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ADEX) 2025 현장에 전시된 K-2PL 전차(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KF-21 보라매 전투기, 천궁, K-9A1 자주곡사포 모형. 사진=박규빈 기자
현재 글로벌 주요국의 국방 획득 거버넌스는 완제품 도입에서 벗어나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유럽연합(EU) 중심의 배타적 안보·경제 블록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에 직면한 대한민국 방위산업은 '가성비와 신속 납기'에 의존하던 초기 수출 모델(K-방산 1.0)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거시적 비즈니스 모델의 전환, 이른바 'K-방산 2.0' 전략을 가동 중이다.
현대 무기체계의 획득 경제학에서 최초 도입 비용(Acquisition Cost)은 전체 수명 주기 비용(Life Cycle Cost)의 30% 수준에 불과하다. 나머지 70%는 30~50년간 이어지는 유지·보수·개량(MRO) 및 부품 조달에서 발생한다. K-방산 2.0의 핵심은 바로 이 '70%의 후속 군수 지원 시장'을 선제적으로 통제하고, 나아가 도입국의 거시 경제와 국방 밸류체인(Value Chain)에 자본과 인프라를 직접 투입하는 데 있다.
이는 수출 실적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도입국의 국방 예산·산업 인프라·전술 교리를 한국의 방산 밸류체인에 구조적으로 종속시키는 강력한 락인(Lock-in, 잠금) 효과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현재 K-방산은 ▲전면적 산업 내재화(현지화) ▲정책 금융 조달(차관) 결합 ▲제도적 규제 우회 등 3대 축을 통해 글로벌 지정학 장벽의 간극을 파고들고 있다.
산업 내재화와 역내 거점화…유럽 역내 보호주의 풀이법
전문가들은 유럽 방산 시장에 견고하게 형성된 EU 역내 방산 기금(SAFE) 연계·고강도 자국 생산 규제(Offset)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한국 방산 기업이 직접 자본을 투입해 비관세 장벽 내부의 '유럽 현지 기업화'를 이루는 방안을 꼽는다. 외부자 한계를 지우고 현지 산업 경제와 완전히 동기화되는 '트로이의 목마' 전술이다.
현대로템이 폴란드 군비청과 체결한 8조8000억 원 규모의 K-2 전차 2차 실행 계약은 이와 같은 패러다임 전환의 교과서적 사례로 꼽힌다. 현대로템은 폴란드 현지 요구 사항을 반영한 'K-2PL' 모델의 생산 라인 구축과 핵심 기술 이전(ToT)을 명문화했다. 또한 폴란드를 거점으로 생산된 물량을 향후 루마니아 등 인접 동유럽 국가들로 '공동 수출'한다는 이익 공유 비전을 선언했다. 이로써 현대로템은 폴란드 방산업계 내 일자리 창출은 물론, 경제적 수출 동력까지 제공함으로써 도입국을 '무기 소비자'에서 한국 방산 생태계의 '공동 투자자'로 격상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루마니아 시장에서도 동일한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 보병 전투 장갑차(IFV) 수주전에서 EU 역내 카르텔에 밀려 고배를 마셨던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최근 K-9 자주포 수주 직후 루마니아 현지에 거점 조립·부품 생산 공장 착공을 서두르고 있다. 이러한 선제적 인프라 투자는 유럽 방위산업 기반(EDTIB) 강화를 명분으로 외부 진입을 막는 EU의 보호주의를 합법적으로 우회하는 핵심 기제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국방 예산이 자국 내 양질의 고용 창출로 환원되기를 바라는 동유럽 국가들의 정치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셈이다.
차세대 무기체계 전환 공백기를 노린다
유럽의 거점화 전략은 역내 전장 환경의 패러다임 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력화 시기의 공백과 맞물려 강력한 시너지를 낸다.
현재 루마니아 육군은 차세대 주력 전차 획득 소요를 제기하며 현대로템의 K-2 전차와 독일 레오파르트 계열을 저울질하고 있다. 이 수주전의 핵심 변수는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해 공동 개발 중인 140mm 주포 등을 탑재한 차세대 지상 전투 체계(MGCS, Main Ground Combat System)의 상용화 시점이다. 당초 기대를 모았던 유럽 자체 차세대 전차 개발이 기술적·정치적 이견으로 2035년 이후로 지연됨에 따라 당장 우크라이나 전쟁의 위협에 직면해 전력 공백을 메워야 하는 동유럽 국가들에게는 5~10년의 안보 공백기가 발생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K-2 전차는 이미 폴란드에서 실전 배치와 현지 양산 인프라가 완비돼 있어 이 지연된 틈을 즉각 파고들 수 있는 전 세계 유일의 최신 3.5세대 플랫폼이다. 서북유럽 전차 대비 지정학적 열세를 기술적 적시성(Time-to-Market)이 마케팅 포인트다.
다만, 유럽 내부의 견제가 심화되고 이 '골든 타임'의 유효 기간이 2~3년 내외로 좁혀질 수 있어 '포괄적 생태계 제안'이 차기 수주전의 승리자를 결정할 전망이다.
신흥국 자본 한계의 돌파구…재정·군수 융합 패키지 제안
초대형 국방 예산 편성에 재무적 유동성 제약이 따르는 동남아시아 및 중남미 등 신흥국 시장에서는 공급자 측의 선제적인 '정책 금융(여신) 지원'이 물리적 성능 제원을 압도하는 수주 결정 변수로 작용한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필리핀 공군과 최대 20대 규모 수출을 두고 논의 중인 차세대 전투기 KF-21 획득 사업은 금융과 MRO가 결합된 '코리아 턴키(Turn-key)' 모델의 시금석이다. 첨단 전투기는 기체 도입 비용보다 30년 간 운용하는 데 드는 비용이 2~3배 더 드는 거대 자본 집약적 플랫폼이다.
한국 측은 단일 플랫폼 공급을 제안하는 경쟁국들과 달리 획득 비용의 최대 70%를 한국수출입은행 주도의 장기 차관으로 제공하는 파격적인 재무 솔루션을 제시했다. 이에 더해 필리핀 영토 내에 KF-21 전용 항공 정비 시설을 구축하고 현지 운용 인력을 직접 양성하는 종합 군수 지원(ILS, Integrated Logistics Support) 패키지를 결합했다. 이는 도입국이 직면한 초기 자본 조달의 한계를 수출국 금융으로 상쇄하고 운용 유지 리스크를 인프라 이식으로 해소해 주는 고도화된 복합 획득 모델이다.
권역별 해양 파이프라인 다변화…폐쇄적 시장의 제도적 우회·가치 사슬 이식
가장 폐쇄적이면서도 거대한 단일 방산 시장인 미국에 대한 접근 방식은 정면 돌파 대신 철저한 '우회 전략'을 취하고 있다. 미국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자국 내에서 건조되지 않은 선박의 조달을 엄격히 제한하는 '존스법'을 유지하고 있어 외부 기업의 신규 함정(Newbuilding) 진입이 차단돼 있다.
이에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연간 200조 원 규모로 추산지만 자국 내 인프라 노후화와 인력 난으로 극심한 적체를 겪고 있는 미 해군 함정 유지·보수·해체 후 재조립(MRO) 시장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한화오션의 필라델피아 조선소 인수에 이어 양사는 2026 회계연도를 앞두고 미 해군 군수지원함 등 정비 사업을 연달아 4건 수주하며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MASGA, 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 내에 안착했다. 이는 까다로운 미 해군의 보안 인가를 통과하고 군수 밸류체인 내 '신뢰 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이고 장기적으로 존스법의 예외 조항이 발동되거나 오커스(AUKUS) 필러 2 등 동맹국 중심의 연합 건조 프로젝트 가동 시 최우선 파트너로 선택받기 위한 전략적 교두보 확보로 풀이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 산업화 마스터플랜 '비전 2030'에 의거, 국방 지출의 50% 이상을 자국 내 조달로 전환하는 현지화(ICV, In-Country Value) 의무 비율을 강제하고 있다. 차세대 3000톤급 잠수함 사업을 공략 중인 한화오션은 요구치를 상회하는 '60% 현지화율' 달성 계획과 함께 조선소 인프라와 수중 방산 전자 생태계 전체를 사우디 방위산업청(GAMI) 산하에 복제해 이식하는 포괄적 인프라 협력안을 제시했다.
중남미의 핵심 거점인 페루에서는 HD현대중공업과 현대로템이 각각 페루 국영 조선소(SIMA)·육군 조병창(FAME)과 함정 공동 개발·K-2 전차 총괄 협약 등을 담은 포괄적 전략 협약을 체결했다. 이는 완제품을 수출하는 '공급자' 위치에서 벗어나 상대국의 중장기 국방 마스터플랜을 기획하는 '설계자'로 격상됐음을 시사한다.
'국가 단위 체계 통합' 거버넌스의 과제
최근 글로벌 국방 획득 사업의 일련의 흐름은 방위산업이 파편화된 기계 공학적 제조업의 영역에서 자본·거시 산업 정책·지정학적 외교가 고도로 얽힌 '초거대 체계 통합 시장'으로 전환됐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국 산업 생태계 내재화 요구와 막대한 국방 예산의 재무적 분산 지원, 30년 수명주기의 군수 조달 안정성 보장이라는 다층적 과제를 단일 기업의 영업력만으로 일괄 타결할 수는 없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따라서 K-방산이 현재의 외형적 팽창을 구조적 지속 가능성으로 전환하고 글로벌 방산 4강(G4)에 안정적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소모적인 내부 출혈 경쟁을 통제해야 한다는 제언도 존재한다.
플랫폼을 건조하는 조선·기갑·항공 체계 업체, 탐지·정밀 타격 무장을 공급하는 방산 전자 업체, 막대한 여신 규모를 통제하는 재정경제부·수출입은행 등 정책 금융 기관, 기술 통제·국방 외교를 전담하는 국방부·방위사업청가 단일한 지휘 체계로 결합된 '국가 단위 체계 통합(National System Integration)' 거버넌스가 시급히 가동돼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이성훈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대규모 방산 수출은 기업 간 경쟁이 아닌 국가 대 국가의 외교·안보 역량이 결집된 G2G 토털 솔루션 사업"이라며 “대통령실 주도의 범정부 컨트롤 타워를 가동해 외교·국방·산업·금융 부처가 단일 창구로 움직이는 '원팀 코리아' 거버넌스를 신속히 제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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