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련소 현장을 둘러보는 생전의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 사진=고려아연 제공
한국 비철 금속 산업의 거목(巨木) 최창걸 명예회장이 별세하자 자원 빈국 대한민국에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신념으로 제련 산업의 기틀을 다지고, '할 수 있다'는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해 고려아연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냈다는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최창걸 명예회장의 역사는 1970년대 국가 경제의 태동기에서 시작됐다. 1973년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하며 울산 온산에 비철금속단지 건설을 추진하자 부친인 최기호 창업주는 이를 국가 경제에 기여할 기회로 판단했다. 당시 미국에서 유학 후 직장 생활을 하던 최 명예회장은 '한국으로 돌아와 일을 도와달라'는 부친의 편지를 받고 1973년 10월 귀국해 온산 제련소 건설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돈도 기술도 부족했던 시절, 그의 최우선 과제는 건설 자금 확보였다. 그는 제련소 건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며 국민투자기금과 산업은행 등 국내 기관은 물론, 세계은행 산하 국제금융공사(IFC)와 접촉해 차관을 도입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치밀함과 협상력이 빛을 발했다. IFC는 당초 건설 자금을 약 7000만달러로 예상했지만, 최 명예회장은 5000만달러에 해낼 수 있다고 설득했다. 또한 IFC가 요구한 '부채 60%, 자기 자본 40%'의 자금 구성비를 협상 끝에 '부채 70%, 자기자본 30%'으로 조정하는 데 성공했다.
비용 절감을 위한 그의 전략은 건설 방식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종합 건설사와의 턴키 계약 대신 구매부터 건설까지 직접 수행하며 단종 면허를 가진 토목공사 업체들과 건별로 계약하는 방식으로 공사비를 획기적으로 줄였다. 그 결과 고려아연은 IFC의 전망치보다 훨씬 적은 4500만 달러로 온산 제련소를 성공적으로 건립하는 '온산 신화'를 썼다.
최 명예회장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선제적으로 투자하며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실천적 기업가 정신'의 소유자였다. 1980년부터 1992년까지 사장과 부회장으로 재임하며 기술 연구소를 설립하고 생산 시설 확장에 힘썼다.
그의 기업가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난 사례는 1980년대 후반 연 제련 사업 진출이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세계적으로 쓰이던 기존 공법은 환경 문제가 대두되고 있어 새로운 공법으로의 전환이 필요했다"며 “당시 개발된 신공법들이 상업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과감하게 도입하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과감한 결단과 기술 개발에 대한 집중은 고려아연만의 독보적인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고려아연은 세계 최초로 아연·연·동 제련 통합 공정을 구현하고, DRS 공법을 국내외를 통틀어 처음으로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최 명예회장의 사업 보국 원칙과 기업가 정신을 자양분 삼아 고려아연은 1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외국 제련소들을 뛰어넘어 국가 기간 산업의 대표 주자이자 글로벌 공급망의 중추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