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신용평가사들은 고부가가치 제품군으로 포트폴리오 전환과 설비 통폐합이 불가피하다는 진단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중국의 공급 과잉 등으로 인한 불황이 이어지면서 석유화학사의 신용등급 하향 압박도 계속되고 있다. 신용평가사들은 구조조정 경과를 살피면서 회사별로 신용등급을 결정하겠지만, 등급 하향 압박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29일 신용평가업계에 따르면, 최근 신용평가 3사(한국기업평가·나이스신용평가·한국신용평가)는 신용 세미나를 열고 국내 석유화학 산업 진단과 신용등급 모니터링 요인을 제시했다.
일본 에틸렌 생산 줄일 때 한국은 늘렸다
신용평가사들은 공통으로 과잉설비 감축과 고부가가치 제품군으로 포트폴리오를 전환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재편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먼저 구조조정에 나선 일본을 모범 사례로 꼽았다.

▲한국과 일본 석유화확 비교/출처=한국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일본은 기업·설비 통폐합을 통한 최적화와 스폐셜티·고부가가치 제품군 확대를 골자로 한 산업 구조조정을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여러 차례 실시했다. 먼저 1980년대부터 내수 수요가 줄어들면서 공급 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생산 능력을 줄였다. 일본은 에틸렌 연간 생산량을 2003년 736만톤에서 2023년 532만톤으로 줄였다. 이에 반해 한국은 에틸렌 생산량이 2003년 589만톤에서 2024년 1039만톤으로 계속 늘었다.
일본 석유화학산업이 여러 차례 구조조정을 거쳐 생산 능력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설비 폐쇄의 기회비용이 낮았기 때문이다. 유준위 한국기업평가 연구원은 “일본은 석유화학 단지가 9개 지구에 걸쳐 분산되어 있고, 에틸렌 기준 설비별 평균 생산 능력이 연간 50만톤 수준으로 규모가 작으며, 노후화에 따라 설비 효율이 낮다"고 분석했다.
반면 한국은 설비 폐쇄의 기회비용이 높아 향후 국내 구조조정 과정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유 연구원은 “한국 석유화학 단지는 여수, 대산, 울산에 집중되어 있고 일본 대비 에틸렌 기준 설비별 평균 생산능력이 연간 115만톤으로 규모가 크고, 가동기간 15년 이내 설비가 600만톤 이상으로 사용 연수가 길지 않다"고 말했다.
일본은 비효율 설비 폐쇄와 함께 해외 시장 진출, 스폐셜티 제품군 확대 등을 이뤄냈다. 제약과 정밀화학 등으로 사업 부문을 다각화했고, 고부가가치 제품군을 토대로 안정적인 수익을 내고 있다. 그 덕분에 중국발 공급과잉에 따른 충격에도 탄탄한 영업실적을 유지하고 있다. 김호섭 한국신용평가 연구위원은 “국내 업체들이 중국 대상 수출을 늘린 것과 달리 일본은 생산능력을 축소하고 내수 위주의 수급 구조로 변모했다"면서 “이에 따라 2022년 이후 국내와 일본 석유화학 업체 간 디커플링이 심화하는 모습"이라고 짚었다.
순탄치 않은 생산량 감축…“누가 얼마나 줄일 것인가"
지난달 20일, 정부는 석유화학 산업 '구조개편 3대 방향', '정부지원 3대 원칙'을 발표했다. 기업이 먼저 사업재편 등의 노력을 해야 정부가 지원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주요 석유화학 업체 10개는 자율 협약을 맺고 나프타분해시설(NCC) 생산 규모를 연간 270만~370만톤 줄이기로 했다. 국내 에틸렌 총생산능력(1480만톤)의 18~25% 수준이다. NCC는 원유에서 뽑아낸 나프타를 원료로 에틸렌과 같은 기초 유분을 만드는 공정이다.
신용평가사들은 기업 간 이해관계가 달라 실제 구조조정 효과가 나타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가장 큰 문제는 NCC 설비감축 규모에 관해 어느 업체가 얼마만큼의 물량을 담당할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최근 HD현대케미칼과 롯데케미칼, GS칼텍스와 LG화학 등 산업단지 내 통합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불확실성도 여전히 크다.
유준위 한국기업평가 연구원은 “국내 과잉설비 감축을 위해 업체 간 인수합병, 합작사 설립 등이 이용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업체별 사업과 재무 상황이 다르고 복잡한 이해관계로 사업통합이 지연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인수합병을 통한 설비 통합, 업체 간 협의를 통한 생산량 조절은 공정거래법상 독과점과 담합 대상에 해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기업 재무개선 효과 적어…구체적인 자구책 나와야
신용평가사는 석유화학 기업의 구조 개편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진단했다. 정부도 구조 개편 의지를 보이고 있는 만큼, 올 하반기 이후 산업구조 개편이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다만 회사마다 자구계획을 통한 재무개선 효과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업체별 구조조정 위험 노출액 및 유동성 대응부담 분포/출처=한국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는 롯데케미칼과 SK지오센트릭이 자구계획을 충실히 이행하면 충분한 차입금 감축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반면 LG화학, 한화토탈에너지스, 여천 NCC, HD현대케미칼은 추가적인 재무 개선 방안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한국신용평가는 구체적인 사업재편 방안을 확정되고 시행하기 전까지는 기존과 같이 업체별 수익성 및 재무부담 추이와 전망을 근거로 신용도를 평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호섭 한국신용평가 연구위원은 “정부의 충분한 지원으로 유동성 대응 불확실성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며 “정부는 충분한 인센티브와 구체적인 사후관리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서 구조조정을 적극적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