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법 개정 토론회 참석하는 이재명 후보. 사진=연합뉴스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영구채(신종자본증권)를 발행해온 기업들이 딜레마에 빠졌다. 영구채 발행으로 부채비율 등 재무지표는 개선되지만, 회계상 자기자본이 늘어나 PBR이 더욱 떨어지는 역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최근 유력 대선 주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PBR(주가순자산비율) 0.1~0.2배에 불과한 상장사들은 빠르게 청산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보니 기업들은 이제 영구채 조달 때도 PBR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영구채, 기업 재무구조 개선의 양날의 검
7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산업계에서는 저평가를 타개하고 재무 건전성을 높이기 위한 자본 확충 수단으로 영구채 발행이 자주 이용되고 있다.
영구채는 만기가 없거나 매우 길어 사실상 만기 없는 채권으로 분류되며, 회계상 자본(Equity)으로 인정되는 특징이 있다.
실제 국제회계기준(IFRS)에서도 상환 의무가 없다는 이유로 영구채를 부채가 아닌 자본으로 간주한다. 재무 압박이 큰 기업들이 차입 대신 영구채로 눈을 돌리는 배경이다.
이러한 영구채 발행은 최근 2~3년 사이 급증하는 추세다.
한국예탁결제원 집계에 따르면 2024년 들어 국내 비금융기업이 발행한 30년 이상 만기의 영구채가 5조원을 넘어, 전년 발행액의 3배에 달하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저PBR의 함정 조심해야
영구채의 긍정적인 효과도 분명하지만 단점도 있다. 그중 하나가 PBR 희석이다.
PBR은 순자산(자기자본)을 시가총액으로 나눈 수치다. 한 기업의 주가(시가총액)가 장부상 순자산 대비 몇 배로 거래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 지표다.
PBR 1배면 회사의 순자산 가치와 시가총액이 같음을 의미하고 1보다 낮으면 자산보다 주가가 저평가되었음을 뜻한다.
최근 이 후보가 문제 삼은 'PBR 0.2배 이하'는, 말 그대로 “회사가 보유한 모든 자산을 매각해 청산할 때 가치의 20%만 시장에서 평가받는다"는 뜻이다.
문제는 영구채 발행으로 자기자본이 증가하면 PBR 계산의 분모가 커지는 효과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영구채로 조달한 자금은 회계상 자본총계에 편입되므로, 기업의 순자산이 그만큼 불어난다. 반면 주가는 단기간에 변함이 없거나, 오히려 증권 발행 소식에 부정적 반응을 보일 경우 하락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PBR은 오히려 낮아지게 된다. 즉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조치가 오히려 시장 평가 지표를 악화시키는 아이러니가 벌어질 수 있다.
한화·롯데 등 '영구채' 부메랑 우려
실제 사례로 한화솔루션을 보면 이러한 PBR 역설이 극명하다.
한화솔루션은 태양광·석유화학 부문의 동반 부진으로 2023년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며 부채비율이 212.1%까지 치솟자, 신용등급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됐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지난해 8월 국내 비금융권 역대 최대 규모인 7000억 원의 영구채를 사모 발행했다.
결과적으로 자본이 확충되며 2023년 말 부채비율은 187% 수준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 결과 2020년만 해도 1.5배를 웃돌던 한화솔루션 PBR은 영구채 발행과 대규모 순손실이 겹친 2023년에 0.8배에서 0.29배로 추락했다. 자본을 2조원 가까이 늘린 대가로 PBR이 3분의 1 수준이 된 셈이다. 장부상 자본이 늘어난 데 비해 시가총액은 제자리였기에 발생한 현상이다.
롯데컬처웍스도 영화관 사업 부진으로 자본잠식 직전까지 몰린 상황을 영구채로 해결했다.
모회사인 롯데쇼핑이 PBR 0.1배에 불과할 정도로 그룹 전체가 저평가된 가운데, 롯데컬처웍스는 코로나19 기간 누적 적자로 2023년 말 자본총계가 300억원 수준까지 떨어지며 부채비율이 무려 3000%를 상회했다.
완전자본잠식을 막기 위해 롯데컬처웍스는 2024년 2월 2000억원 규모 영구채를 발행해 긴급 수혈을 받았다.
하지만, 롯데쇼핑을 비롯한 그룹사의 만성적 저PBR 문제는 해소가 더 어려워졌다.
“미봉책 보다 근본책 만들어야"
영구채는 전통적 부채 대비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되는 장점 덕분에 어려운 시기의 기업들에게 유용한 재무개선 수단이 되어왔다.
그러나 낮은 PBR 상태에서 영구채를 통한 자본 확충은 근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시장평가 지표를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
특히 최근 정치권에서 기업들에게 저PBR 구조 개선에 대한 압박을 높이는 가운데 영구채에 의존한 미봉책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해지고 있다.
한 산업계 관계자는 “결국 핵심은 기업 스스로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여 주가를 올리는 것"이라며 “자기자본 이익률(ROE) 제고, 투명한 거버넌스, 적극적인 주주환원 등을 통해 저PBR 늪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 어느때보다 높아지고 있어 기업들의 전략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