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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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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사이트] 중산층의 조건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3.10.13 07:55

박주영 숭실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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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숭실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수년 전 뉴스에서 회자됐던 한국의 직장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중산층의 기준으로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받는 사람, 30평 이상의 부채 없는 집을 소유한 사람, 2000cc 이상의 중형차를 소유한 사람, 예금액 잔고가 1억 원 이상인 사람, 연 1회 이상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 등 주로 소득이나 재산 등 물질적인 측면만을 따진다.

이에 비해 선진국에서의 중산층의 기준은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프랑스의 퐁피두 전 대통령이 ‘삶의 질’에서 정한 기준은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하는 사람,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하나 이상 있는 사람, 다룰 줄 아는 악기가 하나 이상 있는 사람, 남과 다른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 ‘공분’에, 즉 공의에 의연히 참여하는 사람, 약자를 돕고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사람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은 페어플레이를 하는 사람,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진 사람,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하는 사람, 불의·불평·불법에 의연히 대처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미국 중산층의 교육을 책임지는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기준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자신의 주장에 당당한 사람, 사회적인 약자를 돕는 사람,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는 사람, 10년 이상 정기적인 비평지를 읽어 보는 사람 등 물질적인 가치보다는 정신적인 가치에 방점을 둔다.

미국 명문 시카고대학에서 계층을 다룬 ‘계급(The Class)’이라는 사회학 강좌는 수강 신청이 ‘하늘의 별 따기’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 강좌의 교재내용 중 흥미를 끄는 것은 거실 척도(living room scale)다. 거실의 물건이나 실내장식에 대해 점수를 매겨서 노동자,중산층,상류층 등으로 계급을 측정했다. 1935년에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샤핀(Chapin)이 개발한 이 척도는 당당히 교재 부록에 수록돼 있는데, 오늘날에는 정치적으로 옳지 않아 연구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필자가 1990년대 중반 미국 중서부대학에서 이 책의 거실척도를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매 학기 서베이를 해봤는 데 놀랍게도 응답한 학생들조차 이 척도의 정확성에 탄복했던 기억이 난다. 이 척도에 따르면 거실에 새 카펫이 놓여 있으면 마이너스, 낡은 카펫은 플러스로 점수를 매기는데, 이는 졸부가 실내장식을 호화스럽게 장식한다고 사회계층이 상승하지 않으며 자신의 업적, 능력, 소유물을 지나치게 자랑하는 것을 경계하고 겸손한 것을 장려하는 문화를 반영한다. 힙합 문화의 플렉스, 브래깅과 같은 자랑 문화와는 정반대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이는 겸손한 척하면서 인종차별을 하는 백인 상류층을 비꼬고 일부러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 책꽂이에 책이 가지런히 꽂혀 있기만 하고 바닥이나 테이블 위에 책이 없는 거실은 마이너스다. 오히려 책들이 펼쳐져 있거나 여기저기 놓인 거실이 가점을 받는다. 이것이 주는 메시지는 책은 읽으라고 있는 것이지, 장식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양한 잡지구독도 가점 중 하나인데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해도 의견을 내놓거나 대화에 끼어들 수 있는 교양이 상류층이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실에 재떨이가 없는 것은 마이너스인데, 담배를 피우는 손님이 방문했을 때 배려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 배려를 본받아 필자는 재떨이와 함께 담배와 라이터까지 세트로 딸린 손님 접대용 상자를 학교 연구실 테이블에 놓아두었는데, 점심 식사 후 들려서 담배 한 대 태우고 가는 교수님들이 너무 많아 한 달을 못 버티고 치워버렸던 웃지 못할 추억도 있다. 물론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던 것이 용인되던 오래전 일이다.

요즘 시각으로 볼 때 거실척도는 물질로 계급을 구분한다는 지극히 비윤리적인 발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척도를 통해 계층이나 계급은 물질만능이 아니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특히 도덕과 교양 등의 정신적 가치도 함께 평가돼야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은 실내장식에도 반영된다는 데 시사점이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 들어 중산층의 의미가 점점 더 경제적·물질적 가치에만 쏠리고 있다. 물질주의 사상은 매체가 가속화한다. 한 자동차 광고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고급 자동차로 대답했다는 등의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면 물질만능주의 사상이 팽배하다는 세태를 반영한다. 진정한 사회계층은 이를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한국의 중산층도 물질적 기준을 넘어서 정신적 기준이 반영되는 날이 오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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