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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금융당국 수장, 차라리 침묵이 낫다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2.12.26 08:27

나유라 금융증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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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조형 기법 중 하나로 ‘여백의 미’가 있다. 여백의 미란 화면에 그림, 글씨 등 묘사된 대상 이외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빈 공간을 의미한다. 독자가 작품을 감상할 때 캔버스를 가득 채운 그림보다 여백이 주는 울림, 아름다움에 감탄을 느꼈다면 그것이 바로 여백의 미다. 특히 수묵화는 여백의 미가 가장 잘 느껴지는 작품 중 하나다. 먹물이 지나면서 만들어낸 여백은, 작품의 무게감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

침묵 또한 여백의 미와 같다. 상대방에 백 마디의 말을 쏟아내는 것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때로는 효과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최근 금융당국 수장들은 이러한 대화의 기술들을 모두 잊은 듯하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하루가 다르게 금융사 CEO 거취에 대한 발언들을 서슴지 않고 쏟아내고 있다. 라임 사태로 중징계를 받은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을 향해 "금융위 논의를 거쳐서 의사결정을 내린 게 정부의 뜻"(김주현 금융위원장)이라고 강조하거나 "여러 번에 걸친 심도 있는 논의 끝에 사실상 만장일치로 결론 난 징계"(이복현 금융감독원장)라고 발언한 것이 대표적이다. 라임 사태에 대해 손 회장에 명확한 책임이 있고, 이에 대해서는 금융위와 금감원의 이견이 없다는 게 최근 금융당국 수장들 발언의 요지다.

금융권에서는 최근 김 위원장과 이 원장의 발언을 보면 손 회장이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마저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내년 3월 임기 만료를 앞둔 손 회장이 연임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라임 사태 관련해 당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금융은 연말까지 금융당국의 라임 사태 관련 중징계 수용 여부에 대해 "논의할 계획이 전혀 없다"고 못 박았다. 수용 여부에 대해 하루라도 빠르게 결론을 내려 당국과의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차라리 중징계 수용 여부를 내년 1월에나 논의하겠다는, 일종의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우리금융의 이러한 행보가 손 회장을 향한 당국의 조급함을 불러일으켰는지는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최근 금융위원장, 금감원장의 발언들이 우리금융 이사회의 행보와 대비되면서 불필요한 오해를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라임 사태 중징계 건에 대해 당국 차원에서 상당한 자신감이 있다면, 그 자신감을 갖고 법정에서 다투면 될 일이다. 손 회장에 중징계를 내린 것은 손 회장과 우리금융 이사회도 모두 인지하고 있는 것이고, 이에 대한 수용 여부는 우리금융 이사회가 결정할 일이다. 당국이 우리금융에 중징계를 내린 사실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중징계에 숨어있는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닌지와 같은 괜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실제 금융권 일각에서는 당국 수장들이 손 회장 거취를 압박하는 듯한 발언을 할 수밖에 없는 건, 사실상 우리금융 CEO 자리에 누군가가 내정됐기 때문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미 윤석열 대선캠프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NH농협금융지주와 같은 굴지의 금융사 CEO 자리를 꿰찬 것은 금융사들의 의구심이 터무니없지 않다는 것을 방증한다. 때로는 여백의 미가, 한 순간의 침묵이 강한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지금 당국 수장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침묵의 중요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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