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사진=로이터/연합)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중국산 제품에 대해 부과했던 고율 관세를 대폭 인하하기로 하자 이를 지켜본 다른 국가들의 셈법이 더욱 복잡해졌다. 미국에 맞서 보복 조치를 취해왔던 중국과 달리 한국, 일본 등 주요 교역국들은 빠른 협상을 통해 관세를 면제받는 전략을 택했지만 아직까지 큰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일부 국가들 사이에선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18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중국이 강경한 전술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내자 미국과 외교적이고 신속한 접근 방식을 택했던 국가들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싱가포르 ISEAS-유소프 이샥 연구소의 스티브 올슨 연구원은 “협상 역학 관계를 바꿨다"며 “스위스 제네바 (미중) 합의 결과를 지켜본 국가들은 트럼프가 자신이 지나쳤음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10~1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고위급 회담을 벌인 미국과 중국은 상대국에 대한 관세율을 90일간 115%포인트 낮추기로 합의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 정책에 따른 미국의 경제적 역풍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각국에 보여준다.
노무라홀딩스의 로버트 수바라만 글로벌 시장조사 책임자는 “미국의 경제적 고통은 더 즉각적이고 광범위하며, 이번 합의는 트럼프 행정부가 이를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조차 협상이 더 오래 걸릴 수 있다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진행된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 “150개 국가가 협상하고 싶지만 그렇게 많은 국가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도 블룸버그TV와 인터뷰에서 일본, 한국과 협상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고,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유럽연합(EU)의 단결력 부족을 언급하면서 “협상 속도가 조금 더 느려질 수 있다"고 밝혔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사진=로이터/연합)
이에 미국과 협상을 이어왔던 국가들 사이에서 기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인도가 '미국산 제품 무관세'를 제안했다고 주장했지만 인도 정부는 “(미국과) 무역 협상을 계속하고 있다"며 “끝날 때까지는 어떤 판단도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일본의 경우 협상 대표인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이 이달 초에는 6월에 미국과 합의에 이르기를 희망한다고 언급했지만 참의원 선거를 앞둔 7월에 합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더 크다는 현지 언론들의 보도가 나왔다.
이를 두고 블룸버그는 “일본 정책 입안자들은 협상을 빠르기 마무리하기 위해 큰 양보를 제공하는 것보다 시간을 갖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짚었다.
이와 관련, 투자은행 나틱시스의 알리시아 가르시아 아태 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줄을 선 모든 사람이 '나는 왜 줄을 서고 있지?'라고 생각한다"며 “중국은 줄을 건너뛰었고, 미국에는 뚜렷한 이익이 안 보이는 까닭에 이를 지켜보는 국가들엔 두 배로 뼈아픈 일"이라고 말했다.
BCA 리서치 지오매크로의 마르코 파픽 수석 전략가는 “트럼프 대통령과 협상하는 올바른 방법은 강경하게 맞서고, 침착함을 유지하며, 그가 굴복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을 중국에서 배울 국가들이 많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처럼 강경책을 구사하다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반론도 나온다. 경제 규모가 크고 대미 무역 의존도가 낮은 국가들만이 이같이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은행 중국 담당 국장이었던 버트 호프만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대부분의 국가가 미국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6일 제주 서귀포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에서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와 면담, 악수하며 기념 촬영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캐나다다. 앞서 캐나다 정부는 펜타닐 유입·이민자 문제 등을 이유로 미국이 25%의 관세를 시행하자 미국산 소비재와 철강·알루미늄 등에 보복관세를 부과하며 맞대응했다.
그러나 마크 카니 내각은 지난달 15일 제조·가공·식음료 포장에 사용되는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6개월간 유예하기로 했다. 공공보건·의료·공공안전·국가안보에 필요한 품목에 대한 관세도 6개월간 유예키로 했다. 아울러 자동차 제조사들에는 캐나다에서 생산·투자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일부 자동차를 관세 없이 수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두고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이번 조치로 캐나다의 대미 보복관세율이 사실상 0% 가까이로 떨어졌다며 이로 인해 캐나다의 인플레이션 리스크가 완화되고 경제성장률 전망이 개선됐다고 평가했다.
일각에선 각국이 협상 지렛대를 창의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무디스 애널리틱스의 카트리나 엘 아시아태평양 경제 총괄은 경제 규모가 큰 국가들이 미국과 대립을 원한다면 서비스 무역에서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유럽연합, 싱가포르, 한국, 일본이 대미 서비스 무역적자가 큰 국가들이다.
엘은 “중국은 미국에 대해 너무 큰 지렛대를 쥐고 있어서 미국이 강경한 입장을 계속 유지하기가 어렵지만 다른 많은 국가는 그렇지 않다"며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지렛대와 그 지렛대가 누구에게 있는지다"라고 말했다.
파픽 수석 전략가도 “다른 국가들은 지렛대를 창의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