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카이치 사나애 일본 신임 총리(사진=AP/연합)
일본 집권 자민당 다카이치 사나애 총재가 21일 일본 사상 첫 여성 총리로 선출됐다. 남성의 정치 참여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일본 사회에서 최초의 여성이자 보기 드문 비세습 정치인이 총리직에 오른 것이다.
블룸버그통신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다카이치 총재는 이날 오후 임시국회 중의원(하원) 본회의에서 진행된 총리 지명선거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에 성공해 제104대 총리로 선출됐다.
다카이치 총재는 전체 465표 중 237표를 얻어 과반인 232석을 넘어섰다. 자민당, 새로운 연정 상대인 제2야당 일본유신회, 일부 무소속 의원이 다카이치 총재에게 투표한 것으로 보인다. 중의원에서 자민당 의석수는 196석, 유신회는 35석이다.
총리 지명선거는 참의원(상원)에서도 별도로 실시되지만, 결과가 다를 경우 중의원 투표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다카이치 총재가 사실상 총리 취임을 확정지은 셈이다.
블룸버그는 이날 투표 결과를 두고 “남성 중심의 일본 사화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며 여성들도 유리천장을 돌파해 중요한 위치에 오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며 “이와 동시에 일본에서 우향우 바람이 불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중의원 10선 의원으로 경제안보담당상, 총무상, 자민당 정무조사회장 등을 지냈다. 일본 정계에서는 드문 비세습 여성 정치인으로 유리 천장을 깨며 강경 보수 성향 정치인으로 입지를 다져 왔다.
그는 지난 4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며 당권을 잡았으나, 26년간 이어진 자민당과 공명당의 연정이 붕괴해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강경 보수 성향 제2야당인 일본유신회를 새로운 연정 상대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해 우여곡절 끝에 총리직에 올랐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21일 중의원(하원) 총리 지명선거 결과 발표 이후 박수를 받고 있다(사진=로이터/연합)
다만 다카이치 총리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일단 유신회는 자당 의원이 입각하지 않는 이른바 '각외(閣外) 협력' 형태로 연정에 참여하기로 해 공명당 의원이 국토교통상 등을 맡았던 기존 자민당·공명당 연정보다는 협력 관계가 약할 것으로 분석된다.
자민당과 유신회는 민간 투자를 확대하기로 서로 합의를 이뤘지만 투자자들 사이에선 연정의 지속가능성이 여전의 의문이라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또 자민당과 유신회는 의석수를 합쳐도 과반이 되지 않는 소수 여당이어서 법안과 예산안을 통과시키려면 다른 정당과 협력이 필요하다.
여기에 다카이치 총리가 유신회를 포섭하는 과정에서 국회의원 정수 10% 축소 등 유신회 요구 사항을 대부분 수용했는데,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자민당 내부에서 반발이 나오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자민당과 유신회 사이에 국회의원 정수 축소, 기업·단체 후원금 폐지, 선거 출마자 조율, 약한 연결고리 등 4가지 갈등의 불씨가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다카이치 총리는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는데 '아베노믹스'를 계승하는 경기부양 정책을 펼칠 경우 엔화 약세가 심화돼 물가가 상승 압박을 더욱 받을 공산이 크다.
말보로 인베스트먼트 매니지먼트의 제임스 에이티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이번 연정은 다카이치 총리가 극단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는 청신호가 아니다"며 “확장 재정 정책 또한 경제적 및 정치적 측면에서 크게 제한돼 '다카이치 트레이드'(일본 증시 상승, 엔화 하락)가 추가로 이어갈 여력이 낮다"고 말했다.
실제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4만9900대까지 오르면서 5만선 돌파를 넘보던 닛케이225 평균주가(닛케이지수)가 오후들어 상승폭이 축소되기 시작했다.
스미토모생명보험의 무라타 마사유키는 “유신회가 참여함에 따라 다카이치 총리의 경제 정책이 균형을 더 이룰 것으로 보인다"며 “일본은행의 금리인상을 막기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취임 이후 중대한 외교 일정도 소화할 예정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오는 27일께 일본을 방문할 예정인 데다, 내주 말레이시아와 경주에서 각각 개최될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정상회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다카이치 내각 출범으로 역사 인식이 온건하다고 평가받았던 이시바 시게루 내각 체제에서 협력 기조가 이어졌던 한일관계에 파장이 미칠지도 주목된다. 다카이치 총리는 과거 역사·영토 문제에서 강경한 '매파' 발언을 쏟아냈고,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도 정기적으로 참배해 왔다.
한편, 이시바 내각 각료는 이날 오전 총사직했다. 작년 10월 취임한 이시바 전 총리 재임 기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총리 중 24번째로 긴 386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