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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경제칼럼니스트 |
정책 분석가인 미셸 부커는 지난 2008년 미국에서 터진 금융위기를 회색코뿔소에 빗댔다(‘회색코뿔소가 온다’). 누구라도 코뿔소를 보면 덜컥 겁부터 난다. 자리에 주저앉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저건 코뿔소가 아냐"라고 애써 부인한다. 그래봤자 피할 도리는 없다. 부커는 코뿔소를 보고도 못 본 척한 결과가 전대미문의 금융위기였다고 주장한다.
지금 한국 경제에서 회색코뿔소는 뭘까. 한두 마리가 아니지만 가장 덩치가 큰 코뿔소는 바로 저성장이다. 정부는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1.6%에서 1.4%로 낮췄다. 한국은행은 1.4%를 유지하면서도 중국 부동산 부진이 이어질 경우 1.2%까지 떨어질 걸로 내다봤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당초 1.5% 전망치를 1.4%로 낮췄다. 씨티, JP모건 등 대형 투자은행들은 내년에도 성장률이 1%대에 머물 것으로 본다.
한국 경제는 2%를 밑도는 저성장에 익숙하지 않다. 오일쇼크, 외환위기, 금융위기, 코로나위기 등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지난 반세기 우리 경제는 늘 위만 보고 달렸다. 그 덕에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하지만 저성장은 스멀스멀 다가와 우리 옆에 섰다.
돌이켜 보면 경고음은 오래전부터 울렸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해리 덴트는 "한국의 호황과 불황, 부동산, 산업화 주기는 일본을 22년 뒤처져 따라가는 경향이 있고, 실제로 그래왔다"면서 "한국은 2018년 이후 인구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마지막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2018 인구절벽이 온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역대 최저를 경신했다.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2017년부터 감소세로 돌아섰다. 아이 울음소리가 사라진 마을이 번창할 리가 없다.
개인이건 나라건 온통 빚더미에 올랐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0%를 넘어섰다. 주요 20개국(G20) 가운데 호주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미국(74%), 일본(68%)을 앞질렀다. 국가채무는 내년 1196조원으로, GDP 대비 51%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국가채무 비율 자체는 아직 양호한 편이지만 증가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빚에 찌든 경제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
요즘 일본 경제를 보면 부럽다. 올 2분기(4~6월) 실질 GDP 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1.2% 증가했다. 연율로 환산하면 무려 4.8%에 이른다. 일본은 4%대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데 거꾸로 한국은 1%대 저성장의 늪으로 달려가는 꼴이다. 올해 성장률 역전이 일어나면 25년만에 처음이다. 일본 경제를 두고 잃어버린 20년이니 30년이니 하던 말은 옛날 이야기가 됐다. 대신 한국이 바통을 이어받을 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구조개혁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작심 발언을 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저출산과 고령화가 워낙 심하기 때문에 이미 장기 저성장 구조에 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해법으로 노동, 연금, 교육을 포함한 구조개혁을 주문했다. 문제는 ‘구조’를 바꾸는 개혁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이 총재는 "이해당사자 간 사회적 타협이 어려워서 진척이 안 된다"고 탄식했다. 구체적으로 "저출산, 노인 문제를 생각하면 이민, 해외노동자 활용, 임금체계에 대한 논의도 필요한데 진척이 없다"는 것이다.
구조개혁은 뼈를 깎는 작업이다. 그러나 기득권 카르텔은 철옹성처럼 단단하다.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재임 1998~2005년)는 하르츠개혁으로 노동시스템을 바꾸는 데 성공했지만 정권을 잃었다. 만약 구조개혁을 접어둔 채 돈 풀고 금리 내리는 재정·통화 정책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나라가 망가지는 지름길"이라고 이 총재는 말했다.
과연 우리는 구조개혁을 성사시킬 능력이 있는가? 대답은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지금 여야는 상대를 헐뜯느라 여념이 없다. 의회를 지배하는 야당의 대표는 단식 농성 중이고, 대통령 스케줄엔 야당 대표를 만날 일정이 없다. 내년 4·10 총선을 앞두고 정쟁은 더 격화될 게 틀림없다. 타협의 정치는 장기 실종 상태다.
성장률이 1%의 늪에 빠졌지만 아무도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듯하다. 경제가 성숙하면 성장률은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보는 걸까? 그러다 큰코다친다. 남미 여러나라에서 보듯 선진국 문턱에서 미끄러진 사례가 한 둘이 아니다. 장기 저성장은 현실이다. 위기다. 그러나 위기가 닥쳤는데도 위기인 줄 모른다. 이게 더 큰 위기다. 코뿔소한테 엉덩이를 들이받힌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