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희민 포스코이앤씨 사장이 29일 인천 송도 본사에서 연이은 현장 사망사고와 관련한 담화문 발표에 앞서 관계자들과 사과 인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의 산업현장에서는 여전히 매년 수만건의 사고가 발생한다. 건설현장의 추락, 조선소 협착, 제조업 화재 등 크고 작은 사고가 일상이 됐다.
그러나, 영국을 포함한 나라밖 선진국들은 달랐다. 영국은 산재 사망률이 한국의 1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이같은 극적인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한국 제도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집중 조명해 본다.
영국: 세계 최저 산재율, 독립 감독기구 HSE
영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산업재해 사망률을 자랑한다. 그 중심에는 독립감독기구인 보건안전청(HSE, Health and Safety Executive)가 있다.
HSE는 정부의 영향이나 기업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법 집행과 사고 조사 권한을 갖는다. 기업이 안전 규정을 위반하면 막대한 벌금은 물론 최고경영자 개인에게도 형사 책임을 묻는다.
영국의 가장 강력한 전략은 '리스크 기반 관리'다. 모든 사업장은 법적으로 위험 평가(Risk Assessment)를 반드시 작성하고 이를 근로자와 공유해야 한다.
이를 어길 경우 사업장 운영 자체가 정지될 수 있다. 특히 고위험 업종에서는 근로자가 'Safety Passport(안전 자격증)'을 꼭 취득해야만 현장에 투입된다.
이 같은 엄격한 예방 체계 덕분에 영국의 산재 사망률은 10만명당 0.3명에 불과해 한국의 4~5명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낮다. 안전은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기업의 생존과 경쟁력 자체임을 보여주는 선례다.
독일: 사고 예방이 기업 경쟁력이다
독일 역시 '위험성 평가'를 법제화해 기업이 모든 공정에서 안전 점검과 근로자와의 정보를 공유하게 한다. 사고가 나면 산재보험료 인상과 배상 책임 등 경제적 불이익이 즉각 기업에 전가된다.
'직업재해보험공단(BG)'이 핵심 역할을 맡아 사고 발생률에 따라 보험료를 차등 부과, 사고 예방이 곧 “비용 절감" 임을 기업이 체감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안전 설비와 교육에 적극 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를 갖추었다.
스웨덴: 안전문화를 생산성으로
스웨덴은 근로자 참여를 통한 안전문화가 정착된 국가다.
모든 작업은 사전에 작업 안전 분석(Job Safety Analysis)을 마쳐야 하고, 절차 미이행 시 설비 가동을 원천 차단한다.
경영진이 현장 점검과 근로자와의 소통을 일상화하며 최고경영자부터 안전모를 착용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이런 자세가 OECD 최저 수준 산재율을 뒷받침한다.
미국: 강력한 규제와 인센티브 병행
미국은 1970년 설립된 산업안전보건청(OSHA)을 중심으로 산재 사망률을 절반가량 줄였다. 불시 현장 점검과 막대한 제재가 있지만, 동시에 자율 참여형 인센티브 프로그램(VPP)을 통해 우수기업에는 규제 완화를 제공한다.
또 국가 차원에서 산업재해 데이터를 수집·공개해 기업 안전성과가 사회적 평가를 받도록 한다. 규제와 인센티브, 데이터 공개의 병행 전략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일본: '제로재해 운동'과 기술 혁신
일본은 1970년대부터 '제로재해 운동'을 펼쳐왔다. 기업 내 안전보건위원회의 상시 점검과 지속 개선을 경영계획에 반영한다.
최근에는 AI, 로봇 등 첨단기술로 사람을 위험 현장으로부터 멀리하는 전략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건설업에서 드론이 고소 작업을 대체하고, 제조업에서 협동 로봇이 중량물 운반을 맡아 근로자 안전을 보호한다.
한국의 과제 “처벌의 악순환을 끊어라"
이처럼 해외 선진국들의 사례는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한국은 여전히 '법규 강화-현장 반발-사후 제재'라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안전관리제도는 존재하지만 기업문화와 사회적 인식은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안전 투자가 비용으로만 여겨지는 현실에서 예방 중심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는 어렵다. 해외 선진국의 사례가 보여주듯 한국이 산재율을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처벌 강화에 머무르지 않고, 제도·문화·인식·투자가 함께 움직이는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산업재해는 결코 불가피한 숙명이 아니다. 안전을 '비용'이 아닌 '투자'이자 '경쟁력'으로 인식하는 순간, 한국도 세계 최저 수준의 산재율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