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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사이트] 영혼 없는 산업안전 정책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3.09.14 08:02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정진우 서울과기대 교수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기업의 안전문화가 조성되려면 규제기관부터 안전문화가 조성돼야 한다’. 안전을 제1로 여기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오래 전부터 강조해 온 말이다. 기업의 안전수준을 높이려면 정부의 인프라 조성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산업안전 인프라 현실은 어떨까. 정부부터 안전에 대한 철학 부재 속에 갈지자 행보를 하고 있다. 이는 조악하고 무분별한 안전규제의 반복 재생산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효성 없는 땜질식의 규제가 넘쳐나는 이유다. 안전 관련 법제가 거의 누더기 수준으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한 지경이 되었다.

정부에 이론적 수원지 역할을 해야 할 안전학계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아이러니하게 우리 사회의 안전부문 중 학계의 존재감이 가장 적다. 무늬만 안전학자인 자들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안전전문가 행세를 하며 알맹이 없거나 허황된 자문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자문내용이 어떠하리라는 건 불을 보듯 훤하다. 안전인프라 조성에 되레 걸림돌이라는 비난을 들을 지경이다.

안전 관련 중요한 인프라 중 하나인 안전자격증·면허도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안전자격증·면허가 실력 향상을 위한 기제로 작용하지 못하고 겉멋 부리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기본서를 학습하지 않고 기출문제 중심의 단편적 지식만 공부해도 너끈히 자격·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렇게 취득한 자격·면허는 스스로 안전전문가가 되었다고 착각하게 하거나 외부에 이들을 안전전문가로 보이게 하는 잘못된 정보를 주고 있다.

시험과목을 보면 점입가경이다. 안전역량과 무관하거나 그 향상을 유도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산업안전지도사의 경우 국제적으로 메가트렌드에 해당하는 과목(안전보건경영시스템)조차 포함돼 있지 않고 안전관리에 필수적인 안전심리 과목도 빠져 있다. 그 대신 안전과 별 무관한 경영학, 산업심리와 같은 과목이 들어 있어 수험생에게 큰 혼란과 시간낭비를 초래하고 있다. 문제는 자격·면허를 관장하는 당국은 왜곡된 현실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조차 없다는 점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으로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안전인력 부족사태가 발생하자 고용노동부는 안전인력을 벽돌 찍어내듯이 초단기간 속성교육으로 배출하고 있다. 시장에 안전은 별거 아니고 아무나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폐해는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가뜩이나 미흡한 안전인력의 전문성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데 정부가 앞장서는 꼴이다.

안전관련 학과가 우후죽순 격으로 생기는 건 중장기적으로 심각한 후과를 낳을 수 있다. 안전의 기초지식도 없는 사람들을 교수진으로 구색만 갖추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겠다는 셈이다. 학생들과 사회를 기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일은 고용부가 한국기술교육대학교를 통해 앞장서고 있다. 안전인프라를 구축해야 할 정부가 안전인프라를 훼손하고 있으니 말문이 막힌다.

우리나라에서 안전 일류기업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건 기업의 잘못도 있지만 정부의 엉성한 인프라와 시스템 부재 탓이 크다. 이는 고비용 저성과의 산업안전대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도 정부는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설익은 산업안전 대책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기조가 계속된다면 앞으로도 우리나라에서 안전 일류기업이 나오는 것은 기대난망이다.

정부에 거창한 정책을 기대하지 않는다. 안전을 망가뜨리는 겉멋만 부리는 정책에서 하루빨리 탈피할 것을 바랄 뿐이다. 보여주기식 대책을 양산하고 이행과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 ‘먹튀 행정’이야말로 산업안전을 수렁에 빠뜨리는 주범이다. 전문가 이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가 산업안전 역사 앞에 책임 있는 자세로 임하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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