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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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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신용등급 강등, 정치가 문제다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3.08.0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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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피치가 1일(현지시간) 미국 국가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한 단계 내렸다.피치는 반복되는 디폴트(국가채무 불이행) 리스크를 배경으로 꼽았다. 사진은 피치의 뉴욕 본사 건물. 사진=EPA/연합뉴스


신용평가사 피치(Fitch)가 1일(현지시간) 미국 국가신용등급을 최고등급인 AAA에서 AA+로 한 단계 내렸다. 그 바람에 글로벌 금융시장이 흔들렸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세계 최대 경제국이며, 기축통화 달러를 앞세워 글로벌 경제를 호령하는 나라다. 각국 중앙은행과 해외 투자가들은 미국 국채를 사려고 줄을 선다. 미 국채는 으뜸 안전자산으로 늘 인기가 높다. 그런 나라가 신용평가사로부터 최고등급을 받는 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이젠 달라졌다. 지난 2011년 스탠더드 앤 푸어스(S&P)가 미국 국가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한 등급 내렸다. 사상 처음이었다. 그로부터 12년 뒤 피치가 강등에 가세했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 가운데 최고등급을 유지하는 곳은 무디스가 유일하다. 미국으로선 수모가 아닐 수 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미국 신용등급 강등이 우리한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등을 살펴보자.

◇ 반복되는 디폴트 리스크가 발목

먼저 시계추를 12년 전으로 돌려보자. 그때도 미국은 국가채무 불이행(디폴트) 위기로 치달았다. 권력 구조는 지금과 비슷하다. 백악관은 민주당 출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주인이었다. 그러나 하원 다수당은 2010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으로 넘어갔다. 공화당은 연방정부 부채 한도를 올리는 대신 대폭적인 지출 삭감을 요구했고, 민주당은 일부 삭감을 받아들이는 대신 증세가 필요하다고 맞섰다.

협상은 디폴트 데드라인을 이틀 앞두고 간신히 타결됐다. 그러나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S&P는 국가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떨어뜨렸다. 그 여파로 미 국채 금리가 오르고, 주가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당시 무디스와 피치는 AAA를 유지했다.

디폴트 위기는 2013년에 되풀이됐다. 공화당은 건강보험제도 혁신안인 오바마케어를 대폭 축소하라고 요구했다. 대통령과 민주당은 간판 정책인 오바마케어를 사수하는 데 총력을 쏟았다. 부채한도 증액 협상은 타결됐지만, 피치는 이때 미국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바꿨다.

◇ "정치 양극화가 문제다"

2023년 들어서도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다. 민주당 출신 조 바이든 대통령과 공화당이 지배하는 하원은 부채한도 증액을 놓고 막판까지 기싸움을 벌였다. 증액이 안 되면 미국이 국채 이자를 지급하지 못하는 초유의 디폴트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세계 경제는 백악관과 의회의 벼랑끝 싸움을 숨죽여 지켜봤다.

지난 5월 피치는 신용등급을 AAA로 유지하되 등급 전망을 ‘부정적 관찰 대상’으로 낮췄다. 피치는 "디폴트 시한(6월 1일)이 빠르게 다가오는데도 부채한도를 올리는 등 사태 해결을 하지 않는 정치적 상황을 반영했다"고 말했다. 피치로선 사전 경고음을 강하게 울린 셈이다.

기한을 이틀 앞두고 디폴트 협상은 극적으로 타결됐지만 피치는 이를 또 하나의 임시변통으로 여긴 듯하다. 언제 또 재발할지 모른다고 봤다는 얘기다. 피치는 1일 등급을 강등한 배경으로 "향후 3년 간 예상되는 미국의 재정 악화와 국가채무 부담 증가, 거버넌스(지배구조)의 악화"를 꼽았다.

피치의 리차드 프랜시스 이사는 2일 로이터와 인터뷰에서 "미국 정치권의 부채 상한선 논쟁에선 벼랑끝 전술과 양극화가 더욱 부각되고 있다"며 "2011년 이후 2년마다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거버넌스 약화와 정치 양극화 심화는 지난해 1월 6일 의회 난입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났다"며 "민주당은 너무 왼쪽으로 갔고 공화당은 지나치게 오른쪽에 치우쳐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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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경제국인 미국이 국가신용등급 강등이라는 수모를 겪고 있다. 사진은 1달러 지폐의 조지 워싱턴 초상. 사진=AP/연합뉴스

◇ 트럼프 탓 공방


백악관과 미국 재무부는 격하게 반발했다. 커린 잔피에어 백악관 대변인은 성명에서 "우리는 피치의 결정에 강력히 반대한다"며 "미국 경제가 강력한 회복세를 보이는 시점에 신용등급을 강등하는 것은 현실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말했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피치의 결정이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성토했다. 옐런은 "피치의 오류가 있는 평가는 오래된 데이터에 기반했으며 지난 2년 반 동안의 거버넌스 등 관련 지표의 개선 상황을 반영하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케빈 무노스 바이든 대선 캠프 대변인은 강등 책임을 아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떠넘겼다. 그는 "트럼프는 수백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게 했으며, 부자와 대기업에 대한 재앙적 감세로 적자를 확대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트럼프가 부채한도 협상 때 디폴트가 오더라도 공화당이 예산 대폭 삭감을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한 점을 상기시켰다.

마침 이날 연방 검찰은 지난해 1월 6일 의회 난입 사태와 관련해 트럼프를 대선 결과를 뒤집기 위한 사기 모의, 국가 기망, 선거사기 유포 등 혐의로 기소했다.

피치는 등급 강등 이유로 정치적 양극화를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도 미국 정치는 양극화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새다.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은 내년 11월 대선에서 재격돌할 공산이 크다.

◇ 한국 신용등급은 안정적

피치를 기준으로 최고등급인 트리플A는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호주 등 9개국이 받는다. S&P를 기준으로 하면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호주, 싱가포르 등 11개국이 최고등급을 받고 있다. 미국은 이들보다 신용도가 낮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은 국가신용등급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피치는 한국의 등급을 AA-로 평가한다. 2012년 9월 이 등급을 부여한 이래 변화가 없다. 미국이 한 단계 떨어졌지만 우리와 비교하면 여전히 두 계단 높다.

S&P는 한국의 등급을 AA로 매긴다. 2016년 8월 이후 변화가 없다. 미국과 비교하면 한 계단 아래다.

무디스는 한국의 등급을 Aa2로 평가한다. 2015년 12월 이후 8년째 같은 수준이다. Aa2는 피치와 S&P의 AA에 해당한다. 미국과 비교하면 두 계단 밑이다.

신용평가 3사는 고령화, 저출생에 주목한다. 무디스는 지난 5월 한국 보고서에서 "한국 경제 성장의 장기적인 리스크는 인구 통계학적 압력이 심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길게 보면 고령화와 저출생이 한국의 신용등급을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들의 지적이 아니라도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인 고령화와 세계최저 수준의 출생률이 한국 경제를 압박하는 요인이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 美 강등이 주는 교훈

피치가 미국 등급 강등의 배경으로 정치적 양극화를 꼽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양극화 강도로 보면 한국도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

원래 정치는 갈등을 조정하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여야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키운다. 갈등 증폭기 노릇을 하는 요즘 한국 정치가 딱 그렇다. 양평 고속도 논란에서 보듯 민생은 없고 오로지 정략과 정쟁만 난무한다.

피치의 결정은 정치적 양극화에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귀담아들을 한국 정치인이 과연 몇이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경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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