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경제신문 전지성 기자] 한국전력공사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연료 가격 인상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전기요금을 적절한 시기에 충분히 인상하지 않아 대규모 적자를 봤다"고 보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20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한전은 최근 SEC에 이같은 내용을 담은 연차보고서를 제출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미국 증권업무를 감독하는 최고 기구로 투자자보호 및 증권거래의 공정성확보를 주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단순한 행정기관에 그치지 않고 연방증권법을 시행하기 위한 제규칙을 제정하고 심의, 의결하는 준사법적 권한을 갖는다.
주요업무는 ①기업내용 공시의 철저한 이행 ② 대주주의 주식취득 조사 ③ 거래원 등록 및 자격 취소 ④ 상장증권의 등록 ⑤ 공익성이 강한 전기, 가스 사업에 대한 규제 등 광범위하다.
이 보고서(영문본 102쪽)에서 한전은 "2018년과 2019년 상반기 사이와 2021년과 2022년 사이의 순손실은 연료비의 지속적인 상승으로 인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전기요금 인상은 시기적절하지도 못했고 연료비 상승분을 충분히 상쇄하지도 않았다"고 명시했다.
미국 주식시장 나스닥에 상장된 한전이 이처럼 미국 SEC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우리 정부의 전기요금 억제를 누적규모 45조원에 이르는 한전 적자의 주요 원인으로 공식 거론하면서 그 파장이 적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나스닥의 한전 주주들이 손실을 볼 경우 한전의 이같은 보고를 근거로 한전이나 우리 정부에 배상 청구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2의 엘리엇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최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에 1300억원 넘는 돈을 지급하라는 국제투자분쟁(ISDS) 판정을 받았다. 엘리엇은 2015년 삼성그룹 오너 일가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 과정에서 청와대,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에 찬성투표를 하도록 압력을 행사해 손해를 봤다며 2018년 7월 ISDS를 제기했다.
SEC는 한전의 주가가 2016년 이후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자 2019년 한전에 서한을 보내 전기요금 개편 관련 자료 제출과 공시를 요구한 바 있다.
한전은 지난 2021년에도 이 보고서에서 "2018년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연료비의 지속적인 증가는 적절한 시기에 충분한 전기요금 인상으로 상쇄되지 못했다"며 "이 또한 당사의 이윤과 재정상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나스닥에 상장된 한전의 주가는 이날 기준 7.89달러로 2016년 8월 5일 최고치였던 27.46달러의 30% 수준이다.
한전은 이번 보고서에서 "발전, 송·변전, 배전설비 특성상 많은 투자비가 소요되며, 한전의 영업실적은 국내 전력수요, 전기요금, 연료비, 환율 등 가변요인의 영향을 받는다"며 "연료 가격이 급등한다면 회사 운영과 수익성에 부정적인 영향. 환경 관련 정책 및 규제 이행에 대한 비용이 크게 증가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우려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때때로 전기요금을 인상한다. 그러나 이는 연료 비용 상승에 따른 악영향을 완전히 상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며 "요금 인상은 일반적으로 긴 공개 심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 지연이 발생하고 결과적으로 운영 및 현금 흐름의 결과가 저하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한전은 물론 에너지업계에서는 지난 정부에서 전기요금 인상 요인에도 불구하고 내내 인상을 하지 않은데 이어 정권 교체 이후에도 당정이 요금 인상을 차일피일 미루는 등 부작용이 커지고 있는 만큼 독립적인 에너지규제기관 설립을 촉구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전임 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전·에너지전환 정책이 에너지위기를 불러왔다고 비판하면서 국정과제에 ‘전력시장, 요금 및 규제 거버넌스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하고 경쟁과 시장원칙에 기반한 전력시장 구축’을 명시했다.
전기요금 및 규제 거버넌스 관련 현재 마무리 단계인 정부 용역 안에는 산업통상자원부나 총리실 산하에 에너지규제위원회를 설치하고 산하에 에너지정책국 등 사무국을 설치해 요금과 전력거래제도 개편을 총괄하고 금융감독원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전력시장감독원을 설치해 계통감시와 고장조사 등을 담당하는 방안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전기요금은 소매를 독점하는 한전도, 한전을 감독하는 산업부도 아닌, 공공요금을 통제하는 기획재정부와 대통령실, 집권당이 사실상 결정해왔다.
에너지업계는 지난 수년간 ‘에너지와 정치의 분리’를 요구해왔으며 정권 교체 후 국정과제에도 이같은 내용이 포함되며 기대감이 높았다.
그러나 1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보면 오히려 후퇴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정이 여전히 전기·가스요금 인상을 결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3분기에도 인상이 필요했지만 무산됐고 공기업에 지난해부터 해오고 있는 자구노력을 재차 요구하는데 그쳤다. 정치권과 산업계 모두 내년 총선을 고려한 정치적 결정이란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전도 이 보고서에 "요금책정 등에 정부의 규제를 받으며 전기사업법과 물가안정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전기요금은 당사에 적정원가를 보상하고 적정 투자보수를 보장하는 수준에서 결정된다"면서도 "다만 때로 전기요금 조정에는 시차가 발생하며, 정부의 입장에서 물가상승과 같은 기타 고려사항이 존재해 기대수준에 부합하는 요금조정이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고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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