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호정 고려대학교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 |
미국은 실용주의 국가이다. 에너지와 기후변화 정책을 봐도 그렇다. 공화당과 민주당에서 결이 다른 목소리를 내긴 하지만, 결국에는 국익을 위한 방향으로 결정된다.
최근 HFC(수소불화탄소) 감축 전략만 봐도 그렇다. 9월 중순에 미 상원은 HFC 감축을 위한 이른바 키갈리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오존층 파괴물질의 생산과 소비를 금지하는 몬트리올 의정서의 수정안으로서 기존의 CFC(염화불화탄소) 외에 HFC 규제를 포함시킨 버전으로 이해하면 된다.
키갈리 수정안은 2016년 체결되어 2019년 1월에 발효되었지만 그동안 미국 의회에서는 비준되지 않음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번에 69대 27의 압도적인 표 차이로 비준 통과됨으로써 HFC 규제에 대한 미국의 의지를 국제무대에서 강력하게 표시한 것이다.
그럼 어떤 연유로 미국은 방향을 급선회하였을까. 사실 HFC 감축은 이미 미국 국내에서 관련 법규가 제정됨으로써 2037년까지 HFC의 생산을 85%까지 줄여야 하게끔 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2020년 의회에서 제정된 이른 바 ‘AIM(American Innovation & Manufacturing, 미국 혁신·제조)법’이 있다. 이어서 2021년 통합세출예산법에 AIM법이 포함됨으로써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으로 자리잡았다.
AIM법은 델라웨어 주와 루이지애나 주 상원의원이 발의하였는데 이들 주는 듀폰과 같은 여러 화학업체의 홈타운이다. 그리고 듀폰은 CFC를 만든 장본인이자 그 대체물질인 HFC를 제일 먼저 상용화하기도 하였고 그 무렵에 미국은 몬트리올 의정서에 적극 참여하였다. 짐작하듯이 이번 키갈리 수정안 비준을 적극 지지한 인물 역시 델라웨어와 루이지애나 주 상원의원들이었다고 한다.
키갈리 수정안 비준 배경에는 AIM법이 있고, AIM법 제정의 배경에는 이미 기술개발의 성숙단계에 들어선 기업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AIM법은 문자 그대로 미국의 제조업과 기술혁신을 표방하는 법으로서 기후변화나 인류애 등 미사여구와 레토릭 중심이 아닌 매우 실용적인 관점에서 제정되었다.
이산화탄소(CO2)의 지구온난화지수는 1이지만 HFC의 지구온난화지수는 높게는 1만 2000에까지도 이른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HFC 규제를 미국이 본격화하지 않았던 것은 관련 기업의 대체기술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며, 이제는 준비가 되었기에 법규가 마련된 것이다.
또한 미국은 언제나 그렇듯이 기후변화나 환경보호라는 듣기에 좋은 메시지라고 무턱대고 나서지 않는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기술과 산업 경쟁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여 가능한 한 전략적 기다림을 고수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MIT의 로버트 핀다이크 교수는 기후변화 경제학의 대가로서, 그가 반평생 걸쳐 저술한 논문들도 미국의 이러한 전략을 대변하고 있다. 이른 바 기다림의 전략(waiting strategy)으로서 기후변화의 피해 불확실성과 기술개발의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에 우선적으로 기술이 선도적으로 개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혁신을 통해 미래의 기후변화 피해 억제와 기후적응 투자를 확대하게 되고 이는 사회후생 극대화로 연결된다는 주장이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역시 이러한 미국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IRA의 초기 버전인 ‘Build Back Better(더 나은 미국 재건법안)’은 미국의 자본과 기술력, 노동력으로 기후변화에 강건한 인프라와 산업개발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IRA는 에너지발 인플레이션을 계기로 화석연료 분야의 투자까지 포함하여 수정됨으로써 공화당의 협력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기후변화나 환경보호와 더불어 국내 산업 생태계와 기술개발을 함께 도모하겠다는 점에서 AIM법이나 카길 수정안의 비준과 일맥상통한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퍼펙트 스톰의 한 가운데에 있다. 에너지 수급뿐만 아니라 국가장기재정, 인구절벽, 환율 및 외환보유고, 반도체와 철강 등 주력산업에서의 탈탄소 요구, 포스트 세계화와 글로벌 패권경쟁 등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내재화된 기술혁신만이 답이다. 그리고 기술혁신 인센티브를 극대화하는 실용적인 방향으로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