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최대 가전 전시회 'IFA 2025'가 닷새간의 일정을 마치고 9일 막을 내렸다. 사진 = IFA 2025 홈페이지.
지난 5일(현지시간)부터 9일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최대 가전전시회 IFA 2025 행사는 한마디로 '패스트 팔로워(추격자)'로 불리며 글로벌 가전시장의 주변부 취급받던 중국 가전기업들이 '퍼스트 무버(선도자)'로 전환했음을 당당히 신고하는 무대였다.
그동안 글로벌 가전에서 퍼스트 무버로 리더십을 나눠가졌던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한국기업들에겐 '초격차 전략' 강화의 필요성을 일깨운 자리이기도 했다.
올해로 101주년을 맞은 IFA는 '미래를 상상하다(Imagine the future)'를 주제로 열렸다. 138개국 1800여개 기업과 단체가 참여해 기술 경쟁을 펼쳤다.
특히, 중국은 단일 국가 중 최대 규모인 700여개 기업이 참가해 전시장 3곳 중 1곳을 차지하며 압도적 위상을 과시했다. 과거의 '가성비 전략'에서 벗어나 혁신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며 삼성·LG를 정면으로 위협했다.
韓中 최대 격전지는 로봇청소기

▲로보락이 IFA 2025에서 공개한 로봇 잔디깎이. 연합뉴스.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치열했던 무대는 로봇청소기였다. 로보락·에코백스·드리미 등 글로벌 시장을 장악한 중국 기업들은 혁신 제품을 대거 선보이며 기술 우위를 과시했다.
시장조사기관 IDC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글로벌 로봇청소기 시장 점유율은 중국 '빅4'(로보락·에코백스·드리미·샤오미)가 과반(54.1%)을 차지한다.
세계 1위 로보락은 세탁기·건조기·청소 기능을 결합한 '로보락 4 in 1 클리닝 콤보'를 비롯해 첫 프리미엄 로봇 잔디깎이, 초슬림형 신제품 등을 공개해 주목받았다.
'로보락 4 in 1 클리닝 콤보'는 세탁기·건조기·로봇청소기(쓸기·닦기) 4가지 기능을 한데 모은 제품으로, 세탁기를 로봇청소기의 '스테이션'으로 활용해 인테리어 완성도와 공간 효율을 동시에 높인 제품이다. 세탁기와 스테이션이 배수관을 공유하는 점도 특징이다.
프리미엄 로봇 잔디깎이 3종도 공개됐다. 로봇 잔디깎이는 로보락이 최초로 선보이는 카테고리다. 이외에도 2만5000Pa의 흡입력을 구현하면서도 7.98cm의 초슬림 디자인을 갖춘 '큐레보 커브 2 프로'도 이목을 사로잡았다. 이 제품은 카펫 두께에 따라 높이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섀시 리프트(AdaptiLift™) 기능과 리트랙트센스(RetractSense)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통해 더욱 정밀한 청소 성능을 제공한다.
드리미는 이번 전시회에서 세계 최초로 계단을 오르는 로봇청소기 '사이버 X'를 공개했다. 이 제품은 최대 25㎝ 높이의 계단을 초당 0.2m 속도로 등반할 수 있다.
에코백스는 배터리 충전과 사용 시간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기술을 소개했다. '디봇 X11'은 파워부스트 기술을 적용해 물걸레가 세척되는 3분 동안 배터리를 최대 6% 충전할 수 있으며, 1회 충전으로 최대 1000㎡를 청소할 수 있다.

▲'IFA 2025'가 열린 독일 베를린 '메세 베를린'의 '시티큐브 베를린'에 위치한 삼성전자 전시관에서 삼성전자 모델이 '비스포크 AI 스팀'을 소개하고 있다.
이에 맞서 삼성전자는 하반기 출시 예정인 '비스포크 AI 스팀'을, LG전자는 빌트인형 '히든 스테이션'과 프리스탠딩형 '오브제 스테이션'을 선보였다. 다만 청소 성능과 편의성에 초점을 맞춘 만큼, 중국 업체들이 강조한 '혁신성'과는 차별화 양상이 뚜렷했다.
한국 가전 기업들은 중국의 매서운 공세로 글로벌 시장뿐만 아니라 자국 시장에서도 점유율 하락을 겪고 있다. 국내 로봇청소기 시장에서는 로보락, 에코백스 등 중국 기업들이 매출액 기준으로 60%에 이르는 점유율을 차지했다.
이에 류재철 LG전자 HS사업본부장(사장)은 IFA 2025 현장 간담회에서 로봇청소기 시장을 “아픈 손가락"이라고 불렀다. 과거 한국 제품을 베끼던 중국 기업들이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기술력을 축적하며 이제는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처지가 됐다는 이야기로 풀이된다.
전통 가전서도 추격 허용…AI·스마트홈 부상

▲하이센스가 IFA 2025에서 RGB 미니 LED 제품을 선보였다. 연합뉴스.
중국 기업들의 약진은 전통 가전에서도 나타났다. 하이센스가 주도한 RGB LED TV가 대표적이다. 세계 최초 양산에 나선 하이센스는 IFA 현장에서 기술적 주도권을 과시했다. 삼성전자가 차세대 소자 기술로 응수했지만, '퍼스트 무버' 이미지는 중국이 선점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TCL과 하이센스는 RGB LED TV를 전시관 전면에 배치해 “새로운 프리미엄 TV는 중국이 먼저 시작했다"라는 메시지를 깔았다.
아울러 데니스 리 하이센스 비주얼테크 최고경영자(CEO)는 “우리의 RGB 미니 LED TV는 차세대 디스플레이 기술의 새로운 이정표"라며 “색 재현력과 표현력은 OLED를 훨씬 능가한다"고 말했다. OLED 중심의 프리미엄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LG전자를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중국 업체의 존재감 확장 속 삼성·LG가 호령하던 글로벌 TV 시장이 최근 들어 격변하고 있다. 내년에는 중국 하이센스의 TV 출하량이 삼성전자를 넘어설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은 정부 지원과 낮은 인건비, 장시간 근로를 기반으로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한국은 높은 인건비와 짧은 근로 시간, 작은 내수시장으로 불리하다는 지적이다.
이충훈 유비리서치 대표는 최근 한 세미나에서 “2026년에는 하이센스가 삼성전자를 추월하고 2028년에는 TCL도 앞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고 말했다. 실제로 하이센스와 TCL은 2023년 TV 출하량에서 LG전자를 제치고 각각 2위와 3위에 올랐다.
AI 가전과 스마트홈 플랫폼도 중국의 무대였다. 하이얼과 하이센스는 각각 'hOn', '커넥트라이프' 플랫폼을 내세워 집안 가전을 연결·제어하는 생태계를 선보였다. 에너지 절감형 세탁기, 식재료 관리 기능을 갖춘 냉장고 등 AI 기반 제품도 다수 공개됐다. 단순 제품 경쟁을 넘어 플랫폼·생태계 경쟁으로 확대되는 흐름이다.
韓 기업, 초격차 전략 고수

▲IFA 2025 내 LG전자 부스를 찾은 관람객.
국내 업체들도 중국의 부상을 인정하며 긴장감을 드러냈다. 조주완 LG전자 CEO는 IFA에서 “중국의 공세는 앞으로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삼성은 AI 고도화와 기기 간 연동성을 앞세운 'AI 홈' 전략을, LG는 전장·냉난방공조 등 기업 간 거래(B2B) 중심 특화 분야를 돌파구로 제시했다.
노태문 삼성전자 DX부문장 직무대행 사장은 “혁신 DNA를 기반으로 AI 홈을 업계에서 가장 빠르게 현실화해 글로벌 선구자로 도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주완 CEO 역시 “전장과 냉난방공조를 B2B의 쌍두마차로 삼아 질적 성장을 이끌겠다"고 말했다.
이번 IFA 2025는 중국 가전업체들이 더 이상 추격자가 아닌 글로벌 시장의 선도자로 떠올랐음을 확인시킨 무대였다. 한국 기업들에겐 기술 초격차와 차별화 전략을 통한 '질적 승부'가 한층 절실해졌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