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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칼럼] 엘리엇에 배상 판정, 그냥 물러서지 마라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3.06.25 13:30

곽인찬 경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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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경제칼럼니스트


참 질기다. 고래심줄이 따로 없다. 엘리엇 매니지먼트라는 미국 헤지펀드 얘기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PCA·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는 지난주 대한민국 정부더러 엘리엇에 원금 기준 약 690억원을 배상하라는 판정을 내렸다. 이자까지 더하면 1300억원 규모다.

판정은 5년만에 나왔다. 엘리엇은 지난 2018년 약 1조원 배상을 요구하는 중재신청서를 냈다. 2015년 가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할 때 청와대와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주장했다. PCA는 청구액의 7%만 인정했다. 겉으론 우리 정부가 선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얼마가 됐든 다 세금이다. 1원도 아깝다.

1977년에 설립된 엘리엇은 대표적인 행동주의 헤지펀드다. 2018년엔 현대차가 과녁에 올랐다. 현대차, 기아, 현대모비스 지분을 일부 매입한 엘리엇은 정의선 회장이 추진하던 지배구조 개편안에 어깃장을 놓았다. 수조원에 달하는 고액 배당을 요구했다. 결국 정 회장은 개편안을 철회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 주총에선 현대차가 완승했다. 현대차가 제시한 배당안, 사외이사 선임안은 모두 통과됐다. 엘리엇은 2020년 초 지분을 모두 털고 나갔다.

사실 아르헨티나가 엘리엇한테 당한 것에 비하면 우리는 약과다. 2001년 아르헨티나는 외채 930억달러에 대해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했다. 이후 2005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채무 구조조정안을 내놨고 채권자 대부분이 이를 수용했다. 그러나 엘리엇을 비롯해 일부 헤지펀드가 이를 거부하고 미국 법원에 소송을 냈다.

엘리엇은 해외에 있는 아르헨티나 자산을 노렸다. 2012년 아르헨티나 해군 함정이 아프리카 가나에 정박했다. 옳거니, 엘리엇은 가나 법원을 움직여 이 배를 억류했다. 함정은 국제해양법재판소의 도움으로 10주만에 간신히 풀려났다. 2007년엔 아르헨티나가 대통령 전용기를 수리차 미국에 보내려다 억류가 무서워 포기한 적도 있다.

아르헨티나는 엘리엇을 ‘벌처펀드’라고 부르며 반발했다. 벌처(Vulture)는 썩은 고기를 먹고 사는 대머리독수리를 말한다. 사실 엘리엇은 디폴트 선언이 나온 뒤 아르헨티나 부실채권을 헐값에 샀다. 그러곤 액면가대로 다 갚으라고 밀어붙였다. 미국 법원이 엘리엇 편을 드는 바람에 아르헨티나는 국제 채권시장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2016년 채무조정안을 거부한 4개 헤지펀드에 47억달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채권액의 약 75%에 해당하는 액수다.

역시 미국 헤지펀드인 론스타는 엘리엇과 난형난제다. 지난해 여름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는 한국 정부에 대해 2억1650만달러(원금)를 론스타에 지급하라고 판정했다. 이는 론스타가 청구한 배상액의 4.6%에 해당한다. 론스타는 한국 정부가 외환은행 매각 승인에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손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이 분쟁은 10년을 끌었다.

헤지펀드는 알음알음 투자자를 모아 고수익을 추구한다. 돈이 된다면 지옥이라도 쫓아갈 태세다. 특히 행동주의 헤지펀드는 자기들의 돈 욕심을 근사한 명분으로 치장하는 데 도가 텄다. "주주 이익에 반한다"거나 "배당을 더 늘리라"고 목청을 높이면 소액주주들은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다.

냉정하게 보자. 엘리엇 등은 사모펀드로서 제 할 일을 다하고 있다. 국가를 상대로 한 끈질긴 소송전은 고객을 향해 "봐라, 우리는 수익 극대화를 위해 이처럼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과시할 수 있는 기회다.

질긴 사모펀드를 상대할 땐 우리도 만만찮은 상대라는 걸 끈질기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며칠전 "(엘리엇) 결정문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며 "어떤 추가적 조치를 할지를 숙고한 다음 책임 있는 답변을 드리겠다"고 말했다. 23일 법무부는 "국민 세금이 불필요하게 지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 대리 로펌 및 전문가들과 함께 판정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판정에 불복하면 취소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엘리엇은 보도자료에서 ‘승리’(Victory)를 선언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가 중재재판소 결정에 불복해 ‘근거 없는’(Baseless) 법률 절차를 밟아봤자 소송비용만 더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만하다.

한 장관에 당부한다. 약간이라도 근거가 있다면 과감하게 취소 소송을 제기하기 바란다. 설사 비용이 조금 더 들더라도 벌처펀드에 본때를 보일 수 있다면 그 돈은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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