모듈은 기존 DDR5 대비 용량은 50%, 데이터 전송 대역폭은 30% 향상돼 초당 36GB의 데이터 처리 성능을 제공한다. SK하이닉스는 이와 함께, 128GB 대용량 모듈 제품에 대해서도 고객 인증을 진행 중이다. 해당 제품은 10나노급 공정을 기반으로 제작돼 전력 효율성이 한층 강화됐다. SK하이닉스는 공식적으로 고객사를 밝히지 않았지만, 업계 분석에 따르면 이 제품을 가장 먼저 도입할 가능성이 높은 곳은 글로벌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업체들(AWS, Google Cloud, Microsoft Azure, Meta 등)이다. 이들 기업은 대규모 인공지능 모델을 학습하고 운영하기 위한 서버 인프라를 갖추고 있으며, 메모리 용량과 처리 속도에 민감하다. 특히 CXL 컨소시엄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기업들이기도 해 기술적 수용성이 높다. 서버 제조업체(델, HP, 레노버 등)나 하이퍼스케일러 전용 서버를 공급하는 QCT, Supermicro 등의 ODM 업체들도 주요 고객군으로 분석된다. 이들은 CXL 2.0을 지원하는 최신 인텔 제온6, AMD 5세대 EPYC 서버 플랫폼을 기반으로 CXL 메모리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Yole Group에 따르면 CXL 시장은 2028년까지 150억달러(약 20조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며, 이 중 CXL DRAM 모듈이 120억달러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SK하이닉스는 이번 고객 인증을 계기로, 2024년 하반기부터 2025년 초까지 본격적인 양산 체제를 구축해 시장 공략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강현창 기자 khc@ekn.kr

한미반도체는 어떻게 ‘슈퍼 을’이 됐나

한미반도체는 2017년 세계 최초로 고대역폭메모리(HBM) 공정용 장비인 TC본더(Thermal Compression Bonder)를 상용화한 이후,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해왔다. 특히 SK하이닉스와 긴밀한 협업 구조를 통해, 공급사임에도 고객사의 후공정 생산공정에 깊이 관여하는 '슈퍼 을'로 불려왔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이러한 구도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SK하이닉스가 한화세미텍과 신규 TC본더 계약을 체결하며 공급망 다변화에 나서자, 한미반도체가 대응 차원에서 가격 인상과 엔지니어 철수를 통보한 것이다. SK하이닉스는 급히 한미반도체 달래기에 나섰다고 전해지지만 산업 구조의 변화는 피할 수 없다는 지적도 많다. 한미반도체가 '슈퍼 을'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단순한 기술력 이상의 구조적 요인이 작용했다. 특히 SK하이닉스와의 거래 구조는 일반적인 벤더-클라이언트 관계와 크게 달랐다. SK하이닉스가 주요하게 생산하는 HBM은 고성능 AI 연산용 반도체다. 열과 전기적 연결을 모두 정밀하게 제어해야 하는 고난이도 공정이 요구된다. 여기에 쓰이는 TC본더는 기존의 와이어 본딩(Wire Bonding) 방식과는 달리, 다이(die)와 인터포저(interposer)를 고온·고압 조건에서 정밀하게 정렬 압착하는 장비다. 이 때문에 초기부터 장비 개발과 공정 세팅, 양산 품질 확보까지 고객사와의 긴밀한 협업이 필수적이었다. 한미반도체는 SK하이닉스와 2016~2017년 사이 공동 개발 계약을 맺고 HBM용 TC본더를 시장에 처음 도입했으며, 이후 2년 이상 SK하이닉스 후공정 Fab 내에 엔지니어를 상주시켜 실시간 공정 지원과 품질 개선 작업을 이어왔다. 이 과정에서 한미반도체는 고객사의 사양 변경 요구를 수시로 반영하고, 장비 성능을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조정하는 등 일반적인 공급사 범위를 넘어서는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한미반도체가 개발한 TC본더는 경쟁사 제품에 비해 공정 정밀도가 높고, 라미네이션 오차가 ±3μm 이내로 알려져 있다. 이는 고층 구조의 HBM에서 발생할 수 있는 누적 오차를 줄여 수율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가 2021년 HBM2E 양산을 세계 최초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한미반도체의 TC본더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다. 그 결과 SK하이닉스는 2022년부터 HBM3, HBM3E로 생산 라인을 확장하면서도 TC본더는 계속 한미반도체 제품 중심으로 운용해 왔다. 현재도 SK하이닉스는 HBM 공정에서 대부분 한미 TC본더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공정 연속성 차원에서 즉시 대체 가능한 기술적 대안이 제한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실제 수치로도 이 구조는 드러난다. 한미반도체의 2024년 TC본더 관련 매출은 전체 매출 5589억원 중 약 85%를 차지했으며, SK하이닉스향 공급 비중은 약 60%에 달하는 것으로 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영업이익은 2554억 원으로 전년 대비 6배 이상 증가했고, 영업이익률은 45.7%에 달했다. 한미반도체는 고객사 전용의 맞춤형 장비 개발과 품질 안정화 작업을 수년간 단독으로 수행하면서 기술적 진입장벽을 세우는 동시에, 고객사의 공정운영에까지 실질적 영향을 미치는 구조를 형성했다. 업계 관계자는 “공급사가 Fab 운영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며 “이는 전형적인 '슈퍼 을' 구조"라고 평가했다. 반면, 다른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특정 장비사에 대한 의존을 지양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마이크론은 HBM3E 라인 구축 과정에서 한미반도체를 포함해 ASMPT(싱가포르), K&S(미국) 등 최소 3개 업체와 동시 검증을 진행 중이다. 이는 특정 벤더에 기술 조건을 좌우당하지 않고, 라인별·세대별로 최적 장비를 선택하려는 전략이다. TSMC는 BESI, ASMPT, K&S 등 복수 장비사와 협업해 패키징 공정 장비를 다원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SoIC(3D 패키징) 공정에서는 장비 개발 단계부터 복수 업체에 기술을 공유하고, 병렬 테스트 후 성능이 가장 우수한 장비를 도입하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전자 역시 자회사 세메스를 비롯해 일본 신카와, 토레이 등과 거래하며 멀티 벤더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기술 독립성과 가격 협상력 확보를 위해 독점 구조보다는 다원화된 공급망 전략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SK하이닉스는 2024년 말부터 ASMPT, 한화세미텍 등 복수 벤더로부터 TC본더 공급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이후 한화세미텍은 2025년 초 SK하이닉스로부터 약 420억원 규모의 TC본더 수주 계약을 체결하며 본격적으로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에 대해 한미반도체는 공급 조건 조정을 요구하며, 기존 장비 단가를 인상하고 공정에 상주하던 엔지니어를 철수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SK하이닉스는 고위급 임원이 직접 한미반도체 측을 만나협의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업계는 중장기적으로 SK하이닉스가 멀티 벤더 체제로 전환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한미반도체도 고객다변화에 나서고 있는 만큰 고객사의 공급다변화를 비판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한미반도체의 차세대 모델은 2025년 중으로 마이크론 등 해외 업체에 공급될 것으로 알려졌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미반도체는 여전히 TC본더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HBM4 등 차세대 패키징 기술에서도 강점을 유지 중"이라며 “단일 고객 기반의 '슈퍼 을' 지위를 지속하기는 산업의 규모가 커지기 때문에 힘들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분야의 최고 '갑' 엔비디아도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 등으로 공급을 다변화하고 삼성전자도 이에 도전하고 있다"며 “기술 경쟁력은 인정받되, 공급 구조는 보다 유연하게 대응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강현창 기자 khc@ekn.kr

“사기는 살인”…10년 넘게 금융범죄 추적한 변호사의 ‘일갈’

“사기는 살인이다. 사기 피해자들은 가정이 파탄나고, 자살한다." 이민석 변호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는 지금도 수만, 수십만 명의 피해자가 고통받고 있는 대규모 금융사기 사건들 사이에서, 피해자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모아 사회에 외치는 '대변인'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그가 활동하는 “금융피해자연대"는 피해자만 1만 명 이상, 피해액이 1조원을 넘는 사건들만 모아 구성한 단체다. 피해자들의 연대는 단순한 소송단을 넘어 “사회적 연대체"의 성격을 띠고 대규모 금융범죄에 맞서 활동 중이다. 이 변호사는 20일 에너지경제와 만나 인터뷰를 통해 “키코, MBI, KOK, IDS홀딩스, 밸류인베스트코리아, ICC-FVP 등 수많은 사기 사건 피해자들이 금융피해자연대에 속해 투쟁 중"이라며 “이들 사건은 피해 규모만 30조원을 넘는다"고 밝혔다. 그는 금융사기 사건들에서 단순한 개인의 탐욕이 아닌 “구조적 배경"을 지적한다. “천문학적인 피해를 낳는 금융사기에는 반드시 비호세력이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규모의 피해가 반복될 수 있었겠나?"라는 그의 말은 지금까지 이어져온 수사와 재판, 제도의 빈틈을 지적하는 발언이다. 실제로 그는 IDS홀딩스 사건을 예로 들며 정치권과 사법기관, 수사기관이 얽힌 구조를 비판했다. IDS홀딩스는 FX마진거래 고수익·원금 보장을 내세워 약 1만2000명에게서 1조1000억원 가량을 편취한 대규모 폰지 사기다. 그는 “IDS홀딩스 창립 행사에 변웅전 전 자유민주연합 대표, 경대수 전 새누리당 의원이 동영상 축사를 했고, 이우현 의원은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아 유죄가 확정됐다"며 “서울경찰청 소속 경찰이 IDS홀딩스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징역 5년을 선고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단순한 사기가 아니라 정관계의 그림자와 연결된 복합 범죄라는 것이다. 이민석 변호사는 밸류인베스트코리아 사건도 지적했다. 밸류인베스트코리아는 무인가 상태로 크라우드펀딩 방식 벤처 투자를 빙자해 약 3만 명에게 7000억원 이상을 불법 유치했다. 그는 “밸류인베스트코리아 사무실에서 유시민, 도종환, 이재정, 변양균 등이 강연을 했고,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은 대표 이철에게서 6억원대 불법정치자금을 받아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고 밝혔다. MBI의 경우엔 인천경찰청 경감의 부인이 근처 사무실을 차려 다단계 모집을 했다. MBI는 말레이시아 기반 국제 금융 다단계 사기로, 가짜 광고권과 GRC 토큰 투자를 미끼로 국내에서만 약 10만명에게 5조원대 피해를 입혔다. KOK도 비호세력의 의혹이 짙다. KOK는 K-콘텐츠 플랫폼 투자를 빙자한 암호화폐(KOK 토큰) 다단계 폰지 사기로, 전 세계 180만명 이상(추산)에게 약 4조원의 피해를 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변호사는 KOK 행사에 국회 상임위원장 자격으로 노웅래 전 의원이 축사를 한 사실도 언급했다. 그는 “이러한 비호세력은 수사의 외압이 되기도 하고, 그 자체로 사법시스템을 부패하게 만든다"고 경고했다. 그의 주장은 통계로도 뒷받침된다. 경찰청에 따르면 2023년 한 해에만 사기 범죄는 34만7901건 발생했고 피해액은 30조원에 달했다. 그는 “정부에 범죄 척결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일갈했다. 사기 수법은 해마다 진화해왔다. 그는 조희팔의 상품 다단계 사기에서 시작해, IDS홀딩스와 VIK의 금융 다단계, 라임 옵티머스의 사모펀드형, 그리고 KOK나 시더스그룹 같은 코인형 사기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 변호사는 “최근에는 코인이나 토큰을 이용한 금융 다단계 사기가 폭증하고 있다"며 “KOK는 실체 없는 K-콘텐츠 사업을 빙자해 KOK 토큰을 배포하며 사기를 쳤고, 시더스그룹은 해피캐시, 쇼핑캐시를 이용한 유사한 수법을 썼다"고 설명했다. 그는 MBI의 구체적인 사기 방식을 언급하며, “엠페이스 광고권을 1구좌당 650만원에 구매하면 1년에 두 번 1.5배씩 증액된다며, 허구의 광고권과 GRC라는 토큰을 연계해 사기를 쳤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사기 방식은 이름만 바꾸어 계속 반복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런 범죄를 가능케 한 법과 제도의 문제는 무엇일까. 그는 '무기력한 수사 시스템'과 '솜방망이 처벌'을 동시에 꼬집었다. 이 변호사는 “피해자가 고소를 해도 검찰은 '증거를 가져오라'는 식이고, 고소장이 접수되기 전엔 수사조차 안 한다"며 “수사는커녕 범죄예방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구체적인 예도 제시됐다. 그는 “90만 명 피해, 4조원대 사기 사건인 KOK 사건이 서울중앙지검에서 울산지검으로 갑작스럽게 이송된 것 자체가 축소수사 의도"라고 주장했다. 또 “IDS홀딩스 김성훈 대표가 1조원대 사기로 재판을 받던 중에도 공범과 검사실에서 27억원의 범죄수익 은닉을 공모했음에도 검찰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며 “법원과 검찰이 사기의 공범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토로했다. 그의 해법은 명확하다. 첫째, 전국 단위의 검경합동 통합수사본부 설치. 둘째, 범죄단체조직죄를 적극 적용해 조직 전체를 처벌할 수 있는 기반 마련. 셋째, 범죄수익 환수 제도의 강화다. 그는 “범죄수익금이 공범이나 정관계 비호세력에게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며 "기소된 자의 재산은 모두 몰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범죄단체조직죄에 대해 “사기조직을 범죄단체로 보아야 상층부터 말단까지 일괄 처벌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조직원 중 일부만 기소되면, 나머지는 여전히 다단계 사기업체 이름을 바꿔가며 범행을 이어간다"고 지적했다. 양형기준 개혁도 절실하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피해자 50명에게 50억원을 사기쳐도, 한 사람에게 50억원을 사기친 사람보다 낮은 처벌을 받을 수 있다"며 “미국처럼 총 피해액 기준으로 형량을 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병과주의'와 '가중주의'의 차이를 설명하며 “권도형이 한국행을 희망한 건 솜방망이 처벌 때문"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는 “IDS홀딩스 김성훈은 1조원을 사기치고 징역 15년, 밸류인베스트코리아 이철은 징역 14년 6월에 불과했다. 반면 미국의 메이도프는 징역 150년을 선고받았다"고 했다. 이 변호사는 법원, 정치권, 언론을 향해서도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사법부는 사기범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며 “사기를 당하면 가정은 파탄나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이른다. 사기는 살인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법원에서는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하고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판결이 나온다"며 “IDS홀딩스 사건으로 50여명이 넘는 자살자가 나온 것을 법원은 알고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언론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는 “언론은 피해자들이 보고 안심하고 투자하게 만들 정도로 사기를 홍보해줬다"며 IDS홀딩스나 KOK 사례를 언급했다. 이 변호사는 “공영방송에서 문제를 지적한 지 한 달 만에 다른 언론은 품질대상 상패를 안겨주기도 했다"고 말해 언론의 무책임을 강조했다. 그는 “사기업체를 홍보하는 언론보도 때문에 피해자들이 안심하고 투자하다가 피해를 입었다"며 “기자 개인이 쓴 기사가 삭제되는 일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끝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회가 많이 썩었다고 하더라도 굴러가는 이유가 있다. 소수지만 신념을 가지고 투쟁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작은 물결이 큰 물결이 되고, 결국 사회를 바꾸는 건 국민이다." 강현창 기자 khc@ekn.kr

급히 성사된 한·미 통상회담, 美 보호주의 변화 오나

한국과 미국 간 고위급 '2+2 통상협의'가 다음 주 워싱턴에서 열린다. 특히 이번 협의가 미국 측 제안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한국 산업계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지원법(CHIPS Act) 등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에 대한 현실적 개선 신호가 나올지 주목하고 있다. 20일 산업통상자원부는 안덕근 장관이 오는 23일 출국해 워싱턴에서 최상목 경제부총리와 함께 미국 측과 통상 현안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미국 측에서는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과 제임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참석한다. 협의 의제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업계는 미국 내 공장을 건설 중인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등 주요 기업들의 투자 안정성 확보를 핵심 과제로 꼽는다. 반도체 보조금 지원 기준의 현실화, IRA 전기차 세액공제 요건의 우방국 배려 등이 산업계의 주요 관심사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정부가 공급망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명확히 하되, 투자 기업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제도적 정비를 요구해 주길 바란다"며 “이번 협의가 실질적인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강현창 기자 khc@ekn.kr

[지배구조의 지렛대] ⑤ 상법 개정, 균형 찾는 ‘무게추’ 될까

한화에너지, 삼성에버랜드, 현대글로비스, SK C&C. 이들 기업은 각기 다른 그룹에 속해 있지만, 공통점이 있다. 총수 일가의 지배력 강화나 승계 과정에서 '지렛대' 역할을 해왔다는 점이다. 내부거래 집중, 전환사채(CB) 발행, 비상장 계열사 활용 등 방식은 달랐지만, 결과적으로는 소수의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도록 구조를 설계해왔다. 이런 구조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공정하지 않은 승계, 소수주주의 이익 침해, 시장의 신뢰 저하 등의 문제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불확실한 경영 환경 속에서 외부 위협에 대비하고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이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최근 국회에서 논의를 거듭하고 있는 상법 개정안은 이처럼 기울어진 지렛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제도적 시도로 읽힌다. 삼성에버랜드는 1996년 주당 7700원의 CB를 발행했다. 당시 장외시장에서는 8만5000원 수준에서 거래되던 주식이었다. 이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총수 일가가 인수하면서, 이 회장은 단숨에 최대주주(25.6%)로 올라섰다. 이후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구조는 이른바 '헐값 승계' 논란을 촉발했다. 현대글로비스도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100% 지분으로 설립한 후, 그룹 물류를 집중 수주하면서 급성장했다. 설립 초기 내부거래 비중은 80%를 넘었고, 2016년에도 67.4%에 달했다. 초기 투자금은 약 30억원으로 알려졌지만, 수년 만에 수천억원의 자산 가치로 불어났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후 정 회장은 2015년과 2022년에 걸쳐 지분을 매각해 내부거래 규제를 피했다. SK C&C는 비상장사로서 높은 내부거래 비중을 기록해왔다. 2010~2011년 기준 60%를 넘었고, 공정위는 2012년 부당지원 혐의로 347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후 SK㈜와의 합병을 통해 최태원 회장의 지배구조는 더욱 단단해졌고, 당시 활용된 워커힐호텔 주식 맞교환 방식은 법원에서 배임 판결을 받기도 했다. 단 SK C&C 사례는 한편으로는 '불공정한 합병'의 대표적 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의 '생존 전략'으로 해석된다. 2003년 SK글로벌 분식회계 사태 이후 최태원 회장이 구속되며 그룹은 경영 공백 위기를 맞았고, 이 틈을 타 외국계 사모펀드 소버린이 지분을 대거 매입해 경영권을 노렸다. SK는 이사회를 통해 방어에 성공했지만, 이를 위한 수단으로 SK C&C를 활용했고, 워커힐호텔 주식 맞교환과 같은 구조는 법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판단을 받았다. SK 입장에서는 '위기 속 지배력 방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소수주주의 이익이 침해됐다는 점에서 제도적 한계를 드러낸 사례다. 이러한 사례들은 상법이 지배구조 내에서 소수주주 보호 기능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상법 제382조의3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로 규정하고 있어, 주주 개별의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이를 보호할 근거가 부족했다. 실제로 삼성물산 합병 논란 당시 이 조항은 “회사를 위한 결정이었다"는 면책 논리로 작동했다. 상법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해, 소수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결정에 대해 책임을 묻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비상장 계열사를 활용한 내부거래나, 비정상적인 합병 비율 결정 등에 대한 억제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평가다. 또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논의도 진척되고 있다. 이는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임원을 상대로 직접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해, 복잡한 지배구조에서 실질적인 감시가 가능하도록 하는 제도다. SK나 한화처럼 '옥상옥' 구조가 존재하는 그룹에서 특히 실효성 있는 견제 수단으로 평가된다. 감사위원 분리선출 제도, 집중투표제 의무화 역시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과 독립성을 높이는 장치로 논의되고 있다. 재계는 이러한 개정안들이 도입되면 소송이 남발되고, 기업의 경영 판단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경영진이 소수의 주주나 외국계 자본의 위협에 흔들릴 수 있다"며 “합리적 판단의 위축은 결과적으로 한국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우려는 과장일 수도 있지만, 무시해서도 안 된다. 제도의 취지는 균형에 있다. 경영 판단의 자율성과 시장의 공정성이 충돌할 때, 법은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견제는 필요하지만, 지나치면 독이 된다. 지배구조는 기업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인프라이자, 시장의 신뢰를 결정짓는 요소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렛대는 한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로 인해 시장의 불신은 커지고, 기업도 그 주체로 의심받았다. 개별 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넘어, 현행 상법과 제도의 허점을 악용한 구조적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는 게 시장 참여자들의 불만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되는 후진적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상법 개정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지난 17일 국회는 상법 개정안의 재표결을 시도했지만 국민의힘의 이탈로 재의결 정족수 200석을 넘지 못해 부결됐다. 민주당은 전략적으로 삭제했던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집중투표제'를 모두 포함해 개정안을 재발의 할 방침이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상법 개정은 지렛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공정하게 설계하자는 것"이라며 “이제는 '총수를 위한 지렛대'가 아닌, '모두를 위한 지렛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강현창 기자 khc@ekn.kr

SK-한화 손잡자 한미 반발…독점에서 경쟁으로 ‘진화’

인공지능(AI) 시대 개막과 함께 고대역폭 메모리(HBM)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HBM 생산의 핵심 장비인 TC 본더(열압착 본더) 시장도 요동치고 있다. HBM 시장 선두주자인 SK하이닉스가 공급망을 다변화하자, 8년간 파트너십을 이어온 한미반도체의 반발이 불만이 관측되는 중이다. 이에 대해 업계에서는 시장의 성장에 따른 공급과 고객의 다변화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설명을 내놓고있다. 17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지난 2017년부터 한미반도체와 HBM용 TC 본더를 공동 개발하며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 기간 동안 한미반도체는 SK하이닉스에 TC 본더를 사실상 독점 공급하며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매출 5589억원, 영업이익률 45.6%)을 기록하는 등 HBM 특수를 누렸다. SK하이닉스 역시 한미반도체의 장비를 기반으로 HBM 시장 1위(2024년 점유율 65% 추정) 자리를 공고히 했다. 이러한 구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지난 3월, SK하이닉스가 한화그룹의 한화세미텍(구 한화정밀기계)과 총 420억원 규모의 TC 본더 공급 계약을 두 차례에 걸쳐 체결하면서부터다.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특정 공급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 공급망 리스크를 관리하고, 차세대 HBM 생산에 필요한 hMR(Heated Mass Reflow) 공정 대응 등 기술적 요구사항 충족, 그리고 가격 협상력 강화 등을 위해 공급망 다변화에 나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 핵심 장비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것은 일반적인 리스크 관리 전략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SK하이닉스의 선택은 시장의 성장을 상징하는 이슈였다. 하지만 한미반도체의 입장은 달랐다. SK하이닉스의 결정 이후, 한미반도체의 이례적인 조치들이 이어지는 중이다. 한미반도체는 SK하이닉스 이천 공장에 상주하며 자사 TC 본더 장비(약 100여 대 추정) 유지보수를 지원하던 고객 서비스(CS) 엔지니어 수십 명을 본사로 복귀시킨 것으로 알려됐다. 반도체 장비 업계에서 고객사 생산 라인의 CS 인력 철수는 매우 드문 사례로 받아들여진다. 동시에 한미반도체는 SK하이닉스에 TC 본더 장비 가격을 기존 대비 25~28% 인상하겠다고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한미반도체가 SK하이닉스에 TC 본더 가격을 인상한 첫 사례로 알려졌다. 가격 인상 배경으로는 원자재 가격 상승 및 환율 변동 등 외부 요인도 언급되지만, SK하이닉스의 한화세미텍 계약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한미반도체가 한화세미텍을 상대로 TC 본더 관련 특허 침해 소송을 진행 중인 상황에서 SK하이닉스가 한화세미텍과 계약한 점이 양사 관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게 제기된다. AI 열풍에 힘입어 HBM 시장은 유례없는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공급망과 고객의 다변화는 대세적인 선택이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는 HBM 시장 규모가 2024년 182억달러에서 2025년 467억달러로 157% 급증할 것으로 예측했으며, J.P. 모건은 HBM TC 본더 시장이 2024년 4억6100만 달러에서 2027년 15억 달러로 3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처럼 급성장하는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한미반도체 역시 SK하이닉스 외에 마이크론을 신규 고객사로 확보하고, 올해 1분기 매출 중 해외 고객사 비중이 90%에 달했다고 밝히는 등 고객 다변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CLSA 등 증권가에서는 한미반도체 TC 본더 매출 중 SK하이닉스 비중이 2024년 74%에서 2027년 40%까지 낮아질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도 최근 마이크론에 HBM3E 12단 인증을 줬지만 그에 대해 SK하이닉스가 불만을 가질 수없다"며 “한미반도체도 고객을 다변화하하면서 본인들은 공급 다변화의 불이익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면 어불성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경쟁사들의 치열한 도전은 당연한 것"이라며 “각 기업들이 기술력과 생산 능력, 그리고 전략적 파트너십을 어떻게 구축해 나갈지가 향후 시장 판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라고 덧붙였다. 강현창 기자 khc@ekn.kr

[지배구조의 지렛대] ③ SK C&C ‘IT 관리자’에서 그룹의 조종석으로

SK그룹의 지배구조 정점에는 한때 이름조차 낯선 IT 자회사가 있었다. 그룹 내부 시스템을 관리하던 SK C&C는, 어느 순간부터 최태원 회장의 지배력을 떠받치는 핵심 '지렛대'로 기능했다. 그리고 2015년, SK그룹은 이 비상장 회사를 공식 지주사와 합병하며 지배구조의 방정식을 다시 썼다. 구조는 단순해졌지만, 방향은 그대로였다. SK C&C는 1991년 '선경텔레콤'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설립 목적은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 SK네트웍스 등 계열사들의 IT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하는 것이었다. 외부 매출보다 내부 거래에 기반한 안정적 수익이 더 컸고, 그룹의 방대한 IT 수요는 이 회사를 전담 플랫폼으로 만들어주었다. 이후 중고차 플랫폼(SK엔카), 핀테크, 사회적 기업 설립 등으로 외연을 확장했지만, 본질은 그룹 인프라를 뒷받침하는 실무형 조직이었다. 하지만 이 조용한 IT 자회사에 SK그룹 총수 일가는 전략적 지분을 집중시켰다. 최태원 회장은 한때 SK C&C 지분을 49%까지 보유했고, 2015년 합병 직전까지도 32.9%를 유지했다. 그의 여동생인 최기원 SK행복나눔재단 이사장도 10.5%를 보유해, 총수 일가 합산 지분율은 43.4%에 달했다. 공식 지주회사인 SK㈜에 대한 직접 지분은 이보다 현저히 낮았다. 그러나 SK C&C는 SK㈜ 지분을 약 10% 보유하고 있었고, SK㈜는 다시 SK텔레콤, SK하이닉스, SK이노베이션 등의 계열사를 지배했다. 최 회장 일가 → SK C&C → SK㈜ → 사업회사로 이어지는 역피라미드형 구조, 이른바 '옥상옥' 구조가 그렇게 형성됐다. 이 구조는 2003년 SK글로벌 분식회계 사태라는 대규모 위기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분식 규모는 약 1조5000억원에 달했고, 최태원 회장과 당시 손길승 회장이 구속되며 그룹의 컨트롤타워였던 구조조정본부가 해체됐다. 그 틈을 타 외국계 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이 SK㈜ 지분 14.99%를 확보하며 경영권 공격에 나섰다. 당시 최태원 회장의 SK㈜ 지분율은 1%도 안됐다. 당시 SK의 소액주주들은 소버린의 '공격'에 동참하고 나섰다. 이에 최 회장이 지배력을 지키기 위한 방어카드는 '맞교환'이었다. 최 회장은 자신이 보유하던 비상장사 워커힐 호텔 주식 385만주를 1560억원에 SK C&C에 매각하고, 그 대가로 SK C&C가 보유하고 있던 SK㈜ 지분 646만주(5.08%)를 넘겨받았다. 이 거래로 최 회장은 SK㈜ 최대주주가 되었지만, 검찰은 이 과정에서 비상장 주식 가치가 고의로 과대평가되었다고 판단했다. SK C&C에 2071억원의 손해가 발생했고, 최 회장에게는 700억~800억원의 부당이득이 돌아갔다는 것이 검찰의 시각이었다. 2008년 대법원은 최 회장의 배임 혐의를 유죄로 확정했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선고됐다. 이 판결은 비상장 주식의 과대평가가 경영진의 형사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처음으로 명확히 밝힌 사례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SK C&C는 그룹 내부 거래를 기반으로 안정적인 실적을 이어갔다. 2010년 내부거래 비중은 63.9%, 2011년은 65.5%, 2013년에도 41.5% 수준을 유지했고, 합병 이후인 2016년에는 SK㈜의 내부거래 매출 비중이 84.9%에 달했다. 2012년에는 인건비 과다 계상 등으로 공정위로부터 347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비상장사가 내부 일감을 독점하면서, 총수 일가에게 과도한 이익이 몰리는 구조는 '사익편취' 논란으로 계속됐다. 이 같은 구조는 규제 강화로 압박을 받았다. 공정위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확대하며, 상장사 총수 일가 지분 30% 이상 보유 기업을 집중 감시 대상으로 삼았다. SK그룹으로선 구조를 공식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2015년 4월, SK그룹은 SK C&C와 SK㈜의 합병을 전격 발표했다. SK C&C가 SK㈜를 흡수합병하는 구조였고, 합병 비율은 1:0.7367839로 산정됐다. 당시 SK C&C 주가는 상대적으로 고평가된 반면, SK㈜는 저평가 상태였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당시 SK㈜ 지분 7.19%)은 “SK㈜ 주주의 가치를 훼손한다"며 반대 의결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합병은 그대로 강행되면서 합병 법인은 SK㈜라는 이름으로 새 출범했다. 최태원 회장은 합병법인의 지분 23.4%를, 총수 일가는 30.9%를 보유하게 됐다. 비상장사가 그룹 전체를 간접 지배하던 '비공식 지렛대'는 사라졌지만, 결과적으로 최 회장은 공식 지주회사를 통해 그룹 전체를 직접 지배하게 됐다. 동시에, 공정위의 사익편취 규제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증여세 부담도 일정 부분 완화됐다는 평가다. 한 재계 관계자는 “SK C&C는 한때 실무형 IT 자회사였지만, SK그룹의 지배 전략 한복판에서 작동한 핵심 변수"라며 “총수 일가 지분의 이동 경로, 규제 회피 수단, 위기 대응 메커니즘이 모두 이 회사 안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강현창 기자 khc@ekn.kr

[단독] MBK 김병주, 전단채 투자자 형사 고발…협박죄 주장에 비대위 맞불 집회 예정

MBK파트너스 김병주 회장과 홈플러스 전단채(ABSTB) 투자자 간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김 회장 측이 투자자 일부를 협박죄로 경찰에 신고한 사실이 알려지며, 양측의 대립은 법적 대응 단계로 번졌다. 15일 '홈플러스 물품구매 전단채피해자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에 따르면 비대위는 지난 7일 김병주 회장의 자택에 항의성 전단지를 부착했다. 전단지에는 홈플러스 유동화 전단채 사기 발행 의혹과 관련된 내용이 담겼다. 비대위 측은 초인종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리지 않고 조용히 부착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틀 뒤인 지난 9일 비대위는 용산경찰서로부터 협박 관련 수사 협조 요청 공문을 받았다. 김 회장 측이 해당 행위를 협박으로 판단해 신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비대위 상황실장과 일행은 오는 18일 경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을 예정이다. 비대위 측은 당황스럽다는 입장이다. 비대위는 “4019억 원 규모의 피해에 대해 항의한 것일 뿐, 물리적 위협은 없었다"고 주장하며 “억울함을 표현한 피해자들에게 협박 혐의를 적용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밝혔다. 비대위는 김 회장 측의 협박죄 신고에 대응해 오는 17일 규탄 집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에 대해 김 회장 측은 피해자들이 자택에 직접 방문해 항의한 행위가 사적 평온을 침해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입장이나 해명은 공개되지 않았다. 한편 지난 3월 회생절차에 들어간 홈플러스는 유동화 전단채와 관련된 채무에 대해 상환이 어려운 상황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투자자들의 불안과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강현창 기자 khc@ekn.kr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