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셸 로고(사진=로이터/연합)
유럽 기업들이 미국 진출에 줄줄이 시동을 걸고 있다. 미국을 '기회의 땅'으로 삼아 사업장을 유럽에서 이전하거나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에 눈길을 돌려 경쟁력을 강화시키고 기업가치를 제고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계기로 기업들의 유럽 탈출 행렬이 본격화될지 관심이 쏠린다.
22일 주요 외신에 따르면 스위스 태양광 기업 마이어버거는 지난달 중순 유럽 최대 규모인 독일 공장을 폐업했다. 이로 인해 직원 500여명은 일자리를 잃었다. 중국산 저가 공세에 직면한 와중에 유럽의 보조금 정책 또한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군터 에르푸르트 마이어버거 최고경영자(CEO)는 “유럽의 정책 지원책이 전무하자 태양광 프로젝트를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전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고 로이터통신에 말했다.
노르웨이 배터리 회사 프레이어는 지난 2월 법인 등록지를 룩셈부르크에서 미국으로 옮겼다. 프레이어는 노르웨이에 이미 반쯤 지어진 공장 건설을 중단하고 미국 조지아주로 이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생산세액공제(PTC)에 따른 수혜를 입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유럽 탈출 러시가 IRA를 노리는 청정에너지 기업들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엑손모빌 로고(사진=AFP/연합)
영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석유공룡인 셸을 이끄는 와엘 사완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상장지를 런던증권거래소(LSE)에서 NYSE로 이전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놨다. 유럽 투자자들이 친환경 투자를 강조하고 있어 셸의 기업 가치가 엑손 모빌, 셰브런 등 미국 석유공룡들에 비해 상당히 저평가돼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우리는 분명히 저평가된 것으로 보이는 곳에서 위치하고 있다"며 미국 기업들과 밸류에이션 갭(격차)가 크다고 꼬집었다.
다만 사완 CEO는 기업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2025년 중순까지 비용 절감, 자사주 매입 등 다양한 시도를 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는 2025년 중순까지 다양한 시도에도 “격차가 좁혀지지 않을 경우 모든 선택지를 고려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같은 빅오일(거대 석유공룡)이라 하더라도 셸은 미국 석유기업보다 빠른 속도로 기업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석유전문매체 오일프라이스닷컴에 따르면 2018년까지만 해도 셸과 엑손모빌의 기업가치는 EBITDA(상각전 영업이익) 대비 각각 6배, 7배로 집계됐지만 현재는 4배, 6배로 쪼그라들었다.
블룸버그는 이러한 추이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화석연료와 연관된 기업에 대한 투자수요가 위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유럽 최대 규모의 연기금 중 하나인 네덜란드 공적연금(ABP)은 지난달 성명을 내고 “기후변화와 불가분하게 연관되면서 개선이 없거나 할 의향이 없는 회사는 더 이상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는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일부 유럽 기업들은 상장지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미 이전한 상태다. 독일에 설립된 글로벌 다국적 화학 기업인 린데는 지난달 상장지를 독일 프랑크푸르트시장(FSE)에서 NYSE로 이전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영국 플러터 엔터테인먼트, 퍼거슨, CRH 등도 상장지를 미국으로 옮겼다.
신규 상장 또한 미국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추이다. 실제 지난해 LSE에서 신규 상장된 횟수는 23건으로 2022년(74건)보다 절반 넘게 줄었다. 같은 기간 미국에선 IPO 횟수가 155% 급증했다.
이런 와중에 셸 마저 상장지를 미국으로 옮길 경우 그 파장이 클 것이라고 블룸버그는 내다봤다. 영국 FTSE100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셸이 떠나면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과 글렌코어도 이를 뒤따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BP와 글렌코어는 FTSE100 시총 각각 6위, 10위다.
한편 유럽 은행들도 미국 은행들과 경쟁력 격차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유럽 시중은행으로 구성된 유럽은행연합은 이달 초 유럽중앙은행(ECB)에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규정이 계속 강화되면 유럽 은행들은 미국 은행들과의 경쟁에서 크게 밀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JP모건과 모건스탠리 시가총액은 각각 장부상 자산 가치의 1.9배, 1.7배 수준이다. 반면 유럽 BNP파리바와 도이체방크는 각각 0.7배, 0.5배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