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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은녕 서울대학교 교수/ 한국에너지법연구소 소장 |
경제의 성장동력과 국제 경쟁력을 대부분 같은 연장선상에서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성장이 크지 않더라도 국제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사례는 많다.
대한민국과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Four Asian Dragons)’ 또는 ‘아시아의 네 호랑이(Four Asian Tigers)’의 대표주자다. 1980년대 일본의 뒤를 이어 연간 7%대의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한 아시아의 신흥공업국인 대한민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4개 국가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 나라는 부존자원이 빈약하지만 이를 높은 교육열과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 그리고 중앙정부의 강력한 리더십과 경제발전계획 등으로 극복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싱가포르는 수학과 과학교육에서 대한민국과 세계 최고를 다투는 나라이며, 리콴유와 박정희라는 장기집권 통치자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리콴유는 인구 300만의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를 세계적인 금융·물류의 중심지로 키워내 20세기 세계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박정희 역시 6·25전쟁을 치룬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닦았다. 그 덕분인지 두 사람 다 아들과 딸이 총리와 대통령이 됐다.
두 나라가 이룬 경제성장은 눈부시다. 싱가포르는 1960년대 초반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 수준이었으나 이제는 6만5000달러에 달하는 세계 2위 고소득 국가로 발전했다. 대한민국도 1960년대 초반 1인당 국민 소득이 120달러의 최빈국에서 이제는 3만 4000달러의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두나라의 성장 전략은 크게 달랐다. 싱가포르는 서울시 면적에 인구가 500만명 정도의 작은 국가지만 대한민국은 상대적으로 큰 면적과 인구를 가지고 있다. 사회지리적으로는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로 영어가 능통하며 유럽과 아시아간의 무역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서구권의 언어와 무역로와는 먼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싱가포르는 이런 국가의 특성을 고려해 영·미권의 산업과 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한편 아시아권에 산재한 화교 자본과 정치 권력의 중심지로 역할을 했다.
싱가포르는 역사적으로 외국계 산업과 자본의 유치 및 무역에 의존하여 발전해 왔다. 제조업 비중도 상당하다. GDP의 25% 이상이 제조업에서 나온다. 주요 생산품은 전자, 정유, 기계, 의약품 등이다. 특히 정유산업이 도시국가임을 고려할 때 실로 거대하다. 그러나 제조업 분야 기업 대부분이 각종 세제 감면과 혜택을 통해 유치한 외국기업들이며 싱가포르 자국 기업은 많지 않다.
이에 비해 대한민국은 외국계 기업이나 외자유치가 어려운 환경이었기에 자국의 기업을 육성해 대한민국 브랜드로 제품을 수출하며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정책을 썼다. 재벌기업 육성을 통한 수출형 제조업 육성정책이 대표적이다. 이 와중에 대한민국 역시 정유산업을 육성했는 데, 이 역시 국가규모를 고려할 때 대만이나 일본의 규모보다 크다.
싱가포르 정유산업의 경쟁력은 세계적이다. 아시아에서 제일 큰 석유 현물과 선물시장이 싱가포르에 있다. 수백 개의 글로벌 에너지 기업이 싱가포르에 지사를 두고 보다 저렴한 석유제품을 구매하거나 보다 많은 거래 수입을 얻기 위해 저장탱크와 각종시설을 사용하고 있고 국제물동량의 20%에 달하는 선박이 싱가포르 항구에서 기름을 넣고 있다.
대한민국 정유산업도 경쟁력이 높다. 동북아시아 3국 중 최대 규모의 정유시설을 갖추고 최고급 품질의 석유제품과 석유화학제품을 제조, 수출하고 있다. 그 덕분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한국 땅에서 원유가 나오지 않지만 최고 품질의 석유제품을 손쉽게 풍부하게 구매할 수 있다.
그러나 성장동력을 이야기하자면 두 나라 정유산업 위치는 사뭇 달라진다. 외국계 기업 비중이 높고 주변 지역의 수요가 많은 싱가포르는 상당기간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겠지만, 국내 생산규모가 국내 수요의 200%에 달하는 대한민국의 정유산업은 성장가능성이 싱가포르에 미치지 못한다. 싱가포르에는 30여 년 전부터 택시의 대부분이 ‘프리우스’로 대표되는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차지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택시는 LPG를 사용하다가 이제 전기로 넘어가고 있다. SK등 정유 대기업들도 배터리, 수소 등 새로운 영역에서 성장동력을 찾고 있다. 대한민국을 둘러싼 상황이, 에너지 산업을 둘러싼 상황이, 기존 에너지 산업의 경쟁력 유지가 아니라 새로운 분야에서 성장동력을 찾도록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