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에너지경제신문DB) |
[에너지경제신문=나유라 기자] 정부가 단기자금시장 경색에 대응하기 위해 50조원 이상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긴급 발표하면서 시장도 모처럼 안도하는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레고랜드 사태가 자금시장 경색을 심화시킨 상황에서 정부가 지자체의 재확약을 이끌어내는 등 시장 예상보다 큰 규모의 지원책이 나온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정부와 금융당국이 현재의 자금시장 경색 국면을 엄중하게 보고 있고, 이에 적극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줌에 따라 단기적인 시장 안정을 기대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자금시장 경색의 근본적인 원인인 금리 인상, 부동산 경기 침체 등의 요인들이 상존하는 만큼 한국은행의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 재가동 등 추가 대책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난주까지 패닉상태에 빠졌던 채권시장은 정부 발표 직후 다소 진정국면을 보였다. 24일 채권시장에서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전 거래일 대비 19bp 내린 연 4.305%에 마감했다. 10년물 금리도 12.9bp 내린 4.503%를 기록했다. 5년물과 2년물 역시 14.7bp, 16.1bp 내린 4.491%, 4.324%를 나타냈다. 91일물 양도성예금증서(CD)와 기업어음(CP) 금리만 전 거래일 대비 2bp, 12bp 오른 3.92%, 4.37%에 각각 마감했다.
![]() |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3일 오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비상 거시경제 금융회의를 마친 뒤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 |
전날 정부가 최근의 회사채 시장, 단기 금융시장의 불안심리 확산과 유동성 위축을 방지하기 위해 기존 시장안정조치에 더해 ‘50조원+α 규모’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하겠다고 발표한 점이 시장에 안도감을 심어준 것으로 해석된다.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은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 20조원, 회사채 및 기업어음(CP) 매입 프로그램 16조원, 유동성 부족 증권사 지원 3조원, 주택도시보증공사(HUG)·주택금융공사 사업자 보증지원 10조원 등으로 구성됐다. 이 중 채안펀드는 이날(24일)부터 시공사 보증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등 회사채, CP 매입을 재개한다.
정부는 캐피탈콜(펀드 자금 요청)은 다음달 초부터 본격적으로 집행하고 필요시 추가 조성을 추진할 방침이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자금시장 경색이 상당히 심각한 상황에서 정부가 ‘50조원+α’라는 상당히 큰 규모의 대책을 내놨다"며 "이번 대책은 시장 유동성 경색 완화에 유의적인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대호 KB증권 연구원은 "이전 지원책은 코로나19 당시 존재한 지원 프로세스를 살려 연장하는 조치로, 공급 대상이 금융권을 제외한 비금융권 위주로 설정됨에 따라 시장의 우려를 잠재우는데 부족했다"며 "그러나 이번 지원책은 이전 조치보다 자금 회전이 이뤄지지 않는 부분에서 직접적인 공급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낼 것"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최근 레고랜드 사업 주체인 강원도가 ABCP에 대한 보증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고 발표함에 따라 지방자치단체가 보증한 유동화 증권에 대한 불신이 커진 가운데 정부가 지자체 보증 ABCP에 대해서는 모든 지자체가 지급보증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겠다고 거듭 공언한 점도 시장 안정에 기여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정부의 해당 발언은 강원도의 보증 의무 이행 거부에서 시작된 지자체 지급보증 의무에 대한 우려를 잠재우기에 충분했다"며 "일단 시장에 안도감을 조성한 것만으로도 긍정적"이라고 설명했다. 공동락 대신증권 연구원은 "자금경색의 직접적인 트리거로 작용한 레고랜드 사태를 겨냥해 지자체의 재확약을 이끌어낸 것은 정당별 분포가 다양한 지방정부들의 의견 조율을 유도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 |
▲서울 여의도 증권가.(사진=에너지경제신문DB) |
다만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글로벌 유동성 축소 기조가 지속되고 있어 근본적인 유동성 경색 해소에는 한계가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시장에 부담을 주지 않고 지금시장 지원을 위한 재원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한은의 SPV 재가동, 대출적격담보증권에 은행채 포함 등의 조치가 필수적이라는 평가다.
은행권은 한은으로부터 대출할 때 국채, 통화안정화증권, 정부보증채 등 국공채만을 담보로 제공한다. 만일 적격담보증권에 은행채가 포함될 경우 은행 입장에서는 이미 보유한 은행채를 대출 담보로 이용해 한은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 자금시장 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 김지나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미 자금 부족으로 채권을 발행 중인 은행들이 채안펀드 캐피탈 콜에 응할 자금 여력이 충분치 않을 수 있다"며 "역으로 캐피탈 콜에 응하기 위해 은행채 발행을 지속한다면 시장 안정화 조치 효과는 떨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금융위는 최근 은행 통합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제 비율 정상화 조치를 6개월 유예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은행권에서는 유동성 부족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LCR은 향후 30일간 예상되는 순 현금 유출액 대비 고(高)유동성 자산의 비율이다.
당국은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은행의 통합 LCR을 기존 100%에서 85%를 인하하는 조치를 가동했으며, 지난 7월부터 단계적 정상화에 돌입했다. 금융위는 당초 오는 12월 말까지 은행 통합 PCR 규제 비율을 92.5%로 하기로 했지만, 이를 6개월 연장해 내년 6월 말까지 92.5%를 유지하기로 했다. 만일 LCR 규제를 정상화하면 은행은 보유 자산 중 국채 비중을 높여야 해 은행채를 대거 발행할 수밖에 없다. 당국이 LCR 규제 비율 정상화 조치를 유예한 것은 은행채가 시중 자금을 흡수하면서 단기 자금시장의 변동성 및 불확실성 확대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또 다른 관계자는 "LCR 규제비율 정상화 조치가 6개월 연장됐지만, 아무래도 은행권 입장에서는 미래 시장 상황에 대비해 선제적으로 LCR 비율을 적정 수준에서 유지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며 "여신전문금융회사 등 다른 금융권에 비해서는 PF 대출 비중이 적어 유동성 측면에서 다소 여유가 있는 건 사실이나 은행들 역시 긴장감을 갖고 시장 상황에 보수적으로 대응하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ys106@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