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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자. 우리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관점에서 신간도서 ‘격정의 문장들’은 상당히 신선하다. 조선 시대의 상언과 근대 계몽기의 여성 독자들이 쓴 독자투고를 톺아봤기 때문이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국법을 어기고 편법을 행했다고 당당하면서도 간절하게 호소한 양반 부인의 상언(上言), 시집을 향해 온몸을 다해 항변한 원정(原情)을 보면 유교 가부장제 사회의 강요된 부덕을 지켜야 했던 여성상과는 다른 모습을 본다.
여학교 설립을 호소하며 대궐 앞에 엎드린 부인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여성 신문 독자, "첩이 부인만 못하리까, 슬프다 대한의 천첩된 자들아"라고 외친 첩들의 목소리 역시 잊혔던 존재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은 17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를 조선 후기와 근대 계몽기로 나눠 여성들의 글을 살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딸이 양반가 첩으로 들어가자 절개를 지키지 않았다고 잡혀가자 사회적 비난은 받을 수 있을지언정 관의 처벌을 받을 일은 아니라 항변한 조원서의 처가 올린 원정은 논리정연한 항변의 예다.
그렇다고 책이 단순한 발췌·인용이나 기계적 나열에 그치지 않는다. 글에 얽힌 역사·사회적 맥락을 짚어 이해를 돕는 것은 적극적인 해석으로 여성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남녀동등사상을 설파한 김송재의 글을 한문판에서는 "남자에게만 맡겨 두지 아니함이 우리 여사의 의무일까 하노라" 등 여성의 각성을 촉구하는 구절을 뺀 점을 지적하며 주독자층인 남성들을 의식한 듯하다고 본 대목이 대표적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인용된 글들이 흥미롭다. 권력에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할 말을 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신선하다. 19세기 후반 우의정을 지낸 심상규의 손자 심희순의 첩이라는 기생 출신 초월이 시국의 적폐를 고발하고 개선책을 제시한 상소문은 지금 봐도 놀라울 정도다.
근대 계몽기 들어선 여성들을 주 독자층으로 삼아 순한글로 간행한 제국신문 등 신문이 근대 여성의식이 형성되는 공론장 역할을 하면서 여성들의 독자투고도 활발해졌다. 이들은 먼저 여성 교육의 중요성에 눈 돌렸다. 1898년 ‘북촌의 여중군자’ 몇 명은 여학교의 필요성과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학교설시통문’을 내면서 "혹시라도 이목구비와 사지오관육체가 남녀가 다름이 있습니까? 어찌해 병신 모양으로 사나이가 벌어 주는 것만 앉아 먹고 평생을 깊은 규방에 처해 남의 절제만 받으리오?"라고 여성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한국 고전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조선 시대 여성생활, 특히 여성의 글과 글쓰기에 관해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여왔다. 이 책은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조선 여성들의 좌절과 분노 그리고 열망과 혜안을 적실하게 보여주어 우리의 눈과 귀를 틔워주는 값진 성취라는 분석이다.
제목 : 격정의 문장들
저자 : 김경미
발행처 : 푸른역사
yes@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