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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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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룰라, 구두닦이에서 3선 대통령으로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2.10.31 13:18

가난 딛고 성공 일궈낸 '희망의 아이콘'

세 번째 집권으로 부패 혐의라는 멍에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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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현지시간) 치러진 브라질 대선 결선투표에서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시우바(77) 후보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을 확정지었다(사진=로이터/연합뉴스).

[에너지경제신문 이진수 기자] 30일(현지시간) 브라질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확정된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시우바(77) 당선인은 ‘남미 좌파의 대부’로 불린다.

세 번째 대통령 임기에 들어가게 된 그는 지난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당선증을 받아 들고 "내 인생의 첫 증서"라며 울먹였다. 궁핍한 가정 형편으로 초등학교를 중퇴해 변변한 졸업장이 하나 없었던 그다. 이후 그는 ‘희망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1945년 브라질 동북부 페르남부쿠주(州)에서 태어난 룰라 당선인은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브라질 최대 경제 도시 상파울루 근교로 이주했다. 거기서 7세 때부터 땅콩 장사와 구두닦이로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어린 룰라는 10살 때까지 읽고 쓸 줄도 모르는 문맹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중퇴 후 14세부터 상파울루 인근 상베르나르두두캄푸 지역의 한 금속업체에서 일하다 사고로 왼쪽 새끼손가락 일부를 잃기도 했다.

1969년 룰라는 함께 공장에 다니던 첫 부인을 산업재해성 질병으로 잃고 말았다. 사망 당시 부인은 임신 상태였는데 치료비가 없어 병원에 가지 못했다. 이후 그는 노조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75년 그는 10만명의 노조원을 둔 금속노조 위원장으로 구속 등 탄압에도 잇따른 파업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개혁 성향의 지도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0년 노동자당(PT) 창당에 나선 룰라는 1982년 상파울루 주지사에 출마했다 낙선했다. 1984년부터 당시 민주화운동의 대명사였던 대통령 직선제 쟁취 운동을 전개했다. 이윽고 1986년 그는 연방하원 의원에 당선됐다.

1989년 30년만에 처음으로 실시된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그는 분패했다. 1994년과 1998년 대선에서도 보수층의 높은 장벽 앞에 거푸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2002년 강성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부드러운 룰라’를 앞세우며 대선에 다시 출마했다. 룰라는 기업인 출신 러닝메이트로 재계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 결과 결선에서 61.3%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룰라 1기 정부는 실용 좌파를 표방했다. 일련의 정책으로 경제성장을 이끄는 한편 빈곤층 해소 차원에서 분배 정책도 적절히 구사하며 호응까지 얻었다. 룰라는 이런 정책으로 나중에 ‘보수주의자보다 더 보수적인 뜻밖의 보수’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는 2006년 재선에 성공하며 2기 룰라 정부를 이끌었다. 당시 저소득층 생계비 지원 확대 같은 ‘보우사 파밀리아(가족지원금)’ 정책을 이어갔다. 빈곤에 허덕이던 국민들 사이에서 그는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2010년 임기를 마친 뒤 물러날 당시 지지율이 80%대에 이를 정도였다.

룰라는 2011년 9월 프랑스 파리정치대학으로부터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파리정치대학은 당시 룰라 전 대통령이 8년 집권 기간(2003~2010년) 중 새롭고 다양한 사회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브라질 경제발전을 이끈데다 국제무대에서 브라질의 위상도 높였다고 평가했다. 파리정치대학이 중남미 인사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룰라가 집권한 8년간 브라질은 연평균 4%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는 ‘혁명’으로 평가될 정도였다.

외화보유액은 집권 초기보다 10배 많은 3000억달러에 육박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진 빚도 다 갚아 브라질은 만성 채무국에서 채권국이 됐다. 룰라의 대통령 임기 중 브라질 중산층 비율은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러나 룰라는 퇴임 후 큰 시련을 겪었다. 뇌물수수와 돈세탁 혐의로 2016년 구속된 뒤 이듬해 1심에서 9년 6개월, 2018년 2심에서 12년 1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살이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재판 절차에 흠결이 있다"는 2019년 11월 연방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에 이어 1·2심 선고 모두 아예 무효가 되면서 재기를 위한 발판이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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