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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경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실제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사건이 최근 프랑스에서 발생했다. 지난 9월 19일 프랑스 정부는 녹색산업법에 따라 ‘2024년 전기차 구매 보조금 최종 개정안’을 발표했다. 이 개정안의 특이점은 보조금 기준이 이전에는 도로에서 배기구를 통해 배출되는 탄소 배출량에 근거했던 반면, 전기차 생산 단계에서 폐기 후 재활용 단계까지 탄소 배출량을 합산한 환경점수를 도출, 이 점수가 총 80점 중 60점 이상이 돼야 보조금을 지급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보조금을 지급하되 그 범위를 기존 배기구에서 생산에서 재활용까지 확대, 환경정책 면모가 강화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부 내용은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탄소 배출량 산정에는 원자재인 철강, 알루미늄 및 기타 재료 생산, 배터리 생산, 완성차 조립, 운송 등이 포함된다. 이 중 완성차 운송은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한국 등 아시아 국가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또 알루미늄 등 원자재나 완성차 조립 부문, 나아가 가장 탄소배출이 많은 배터리 생산 등은 무탄소 전원인 원자력과 수력에 주로 의존하는 프랑스가 상대적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쉽게 말해 프랑스에서 보조금을 받고 전기차를 판매하려면 전기차 조립공장 뿐만 아니라 배터리 생산시설까지 프랑스로 옮겨오라는 얘기다.
현재 프랑스의 전기차 시장 상황을 보면 이런 조치를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프랑스 전기차 시장은 2020년 19만대에서 2022년 46만 대로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판매되는 전기차의 80%가 수입차다. 이렇다 보니 구매 보조금도 대부분 외국산 전기차에 몰리면서, 정작 자국 전기차의 보조금 수령 비중은 20%에도 못미치는 실정이다. 더욱이 배터리 셀(cell) 생산규모면에서 이미 상위 10위권 내에 즐비한 한·중·일에 비한다면, 프랑스는 아직 변변한 배터리 생산기업도 없다. 그런데도 프랑스는 2021년 수립한 '프랑스 2030'을 통해 2027년까지 전기차 생산 100만 대, 3개의 기가 팩토리 구축을 통해 배터리 산업 독립 등을 천명하였다. 이 목표 달성을 위한 제도적 수단이 바로 이번 개정안이다. 그래서 얼핏 환경정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보호무역주의에 입각한 산업정책, 특히 자국의 전기차 및 배터리 산업 육성 정책이다.
물론 이번 개정안의 기시감도 상당하다. 이미 자국산 배터리 탑재 전기차에 한정했던 중국 전기차 보조금 제도나 최종 조립 위치나 FTA체결 국내 특정 부품 조달 조건을 보조금 지급 조건으로 한 미국 IRA 등이 같은 맥락에서 도입·운영 중이다. 더욱이 이런 추세가 프랑스를 넘어 유럽으로도 확대될 조짐이 보인다. 전기차 배터리 탄소발자국 신고를 의무화한 EU 배터리 규정이 지난 8월 17일 발효돼 내년 2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프랑스와 유사한 전기차 보조금제도의 개편 도미노가 유럽 전체로 조만간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만큼 이제 전기차는 대기환경개선 수단에서 보호·육성해야할 산업으로 빠르게 변모하는 추세다.
대기환경개선은 전기차의 국적이 중요하지 않다. 국산이든, 수입산이든 온실가스를 줄이고 대기질만 개선하면 된다. 하지만 산업육성은 다르다. 우리나라, 우리 지역에서 전기차가 생산돼야 우리에게 일자리가 생기고. 우리 집 근처 가계 매상이 올라간다. 우리나라는 기술개발·수출 등 전기차 산업에 대한 지원은 산업통상자원부가 담당하지만, 정작 국내 시장형성을 위한 구매보조금 운영 등 보급사업은 환경부가 담당하는 것으로 이원화돼 있다. 세계 전기차 정책 패러다임이 환경정책에서 산업정책으로 바뀌는 점을 감안할 때 산업육성에 특화된 산업통상자원부로 전기차 정책을 일원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당장 산업통상자원부의 에너지자원특별회계에서 재원을 충당하는 전기차 구매보조금 업무부터 이관을 검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