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전지성 기자
정부가 추진한 노동권 강화 정책이 집값 안정이라는 부동산 정책을 막는 모양새다. 정부가 가계대출을 조이는 사이 주요 대기업 노사는 임직원의 주택 구입을 위한 사내대출을 확대하고 있어서다.
3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이달부터 무주택 임직원에게 주택 구입자금을 최대 5억원까지 빌려주는 주거안정 지원제도를 시행한다. 금리는 연 1.5%이며 3년 거치 후 10년 동안 원리금을 나눠 갚는 방식이다. 주택 임차자금은 최대 3억원까지 지원한다.
대상은 가격 25억원 이하의 주택이다. 수도권과 광역시는 전용면적 85㎡ 이하로 제한된다. 현재 주택을 보유한 직원도 기존 주택을 매도하는 날 새 주택을 매수하는 '갈아타기'라면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사내 부부는 한 건만 이용할 수 있다.
이 제도는 지난 5월27일 삼성전자 노사가 체결한 임금협약에 포함됐다. 잠정합의안은 조합원 투표에서 73.7%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평균 임금 인상과 반도체 사업부 특별경영성과급뿐 아니라 주거안정 대출까지 노사 교섭 테이블에서 함께 결정된 것이다.
삼성전자가 직접 자금을 빌려주고 근저당을 설정하기 때문에 은행권 대출에 적용되는 DSR 규제는 직접 적용되지 않는다. 중도상환수수료도 없다. 정부가 은행을 통해 주택 구매자금을 통제하는 동안 노사 합의가 금융권 밖에서 직원의 구매력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주택 공급 확대와 투기 수요 억제를 강조하면서, 정책 추진과 고금리·대출 연체 증가가 맞물려 집값이 급락할 가능성에 대비해 일정 기준 이하의 주택을 공공이 매입하는 시스템을 준비하라고 주문했다. 정부는 집값 상승을 억제하는 동시에 급락에도 대비하고 있지만 대기업 노사는 직원의 주택 구매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호황에 따른 성과급까지 더해지면 기업발 주택 구매력은 더욱 커질 수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은 통상 12월 하반기 목표달성장려금(TAI)을 지급하고, 이듬해 초에는 초과이익성과급(OPI)을 지급한다. 올해 임금협약을 통해 DS부문 특별경영성과급도 신설했다.
성과급은 주택 계약금과 잔금 등 자기자금으로, 사내대출은 은행 대출로 채우지 못한 부족분으로 활용될 수 있다. 성과급과 저금리 사내대출이 동시에 집행되면 직원 개인의 주택 구매 여력은 은행 대출만 이용하는 일반 직장인보다 크게 높아진다.
SK하이닉스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회사는 기존에 다자녀 직원에게 적용하던 최대 2억원 규모의 주택대출 대상을 기혼 직원 전체로 확대하는 방안을 노사 합의안에 포함했다. 다만 전임직 노조가 잠정합의안을 25표 차로 부결해 해당 기준이 변경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SK하이닉스의 초과이익분배금(PS) 개편도 재협상 대상이다. 기술사무직 노조는 잠정합의안을 가결했지만 전임직 노조는 부결했다. 성과급의 현금·즉시 매도 가능 주식·이연 주식 비율도 확정되지 않은 만큼 예상 성과급 전액이 곧바로 주택시장에 풀린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재계가 주목하는 대목은 삼성전자의 최대 5억원·연 1.5% 조건이 다른 대기업 노조의 새로운 비교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 업계에서 시작된 주거복지 경쟁이 자동차·배터리·정보기술 기업으로 번지면 향후 임금·단체협약에서 사내대출 한도 확대와 금리 인하 요구가 잇따를 가능성이 있다.
기업에도 사내대출은 활용도가 높은 보상 수단이다. 임금을 일률적으로 인상하는 것과 달리 무주택자 등으로 지원 대상을 한정할 수 있고, 직원에게 빌려준 원금도 돌려받을 수 있다. 장기 상환 조건과 퇴직 시 상환 의무를 통해 핵심 인력의 장기근속을 유도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반면 대기업 안팎의 주거 격차는 확대될 수 있다. 같은 소득과 자산을 보유해도 대기업 직원은 규제 밖의 저금리 자금을 이용할 수 있지만 중소기업 직원과 자영업자에게는 같은 선택지가 없다. 정부가 노사 자율교섭을 존중할수록 기업별 지급 능력에 따른 복지 격차가 커지는 또 다른 역설이다.
사내대출을 정부가 직접 제한하는 것도 쉽지 않다. 노사가 자율적으로 합의한 복지제도를 규제하면 기업 경영과 단체교섭에 과도하게 개입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반대로 대출 규모가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을 방치하면 정부의 가계부채 관리와 은행권 대출 규제의 형평성이 흔들릴 수 있다.
일부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예상 성과급과 사내대출을 합쳐 수십조원의 자금이 부동산시장에 유입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이는 임직원 상당수가 대출 한도를 모두 사용하고 성과급도 주택 구입에 투입한다는 가정에 따른 이론적 최대치다. 실제 영향은 신청 인원과 승인·집행액, 성과급의 현금 지급액과 주택 매입 비율을 확인해야 판단할 수 있다.
정부가 노동권과 노사 자율교섭을 강화하면서 나온 복지 확대가 금융·부동산 정책에서는 새로운 관리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성과급 경쟁에 이어 주택대출 경쟁까지 본격화하면 기업의 보상 정책은 개별 임직원의 처우를 넘어 가계부채와 지역 주택 수요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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