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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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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사이트] 공급망 실사 법제화, 서두를 일 아니다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3.09.26 08:54

유정주 한국경제인협회 기업제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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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주 한국경제인협회 기업제도팀장


기업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환경 보호와 인권존중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따라서 기업의 ESG 경영에 반대하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듯이 제대로 된 ESG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을 취할지가 중요하다. 모든 제도의 설계는 비용과 편익의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 매우 정교한 작업이다. 즉 환경과 인권의 보호라는 목적을 동시에 실현하기 위한 적절한 제도의 설계가 중요하다.

최근 국회에 ‘기업의 지속가능경영을 위한 인권환경보호에 관한 법률안’,이른바 ‘공급망 실사법안’이 제출됐다. 공급망 실사는 쉽게 말해 하청기업이 인권, 환경 관련 법규 등을 잘 지키는지를 원청기업이 감시하라는 것이다. 의무를 위반한 원청기업에 대해 5년 이하의 징역까지 부과할 수 있는 강력한 기업규제 법안이다.

국제적으로 공급망 실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아동노동이었다. 나이키의 파키스탄 하청기업이 상품생산을 위해 아동을 고용한 것이 발단이 됐다. 필자가 1998년 프랑스 유학 당시 유명 프랑스 TV에서 나이키의 파키스탄 하청업체가 아동을 동원해 가혹한 노동환경에서 상품을 만드는 자극적인 고발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방송 이후 나이키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자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생산기지를 방글라데시로 옮겼다. 이후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가족 중 유일하게 돈을 벌던 아이들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가족 전체가 생존의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이런 사건이 발생한 이후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기업의 서플라이 체인내 에서 발생하는 인권, 환경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UN, OECD 등에서 가이드라인, 권고 등이 나왔고 프랑스, 독일 등 일부 국가에서는 공급망 실사 법안을 제정했다. EU 차원에서도 지침(directive) 제정 절차를 진행 중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나라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먼저, 공급망 실사를 법률로 제정한 국가는 소수에 불과하다. 유럽국가 중에 프랑스, 독일 등이 있고 일본은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미국은 지난해 6월 위구르강제노동방지법(UFLPA)을 제정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강제노동(노동착취)으로 만든 상품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는 데 이 것은 일견 공급망 실사와 유사한 성격이지만 실제로는 중국 상품의 미국 수입을 막기 위한 ‘중국견제’ 법률의 성격이 짙다.

둘째, 공급망 실사법을 도입한 나라에서는 실효성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2017년 ‘기업경계법’이라는 공급망 실사 법률을 제정한 프랑스는 당시 의회 논의 과정에서 경제계의 반대로 법안이 수차례 부결됐고 결국 상징적인 내용만 남아 사실상 사문화돼 있다. EU 내에서도 공급망실사 지침 제정에 대해 경제계에서는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을 우려해 공급망실사 지침의 도입에 지속 반대하는 등 이해관계자간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셋째, 법률의 실효성 문제다. 나이키 하청공장의 사례에서 보듯이 빈곤과 인권의 문제는 기업이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나이키 하청공장이 아동을 고용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빈곤을 해결할 수 없는 국가의 역량과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기업에게만 빈곤과 인권에 대해 책임을 지울 수 없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제조업 강국이다. 전체 산업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6%로,세계에서 중국(28%) 다음으로 높다. 공급망실사 법률이 시행되면 제조업 생태계 전반에 큰 혼란이 빚어진다. ‘인권과 환경의 보호’라는 전 인류가 공감하는 원칙이라도 법률로 강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국내 산업의 특성과 경제현실을 고려하고 외국의 시행사례를 면밀히 따져보고 우리 현실에 맞는 묘수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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