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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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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칼럼] 유연한 에너지 시장, 발칙한 꿈일까?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3.07.14 16:47

조성봉 숭실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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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봉 숭실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LNG 탱크가 꽉 찼다. 이른바 ‘탱크탑’이다. 빨리 탱크를 비우고 값이 싸진 LNG를 채우는 것이 유리하다. 한국가스공사나 LNG 직도입 자가용 발전회사나 지금 탱크를 채우고 있는 값비싼 LNG는 어떻게든 빨리 처분하고 보다 값싼 LNG를 채워 놓는 것이 좋다. 그러려면 발전용 LNG를 싸게 팔아치울 수 있어야 한다. 도시가스는 쉽지 않다. 가정용 도시가스 요금이나 산업용 도시가스 요금이 정해져 있어서 단기간에 여기서 판매량을 늘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발전용을 싸게 처분해야 한다. 네거티브 가격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저부하 석탄발전 가격보다 싼 값에 팔겠다고 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현재 탱크에 꽉 차 있는 LNG를 매입가격보다 왜 싸게 처분해야 하는가. 언뜻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실은 말이 된다. 기왕 사들인 LNG에 쓴 돈은 매몰비용이다. 이미 지불했거나 또는 어차피 지불해야 할 비용이다. 이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비용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매몰비용 건질 생각은 하지 말고 앞으로 가장 수익성 있는 일을 해야 한다. LNG 국제 가격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그러니 빨리 탱크를 비우고 날로 싸지는 LNG를 붙잡아서 탱크에 넣어 놓는 것이 좋다. 2020년 봄, 코로나가 유행하던 시절, 미국의 유가가 마이너스를 기록한 적이 있다. 코로나로 수송수요가 격감해서 기름 수요는 떨어졌고 전 세계적인 공급은 큰 변화가 없어서 탱크마다 원유가 가득 차 있었다. 이미 비싼 돈을 지불한 기존 원유재고를 빨리 팔아치워 탱크를 비운 다음 더 값싼 원유로 채우는 것이 중요했다. 결국 돈을 얹어 주고 탱크에 차 있는 원유를 팔아치우는 마이너스 원유가격이라는 기괴한 현상이 발생했다.

LNG 탱크를 빨리 비우는 것이 우리 전력시장에도 좋은 일일까. 당연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우선 일시적이나마 전기요금 인하요인이 될 수 있다. 전력시장 도매요금인 SMP를 결정하는 것은 발전용 LNG 가격인데, 가스공사와 LNG 직도입 회사가 LNG를 값싸게 발전회사에게 판다면 당장 SMP는 떨어질 것이고 한전의 구입전력 비용도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가스 도입회사, 발전회사, 한국전력 그리고 소비자에게 다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혁명적 사고를 우리 전력산업과 가스산업이 감당할 수 있을까?

공기업인 가스공사가 이런 과감한 결단을 하기는 어렵다. 일단 자체 감사에서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산업부의 부처감사는 물론 감사원의 감사도 무사히 배겨낼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국제 LNG 시세가 싸더라도 비싸게 사들인 것을 일부러 값싸게 처분하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가스공사 뿐 아니라 민간기업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더 큰 수익을 올리기 위한 전략이긴 하지만 비싸게 산 LNG를 값싸게 처분해 일시적 손해를 감당하는 일은 아직 우리 민간기업의 생리상 경영진이 추진하기 어려운 일이다. 가스공사도 민간기업도 이런 과감한 결정을 할 수 없는 배경에는 제도적 요인이 있다. 바로 전력시장의 경직성 때문이다.

현재의 전력시장은 비용평가풀(CBP)로 운영되고 있다. 비싸게 구입한 연료를 쓰고 있으면 발전한 전력을 싸게 팔고 싶어도 싸게 팔 수 없다. 오래전부터 필자는 빨리 비용평가를 벗어나서 가격입찰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담합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격입찰은 쉽게 도입되지 않고 있다. 가격입찰 시장이 성숙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나타났을 때 기민한 LNG 발전소는 아주 싼 가격으로, 심지어는 마이너스 가격으로 생산된 전력을 팔고 가스탱크를 비울 것이며 이를 더 싼 LNG로 채우려고 할 것이다.

현재의 공기업 체제와 전력시장은 이 같은 움직임을 수용할 만큼 제도적으로 유연하지 않다. 비전을 갖고 몇 년 내에 가격입찰을 시작한다고 출범했지만 지난 23년 동안 우리 전력시장은 비용평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결국 에너지 시장의 경직적 제도가 그 시장에서 움직이는 기업들의 창의력과 순발력을 제약하고 있는 셈이다. 유연한 에너지 시장, 발칙한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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