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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포스터.쇼박스 |
[권금주 기자의 일달일 영화]
일본 에도시대에 유행한 풍속화 ‘우키요에’에는 거대한 메기가 종종 소재로 쓰입니다. 이는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를 메기·용 등의 동물에 빗대 이름을 붙이는 일본의 재난 신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동물들을 지상세계에 지진을 일으키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러한 사고는 풍속화에 그대로 반영돼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동물들을 잡는 장면으로 그려졌습니다.
이 신화가 시대를 거쳐 영상으로 펼쳐진다면 오늘날 ‘스즈메의 문단속’으로 이어집니다.
3월8일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 앞에서 세계 인류가 보편적으로 맞닥뜨릴 수 있는 상처와 치유의 감정을 자극합니다. 일본 정서에만 국한하지 않는 주제 의식과 명확한 메시지가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되면서 역대 국내 개봉 일본 영화 중 최초로 누적 관객수 5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일본 영화 흥행 1위’ 기록 달성의 배경으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흥미로운 캐릭터 활용법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신카이 감독은 재난 신화 속 메기의 존재를 ‘미미즈’라는 캐릭터로 재탄생시킵니다. 일본말로 지렁이를 뜻하는 이 작은 동물은 재앙의 문을 뚫고 나와 어마어마한 재해를 일으킵니다. 작지만 그가 불러오는 결과만큼은 끔찍하기 때문에 ‘빌런’ 그 자체입니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사는 주인공 스즈메는 이 미미즈가 벌이는 초대형 사고를 막기 위해 일본 전역을 돌며 문을 닫습니다. 영화 제목 속 ‘문단속’의 행위이자 ‘우키요에’ 속 사람들이 메기를 잡는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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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컷.쇼박스 |
영화 속 지진이 휩쓸고 간 자리를 보면 미미즈는 끔찍한 존재입니다. 정체성이 필요가 없음에도 굳이 이름을 붙여 마치 생명이 있는 개체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를 통해 당장 눈에 띄지 않지만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언제라도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 나올 수 있다는 잠재적 위험성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닐까요. 재난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미미즈를 악의 근원으로만 선을 긋지 않습니다. 스즈메가 살아가는 이승의 질서를 어지럽히지만 인간에게 어떤 원한을 품거나 인간의 행동에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서 재앙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섭리대로 흘러가는 자연의 일부일 뿐입니다. 스즈메가 문에 열쇠를 꽂고 문단속을 끝내자 미미즈가 벌을 받는 게 아니라 흙이 되는 장면에서 알 수 있습니다. 미미즈가 돌아가는 푸른 대지는 우리가 나고 자란 자연입니다. 이로써 신카이 감독은 재해가 본래부터 자연 안에서 우리와 함께 있던 존재일 뿐 우리가 극복하거나 대결해야 할 대상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재앙이 물리적으로 초래하는 결과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나약해집니다. 실제로 일본은 태생적으로 재해에 취약한 지리 환경에 처해 늘 크고 작은 지진과 해일 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2011년 3월에는 일본 관측 사상 최대 규모 9.0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해 1만8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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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컷.쇼박스 |
그래서 영화는 재난과의 사투보다 사람에 주목합니다. 스즈메를 내세워 재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사람들, 상실의 아픔을 겪은 채 남은 자들을 비춥니다. 자연을 비난하기보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추스르고 살아가자는 따스한 목소리를 보냅니다. 스즈메가 쓰나미로 엄마를 잃은 어린 자신을 달래는 장면에서 일본인들은 각자가 겪은 ‘2011년 3월 11일’의 하루를 떠올리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또 거기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희망으로 터전을 일구자는 메시지도 전합니다. 의자로 변해버린 남주인공 소타의 ‘더 살고 싶다’, ‘목숨이 덧없는 것을 안다’는 대사와 스즈메가 문단속을 떠날 때 외치는 ‘다녀오겠습니다’에서 일상의 안녕(安寧)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드러납니다. 결국 영화는 불가항력의 자연을 내치기보다 품으면서 공존하는 법을 우리에게 일깨웁니다.
<TMI_재난을 소재로 한 영화>
① 신카이 마코토 ‘너의 이름은.’(2016) : 몸이 뒤바뀐 남녀가 시간여행을 통해 지구에 닥친 대참사를 막아내는 이야기
→ 웨이브·왓챠·티빙·쿠팡플레이
② 야구치 시노부 ‘서바이벌 패밀리’(2018) : 일본 전역이 정전이 되면서 벌어지는 재난 상황 속 가족 이야기
→ 웨이브·왓챠
kjuit@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