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31일 오전 더불어민주당 산업재해예방 태스크포스(TF)와 안호영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이 최근 노동자 사망사고가 발생한 포스코이앤씨의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2022년 1월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이 도입 3년 차에 접어들면서 산업 현장 곳곳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최고경영자(CEO)의 법적 책임이 강화되자 기업들은 안전 예산을 대폭 늘리고, 안전 전담 조직을 신설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법 시행 취지와 달리 현장의 체감도는 여전히 낮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 시행 이후 기업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조선·제철·자동차 등 중후장대 산업을 중심으로 안전관리 인력 확충과 설비 교체가 이어지고 있으며, 일부 대기업은 안전 관련 투자액을 전년 대비 30~50%까지 늘렸다.
조선업계의 경우, 안전보건 전담 부서를 CEO 직속으로 격상하고 각 사업장에 안전감독관을 상시 배치하는 사례도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사고 다발 업종에서는 '서류상 안전관리'에 머무르는 관행이 여전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실제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사망자 수는 다소 줄었으나 산업재해 발생 건수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2024년 한 해 동안 중대산업재해 사망자는 553명으로, 시행 첫해인 2022년(644명) 대비 줄었지만, 재해 발생 건수는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업종별로 보면 사고 양상은 더욱 뚜렷하다. 조선업에서는 대형 구조물 취급 과정에서 협착·추락 사고가 빈발한다. 최근 전남 영암군 조선소에서는 운반차량 협착 사망사고와 대형 기자재 운송 중 인명 피해가 발생했으며, 스마트 안전시스템 도입이 확산되고 있으나 중소 조선소는 여전히 예산과 인력 부족으로 안전 인프라가 취약한 상태다.
제철업은 2020년 이후 공식 승인된 산업재해 건수가 1400여건에 달고 기계 끼임, 추락, 화상, 가스 누출 사고가 빈번하다. 중대재해법 시행 후 원청과 협력사의 합동 점검과 특별교육이 확대되었지만, 현장 체질 개선은 아직 더딘 상황이다.
자동차 산업에서는 최근 5년간 완성차 및 부품 공장에서 2000여 건의 사고와 28명의 사망이 보고됐으며, 이 중 70%가 하청 노동자였다. 협착, 깔림 사고뿐 아니라 벤젠, 포름알데히드 등 유해물질 노출로 인한 직업병, 소음성 난청 사례도 다수 확인되고 있다.
건설업계 대표 격인 포스코이앤씨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총 8건의 사망 사고를 기록했고, 그중 4건이 2025년 한 해에 집중됐다. 최근 광명–서울고속도로 공사현장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감전 사고와 60대 노동자의 건설기계 협착 사고가 발생했고, 정부는 이에 대응해 전국 현장 전수조사와 강제수사, 면허 취소 및 공공입찰 제한 등 강력 제재를 추진 중이다.
재계에서는 법 규정의 불명확성과 과도한 형사 처벌이 기업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불만과 우려가 크다. 특히 경영책임자의 범위가 모호해 안전사고 발생 시 대표이사가 직접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구조에 대해 강한 반발이 존재한다.
업계 관계자는 “안전 확보를 위한 투자는 필수지만, 모든 사고를 CEO가 책임지는 것은 현실과 괴리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법 취지를 살리기 위해 단순 처벌 강화보다 예방 중심 정책과 업종별 맞춤형 안전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병훈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기업이 스스로 안전 문화를 정착시키도록 유도하는 인센티브가 중요하다"며 “형벌 위주의 접근은 현장 개선으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한편, 경영계 대표 단체인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13일 열린 토론회에서 “산업 현장의 안전문화가 정착되려면 중소기업과 하청업체까지 포함한 전방위 지원이 필수적"이라며 “원청과 하청 간 책임 분담을 명확히 하는 법·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토론회에서는 정부와 기업이 긴밀히 소통하며 실질적이고 현장 친화적인 안전관리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공감대도 형성됐다.
정부도 이에 발맞춰 제도 보완에 나서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2025년 하반기 중 법 적용 범위와 경영책임자 의무 조항을 재검토하고, 기업이 실질적으로 준수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계획이다. 다만 노동계는 “법 완화가 재해 방지 의무를 약화시킬 수 있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해 제도 개편을 둘러싼 논란도 불가피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