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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 없는 핵폐기물] "빨리보다 안전하게"…프랑스 고준위 방폐장 건설 "국민·정부·국회 협조"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3.10.29 09:37

시제오 프로젝트1991년부터 33년째 추진…2027년 착공 2035년 가동 목표
안정적 지질층 깊이 500m, 면적 15㎢에 중·고준위 폐기물 함께 영구 매립
"돌발사고 대비 10, 20년 단위 검토 120년 지켜본 뒤 문제 있으면 이전도"

"국민 지지·정부 의지 없으면 불가능…한국서도 국민의견 수렴, 국회·정부 협력 필요"



르네상스 시대를 맞았다는 국내 원전 산업의 미래가 불투명한 것으로 지적됐다. ‘탈(脫)원전’ 정책으로 고사위기를 맞았던 국내 원전 산업에 다시 숨통이 트였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국내에 핵폐기물 처리 시설이 마련되지 않아 원전은 ‘화장실 없는 아파트’ 신세가 되고 있다. 원전 산업 부활만큼 중요한 건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다. 원전업계와 학계에서는 진정한 원전 강국으로 거듭나기 위해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고준위 방폐장)을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고준위 방폐장을 마련하기 위한 법적 근거가 되는 특별법안 입법조차 국회에 발이 묶인 상태다. 에너지경제신문은 고준위 방폐장 시설 마련에 고충을 겪는 국내 현주소를 알리고 해외사례에서 해법을 찾고자 ‘갈 곳 없는 핵폐기물’ 기획 기사를 연재한다. 스위스, 핀란드, 프랑스 등 원전 산업 선진국을 찾아 현장의 생생한 사례를 소개하고 국내외 전문가들의 목소리도 모았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 국내 실태·대책

② 해외사례-스위스

③ 해외사례-핀란드

④ 해외사례-프랑스



뷔르 조감도

▲프랑스 방사성 폐기물 관리청인 ‘안드라(ANDRA)’가 뷔르 지역에 건설 중인 방사성 폐기장 조감도. 사진=안드라



[에너지경제신문 / 샤트네말라브리(프랑스)=윤수현 기자] "고준위 방사성폐기장을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의견입니다. 국민들이 수용하면 그것을 추진하기 위해 의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줘야 합니다. 다만 한국은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정책이 바뀌기 때문에 쉽지 않은 상황인 것 같아요."

프랑스 방사성 폐기물 관리청인 ‘안드라’(ANDRA)의 다니엘 들로르(Daniel Delort) 국제 협력부 책임자는 원자력발전소 가동 상위 10개국 가운데 유일하게 방사성폐기물 처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한국의 상황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프랑스 안드라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시설(방폐장)을 동북부에 위치한 지역 ‘뷔르’에 짓기 위해 1991년부터 ‘시제오’(Cigeo, 심지층 처분장)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시제오 프로젝트는 깊이 500m, 면적 15㎢에 달하는 안정적인 지질층에 방사성 핵폐기물을 저장하는 건설 프로젝트다.

프랑스는 방사성 폐기물 처리와 함께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원전 분야로 사용 후 핵연료의 재처리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는 원자력발전소에서 연료가 나오면 플루토늄과 우라늄 등을 분리해내는 재처리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남는 핵폐기물을 안드라가 관리한다.

핵폐기물은 그 수준과 활동에 따라 저준위, 중준위, 고준위로 나뉜다. 저준위 폐기물을 처리 하는 시간은 다소 짧게 걸리는 반면, 중준위 폐기물 중 일부와 고준위 폐기물은 처리 기간이 무려 10만 년 이상 걸린다.

다니엘 책임자는 "시제오 프로젝트는 중준위 중 처리 과정이 오래 걸리는 폐기물과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두 가지를 영구 매립하기 위한 중요한 건설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뷔르

▲방사성폐기물관리청(ANDRA) 직원이 ‘뷔르’ 지역에 위치한 사용후핵연료 심지층 처분 연구시설에서 높이 4.5m에 달하는 지하 갱도를 걸어가고 있다. 안드라



◇ 시제오 프로젝트, 33년째 진행…2027년 착공 2035년 운영 목표

시제오 프로젝트는 1991년부터 관련 법 제정 등을 추진, 33년여 간 진행돼 왔다. 2004년부터 연구 시설을 가동해 19년째 가장 효율적안 처리 방법을 찾고 있다. 2006년 조정 기간, 2011년 검토 과정을 거쳐 2016년에서야 법안이 통과됐다. 그 사이 2006년, 2013년, 2019년 세 차례에 걸쳐 프랑스 전역에서 시제오 프로젝트에 관한 국민 대담화를 열어 여론을 수렴했다.

30여 년의 긴 시간에 걸쳐서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결과 안드라는 지난 1월 프랑스 원자력안전청(ASN)에 고준위 방폐물의 처분을 위한 심지층 처분장의 건설 허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정부의 허가 등을 거쳐 2027년부터 실제 방폐장 건설을 시작해 완공한 뒤 2035년부터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을 묻도록 하는 게 목표다. 이처럼 프랑스 주요 원전 운영국들과 달리 한국의 방폐장 건설 작업은 첫걸음도 떼지 못한 상황이다.

이에 에너지경제신문은 지난 15일부터 4박 6일간 안드라 본사가 있는 프랑스 도시 ‘샤트네말라브리’(파리 남쪽 약 10km 위치) 현지를 직접 방문해 뷔르 방사성폐기장 운영 과정과 고충, 시설에 대한 설명, 주민 수용성 해결 방법 등에 대해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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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방사성 폐기물 관리청인 ‘안드라(ANDRA)’ 본사에서 만난 다니엘 들로르(Daniel Delort) 국제 협력부 책임자가 지난 16일 안드라 본사에 찾은 기자에게 ‘시제오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윤수현 기자

◇ 과학자 100여 명이 수십 년째 연구 매진…아직도 시행 착오 단계

시제오 건설 프로젝트의 경우 현재 과학자 및 지질학자 등 100여 명이 20년 가까이 현장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시행 착오 단계에 있다. 그만큼 중요한 국가적 과제이기 때문이라고 다니엘 책임자는 설명했다. 안드라는 시제오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 고준위 방사성폐기장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지방자치단체를 공모했다. 40개의 지역 지자체가 공모에 참여했고 각 지역에 대한 타당성 조사 및 검토를 한 결과 적합한 지역 4군데를 선정했다. 그 4군데 지역의 지하에 실험실을 만들어 가장 최적의 장소를 선정했는데 이곳이 바로 현재 시제오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뷔르’ 지역이다.

프랑스는 방폐물을 수천 년간 저장해도 안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이곳에 처분장을 마련했다. 이유는 지질학적 요인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지형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두꺼운 점토층으로 이뤄져 있다. 점토층은 물의 침투가 일어나지 않고, 방사능을 차폐하는 기능이 있다고 안드라 관계자는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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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방사성 폐기물 관리청인 ‘안드라(ANDRA)’가 진행 중인 ‘시제오 프로젝트’ 조감도. 안드라



◇ "빨리보다 안전하게 처리…돌발사고 대비 120년간 관찰해 문제 있으면 이전도 계획"

다니엘 책임자는 "조감도에서 보면 빨간색으로 돼 있는 부분이 중준위폐기물, 노란색이 고준위폐기물을 처리하는 곳이다. DISPATCH존은 기차역의 역할, SHAFTS존에서는 기차를 통해 도착한 방사성폐기물을 도르래를 이용해 내린다"며 "가운데에서는 사람들이 일을 하며 파란색 기둥을 통해 지상과 지하가 연결이 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빨리 묻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직 없다. 안전하게 묻을 수 있도록 시간을 두고 있다"며 "돌발적인 사고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120년 간 지켜보며 (방폐물을) 이전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안드라가 관찰기간을 120년으로 정한 이유는 10년, 20년 단위로 폐기물 처리가 잘 되고 있는지 검토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새로운 기술을 추가하고 수정이 필요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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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방사성 폐기물 관리청인 ‘안드라(ANDRA)’ 본사에서 만난 다니엘 들로르(Daniel Delort) 국제 협력부 책임자가 지난 16일 안드라 본사에 찾은 기자에게 ‘시제오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윤수현 기자



다니엘 책임자는 서울 지하철을 예를 들며 "대한민국의 2호선 지하철은 1980년에 만들어졌지만 현재는 새로운 기술이 도입돼 방음벽, 스크린도어가 설치됐다"며 "시제오 프로젝트도 마찬가지다. 미래 세대들이 더 발달한 기술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원자력발전 비중이 70~80%에 육박하는 프랑스는 원전에 대한 주민 수용성이 비교적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도 방폐장 부지선정 과정에서 주민들의 반대가 거셌다고 한다. 이에 국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여러 번의 대국민 담화 과정과 투명한 정보 공개, 오로지 프랑스에서 만든 기술을 통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안드라 관계자는 전했다.

그는 "2017년에는 시제오 시설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Meuse, Haute, Marne 지역 주민들이 실험실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욕을 하고 물건을 부시는 등 폭력적인 시위도 있었다"며 "그들은 금전적인 보상을 원했다. 안드라와 정부가 그 지역에 보상을 줄 수 있는 협회를 만들어 적절한 보상을 지급하면서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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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오 프로젝트 임시 일정표. 안드라



시제오 시설이 가동을 시작하면 프랑스는 사용후핵연료를 처분하는 문제를 사실상 해결하게 된다. 현재 플라망디 지역에 임시적으로 있는 방폐물도 이 곳으로 모두 옮겨지게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프랑스 원자력 안전청인 ASN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드라는 올해 초 ASN에 제안서를 제출했다. 이후 2024~2025년까지 기술적인 부분을 다시 한 번 검토한 뒤 ASN에 보고서를 내야 한다. 2026년부터는 뷔르 지역 사람들과 프랑스 전국민을 상대로 다시 한 번 대국민 담화 과정을 거친 이후 2027년 최종적으로 ASN의 승인을 받게 된다.

2027년 ASN의 허가가 떨어지면 2035년부터 방폐물을 묻을 예정이다. 이후 파일럿 실험을 거쳐 2040년 정부에 결산 보고를 낸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서 방폐물을 매립할 계획이다.

먼저 장수명 중준위 폐기물부터 묻기 시작해 고준위 폐기물은 2080년부터 처분할 방침이다. 이렇게 되면 2150년에는 방폐물이 이 부지에 모두 매립된다.

이곳에는 고준위폐기물 1만㎥, 장수명 중준위폐기물 7만3000㎥를 저장해 도합 8만3000㎥를 저장할 수 있다. 프랑스 원전이 지금까지 생산한 고준위 폐기물인 4만3820㎥ 다 채우고도 저장 용량의 절반이 남는다.

다니엘 책임자는 "시제오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ASN의 허가다"라면서 "ASN과 안드라와의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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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오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프랑스 방사성 폐기물 관리청 ‘안드라’(ANDRA) 전경. 사진=윤수현 기자



◇ 총 투자 비용 40조원 달하는 프로젝트…"국민 지지·정부 의지 없으면 불가능"

33년째 진행되고 있는 시제오 프로젝트는 그간 정부가 바뀌어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추진돼왔다.

안드라 관계자는 "시제오 프로젝트는 전체 비용을 250억 유로(한화 35조 8647억)정도로 추산하고 있다"며 "지금까지 시제오 프로젝트 1단계 시행단계를 거치는데 60억~70억 유로(한화 8조 5900억원∼10조원)의 비용을 투자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시제오 프로젝트가 시작된 1991년부터 현재까지 프랑스 정부의 기조는 변해왔지만 관련 법안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법이 한국 법과는 다르기 때문이라고 안드라 관계자는 설명했다. 프랑스 법은 법안을 채택하는 것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정부를 비롯한 안드라 등 이해관계자들이 책임을 지고 법안으로 인해 생기는 과정과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다니엘 책임자는 "한국은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정책이 바뀌고 있는 상황이다"며 "현재도 국회 거대 정당과 정부의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에 프랑스 시제오 프로젝트와 같은 것을 만들긴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은 고준위 방폐장 건설의 전제가 되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특별법’의 국회 통과조차 요원하다. 한국은 1978년 첫 원전(고리 1호기) 가동 이후 40여년간 임시저장소에 쌓아둔 사용후핵연료만 1만7500여톤으로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이에 과거 박근혜 정부 시절 2016년 7월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이 수립됐지만 문재인 전 정부에서 당시 주민 의견 수렴이 부족했다는 이유로 ‘재검토위원회’만 운영하다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현재도 윤석열 대통령 취임 직후인 나온 법안이 국회에서 계류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이 정부의 원전 정책에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특별법은 십여 차례의 법안소위 심의를 거쳤지만 상임위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폐기될 처지에 놓였다.

한국의 상황에 대해 안드라 관계자는 "국회와 정부가 협력해야 고준위 방폐장을 설립할 수 있다"며 "가장 우선적인 것은 국민들의 의견이고, 의견이 수용되면 추진하기 위해 의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안드라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방사성폐기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안드라 입장에서는 방사성폐기물을 처리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방폐물로부터 환경과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 첫번째 역할이다"고 말했다.


ysh@ekn.kr

본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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