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경제 포토

전지성

jjs@ekn.kr

전지성기자 기사모음




이재용은 무죄인데 국가는 1530억 부담…‘삼성 합병’ 끝나지 않은 책임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6.10.02 14:09

환송중재도 청와대·복지부 개입과 엘리엇 손실 간 인과관계 인정
국민연금, 이재용·삼성물산 등에 손배소…무죄 넘어 민사책임 공방

1

▲그래픽=전지성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지만, 합병을 둘러싼 국가의 배상 책임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형사재판이 이 회장의 불법행위와 고의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결론이라면, 국제투자분쟁은 청와대와 보건복지부의 개입으로 외국인 투자자가 손해를 입었는지를 판단한 결과다.


하나의 합병을 두고 이 회장은 형사책임에서 벗어난 반면 국가는 원금과 이자·소송비용을 합쳐 약 1530억원을 부담하게 된 것이다. 국민연금공단이 이 회장과 삼성물산 등을 상대로 별도의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이라는 점에서 2015년 합병의 책임 공방은 형사재판에서 민사·재정 책임으로 무대를 옮기고 있다.


2일 법조계와 재계에 따르면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환송중재판정부는 한국 정부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하도록 개입한 행위와 당시 삼성물산 주주였던 엘리엇의 손실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판정부가 인정한 배상 원금은 종전 판정과 같은 4849만달러, 약 660억원이다. 여기에 연 복리 5%의 지연이자와 법률비용 등이 붙으면서 정부가 부담할 금액은 약 1억1300만달러, 한화 1530억원대로 늘어났다.


◇ 국민연금은 국가기관 아니라지만…정부 개입만으로도 인과관계 인정


이번 판정은 정부가 지난 2월 영국 법원에서 기존 중재판정을 일부 취소한 뒤 나온 결과다.


영국 법원은 국민연금 자체를 한미 자유무역협정상 국가기관으로 볼 수 없다며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다만 국민연금을 제외하고도 당시 청와대와 보건복지부의 개입만으로 합병 성사와 엘리엇의 손실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하는지는 중재판정부가 다시 판단해야 한다며 사건을 돌려보냈다.


환송중재의 핵심은 정부 개입이 없었더라도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했을 것인지였다. 정부는 외국인 주주 중에도 합병 찬성표를 던진 투자자가 있었고, 국민연금 역시 독자적인 투자 판단에 따라 찬성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판정부는 국민연금의 의결권이 합병 성사를 결정한 '캐스팅보트'였다고 판단했다. 정부 개입이 없더라도 합병이 가결될 상황이었다면 고위 공직자가 형사책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에 관여할 이유가 없었다는 논리도 제시했다. 국민연금은 국가기관이 아니지만, 국민연금의 표결에 영향을 미친 청와대와 복지부의 행위는 국가 책임으로 귀속된다고 본 것이다.


이 회장의 형사재판 결과와 이번 중재판정을 곧바로 모순된 결론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 회장은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와 업무상 배임,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처리 관련 혐의 등으로 기소됐지만 지난해 7월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형사재판에서는 검찰이 이 회장의 구체적인 위법행위와 고의를 합리적 의심 없이 입증했는지가 판단 기준이었다.




반면 ISDS는 이 회장의 범죄 성립 여부가 아니라 정부의 조치가 한미 FTA상 투자자 보호 의무를 위반했고, 그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는지를 따진 절차다. 당사자와 책임 주체, 입증 기준이 모두 다르다. 이 회장의 무죄가 정부 개입 사실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정부의 배상 책임이 곧 이 회장의 민·형사 책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연금에 합병 찬성을 압박한 혐의로,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합병 시너지 효과를 부풀려 투자위원회의 찬성을 유도한 혐의로 각각 징역 2년6개월의 유죄가 확정됐다.


◇ 혈세로 배상한 뒤 누구에게 책임 묻나…국민연금 민사소송 주목


재계와 법조계의 관심은 이제 국민연금이 이 회장과 삼성물산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으로 옮겨가고 있다.


국민연금은 2024년 9월 삼성물산 법인과 이 회장,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 전직 삼성물산 대표들, 문 전 장관과 홍 전 본부장 등을 상대로 5억여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국민연금은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삼성물산에 불리한 합병 비율이 적용됐고, 정부의 외압으로 합병에 찬성하면서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한다. 삼성 측은 합병 과정에서 위법행위가 없었고 주주에게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청구금액은 현재 5억여원에 불과하지만, 법조계에서는 먼저 책임의 존재를 확인한 뒤 손해액을 확대하는 일부청구 성격일 가능성도 거론된다. 재판부 역시 국민연금에 피고별 책임 구조와 손해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리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번 환송중재판정은 국민연금 민사소송에서 참고 자료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중재판정부가 청와대와 복지부의 개입, 국민연금 표결의 결정적 역할, 합병 성사와 투자자 손실 사이의 인과관계를 다시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국제중재판정이 국내 민사법원을 직접 구속하지는 않는다. 이 회장과 삼성 관계자들이 정부 개입에 어떤 방식으로 관여했는지, 국민연금에 실제 손해가 발생했는지, 피고별 행위와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는 민사재판에서 별도로 입증돼야 한다. 이 회장의 형사 무죄 확정은 삼성 측에 유리한 사정이지만, 형사판결만으로 민사책임까지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배상금을 지급한 뒤 관련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할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구상권을 청구하려면 개별 당사자의 고의·과실과 국가가 부담한 손해 사이의 법적 인과관계, 소멸시효 등을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 정부는 판정문을 분석해 정정·추가판정 신청이나 영국 중재법상 취소 사유가 있는지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이 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당장 다시 형사 문제로 번질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이번 판정은 삼성 지배구조의 출발점이 된 2015년 합병을 둘러싼 논란이 형사 무죄만으로 모두 해소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며 “앞으로의 쟁점은 이 회장의 형사책임을 다시 따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의 개입으로 발생한 비용과 국민연금의 손실을 누구에게 어느 범위까지 부담시킬 것인지가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