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은 가운데, 미국 관세협상 등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일 간 '경제안보 협력'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 불안, AI 데이터센터 확산에 따른 에너지 수요 폭증, 대만 유사시(有事) 가능성 등 복합적 요인이 겹치면서, 에너지 분야가 한일 협력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달 25일과 26일 한국언론진흥재단과 유라시아정책연구원 일본연구센터가 주관한 일본 여야 중의원 간담회를 통해 일본 여야 정치권에서도 양국 간 LNG프로젝트 협력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에너지 자원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므로, 화석 연료 공급 불안정, 원전 가동 중단등은 국가의 존립과 직결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일본 여야 정치권은 에너지안보에 대해서는 비교적 같은 입장을 유지하는 모양새다.

▲나가시마 아키히사 자민당 중의원(왼쪽)과 마에하라 세이지 일본유신회 중의원이 지난달 25일과 26일 한국 취재진과 현안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전지성 기자
일본 도쿄 국회의원 회관에서 만난 나가시마 아키히사 자민당 중의원(8선, 일한의원연맹 간사장)은 “중동이나 중국과 대만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한국과 일본으로 향하는 LNG 수입이 중단이 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아시아 에너지 공급망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며 "이를 대비한 한일 간 공동협력은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일 양국이 LNG 비축 및 공급선 다변화에서 협력할 필요가 있다"며 "최근 언급되는 북미 서해안 해상운송로를 통한 LNG수급 확보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가시마 의원은 이시바 전 총리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을 정도로 한일은 물론 일본의 에너지안보, 군사안보 분야 전문가다.
일본유신회 소속 마에하라 세이지 중의원(11선, 전 외무대신) 또한 “양국 간 LNG협력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최근 워싱턴에 다녀와서 알래스카 LNG에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됐다. 한일이 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게 현실적 대안이라고 생각한다"며 “한국과 '대미 압박 공동 저지'를 추진하기보다는, 일본의 '에너지 안보 및 국익 극대화' 차원에서 한국과 알래스카 LNG 관련 정보 공유와 실무적 협력을 추진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마에하라 의원은 일본 정치권 내에서도 보수적 외교·안보 정책을 주도해 온 인물로 평가된다. 따라서 그의 에너지 관련 입장은 단순한 경제 논리가 아닌 국가 안보라는 큰 틀에서 해석된다. 마에하라 의원의 에너지 안보에 대한 언급은 '원전의 안전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면서도 '에너지 안정 공급'이라는 목표도 달성해야 한다는 신중론에 기반하고 있다.
대만 유사시 LNG 공급망 위기…한일 '공동 대응' 필요성 부상
실제 한일 양국의 에너지 안보는 대만해협의 지정학적 리스크와 직결돼 있다. 일본과 한국은 모두 LNG(액화천연가스) 수입 의존도가 높은 나라로, 특히 한국은 전체 천연가스의 70% 이상, 일본은 약 9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LNG는 양국 발전 부문과 산업 부문 모두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단기간에 대체할 현실적 수단이 제한적이다.
이 때문에 중국의 대만 침공 등 유사시, LNG 해상 수송로가 차단되면 일본과 한국 모두 에너지 안보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한국 에너지정책 전문가도 “양국 모두 동일한 해상 루트를 통해 LNG를 들여오기 때문에, 공급망 충격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며 “공동 비축, 운송·터미널 공동 활용, 공급선 정보 공유 같은 실질적 협력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한일 에너지안보 협력'의 시험대
최근 한일 간 경제안보 협력의 대표적 사례로 주목받는 것이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미국 알래스카에서 생산되는 LNG를 액화 후, LNG 운반선을 통해 아시아로 공급하는 대규모 에너지 사업으로, 대만해협을 우회하는 북극항로 활용 가능성이 포함돼 있어 지정학적 리스크 회피 수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한미 관세협상 결과 한국은 향후 수년간 알래스카산 LNG 수입을 포함한 1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 수입 확대를 약속했다. 일본 역시 에너지 공급선 다변화 전략 차원에서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한일 공동참여 혹은 역할분담 방식의 협력 모델이 논의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은 “알래스카 LNG는 한미일 3각 에너지 안보 협력의 중요한 교차점"이라며 “한국과 일본이 협력한다면 수송로 다변화, 공급 안정성 제고, 가격 협상력 측면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AI시대 전력수요 급증…LNG, 에너지는 한일 경제안보 협력의 전략적 교집합
한일 에너지 안보 협력의 필요성은 AI·데이터센터 산업의 급성장으로 더욱 강화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AI 데이터센터의 전력수요 폭증에 대응해 LNG 복합발전 확대와 가스터빈 신설이 붐을 이루고 있다. 한국과 일본 역시 향후 데이터센터 수요 급증이 예상되면서, 단기적 전력공급 확대 수단으로 LNG 발전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일본은 최근 전력 공급 불안과 재생에너지 간헐성 문제로 LNG 발전소의 역할을 재평가하고 있으며, 한국도 AI 인프라 확대와 함께 발전소·터미널 확충이 논의되고 있다.
한 일본 에너지 전문가는 “AI 인프라와 LNG는 앞으로 최소 10~15년간 병행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양국이 LNG 확보와 발전 인프라 확충에서 경쟁이 아닌 협력 전략을 취할 때 안정성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에너지가 한일 경제안보 협력의 전략적 교집합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양국은 모두 제조업 중심의 에너지 집약적 경제구조를 갖고 있고,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으며, 지정학적 공급망 리스크에도 공통적으로 노출돼 있다. 여기에 AI와 반도체, 배터리 등 전략산업 전력수요 확대가 겹치면서, LNG를 중심으로 한 안정적 에너지 협력이 공동 생존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에너지안보 전문가 전지성 기자는 “한일 양국이 LNG 협력을 제도화할 경우, 공급망 충격 대응력과 에너지 수급 안정성이 동시에 강화될 수 있다"며 “이 과정에서 한미일 3국 간의 경제안보 전략도 보다 정교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60주년, 전략적 협력 체제로...에너지·경제안보 분야는 이념과 정권 변화와 무관"
한일 관계는 올해로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았지만, 과거사와 영토 문제, 정치 일정 등 여전히 복잡한 현안이 산적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경제안보 분야는 이념과 정권 변화에 상대적으로 덜 흔들리는 '협력의 현실적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외교가 관계자는 “한일 간 LNG 협력은 감정과 역사 문제를 떠나 실질적으로 양국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주제"라며 “정상 교체기라는 정치적 변곡점에 이런 협력 의제를 구체화할 수 있다면, 향후 10년간 양국 관계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버팀목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