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경제 포토

성철환

cwsung@ekn.kr

성철환기자 기사모음




[EE칼럼] ‘포퓰리즘’ 수렁에 빠진 에너지 요금정책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3.02.02 10:05

박진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2023013101001450000066211

▲박진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역사를 보면, 어떤 국가가 절정의 순간에 갑자기 수렁으로 빠져 드는 사례가 적지 않다. 1980년대 후반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불렸던 일본이 1990년대부터 잃어버린 30년을 보낸 것, 1960년대 세계 최강의 패권국가 미국이 베트남전의 늪에 빠져버린 것, 제2의 프랑크왕국을 갈구했던 유럽연합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상당 기간 경제적 고통을 겪었던 것 등이 가까운 과거의 사례다.

비슷한 사례는 먼 과거에서도 발견된다. 서로마제국의 영토 곳곳에서 야만족들을 몰아내어 최전성기를 구가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동로마제국은 그의 재위 말기에 이르러 국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었고, 막대한 영토의 식민지와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이미 국운이 급격하게 기울고 있었다.

과연 무엇이 이들 나라의 번영과 영광을 부지불식간에 저물게 했는가. 이들 나라에 국운을 기울게 할 정도로 강력한 외세의 침략이 있었나. 아니었다. 과거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동로마 황제의 야심, 종교개혁의 불길 속에서 카톨릭을 수호하려 한 스페인 국왕의 종교적 열망, 전세계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미국 대통령의 이념적 열정, 플라자 합의 이후 엔고불황을 겪게 된 일본 경제를 회복시키고자 했던 일본 대장성 관료들의 경제적 갈망, 양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유럽 경제를 통합해야 한다는 유럽 엘리트들의 평화에 대한 갈구가 진정한 원인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자국을 최정점의 순간으로 드높인 목표가 정작 그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것이다. 냉혹한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어 국가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려는 숭고한 도전은 무모함과 백지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가 종종 간과해 버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이 그런 헛된 도전을 가능하게 했는가. 혹은 무모함을 깨닫게 되었을 때조차 도전을 계속하게 했는가. 그 경제적 수단은 단연코 부채다. 국가가 전쟁이나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황제, 왕 그리고 국가가 대규모 차입을 할 수 있는 신용을 유지하는 이상, 국고가 점점 비어가는 것에 개의치 않고 장기간 전쟁이나 정책을 지속할 수 있다.

하지만, 부채를 영구히 증대시킬 수 있는 무한한 신용을 지닌 존재는 없다. 마침내 진실의 순간이 도래하면, 국가의 번영과 영광이 그저 부채로 쌓아 올린 허상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부채가 그들의 미래를 짓누르고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대의 엘리트들이 국가의 번영과 영광을 추구하는 수단은 전쟁이 아니라 경제다. 고달픈 삶을 지내는 국민들의 경제적 욕구는 언제나 간절하고 또한 공공성은 비용을 사회화하기에, 포퓰리즘 정책은 좌우 정권 모두에게 매혹적이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돈으로 문제를 덮어버리는 포퓰리즘 정책의 필연적 수단은 국가 또는 공기업의 공공부채다. 진실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 국가의 재정적 한계를 뛰어넘는 공공부채 상환 부담은 온전히 미래세대의 몫으로 남는다.

오늘의 물질적 만족을 위해 죄 없는 미래세대의 내일을 담보로 잡는 포퓰리즘 정책은 마약처럼 중독적이고 자기파멸적이다. 불운하게도,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는 강박증에 휩싸인 정치인들과 그들에게 밉보이지 않으려는 정부 엘리트들이 미래세대의 희생을 정치적·정책적 계산에 반영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주체가 없다.

현재 물가안정을 위한 전기요금 인상 억제는 공기업 한전의 전대미문 수준의 사채 발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전의 사채 발행 누적액이 늘어날수록, 그리고 금융시장의 여건이 악화될수록 원리금 상환 부담이 급증할 것이다. 진실의 순간이 도래하면, 이 빚더미들은 미래의 전기소비자들이나 (한전이 추가 기채능력을 잃을 경우) 한전에 대한 정부의 암묵적 보증으로 인해 미래의 납세자들이 갚아야 한다. 막대한 규모의 무위험 고수익을 얻게 될 금융자본가들이야말로 이 정책의 진정한 승자다.

지금 공공부채에 의존한 공공요금 정책이 만연히 시행되고 있는 것은 우리 정부가 포퓰리즘의 수렁에 빠져 들고 있는 징후다. 우리나라의 신용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메말라버려 역사상 최정점에 오른 우리 경제가 수렁에 완전히 빠져버리기 전에 포퓰리즘적 공공요금 정책은 조속히 중단돼야 한다.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