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출은 정체되고, 소비는 위축됐다. 기업의 투자는 지연되고, 가계는 지갑을 닫았다. 경기 둔화 신호는 경제 전반에서 동시에 관측되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흐름이 일시적 침체에 그치지 않고, 구조적 저성장 국면으로 고착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1.5% 수준까지 떨어졌다고 진단했다. 이 수치는 단기 경기의 반등 여부를 넘어, 한국 경제의 '기본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KDI는 이러한 추세가 이어질 경우, 2040년대에는 잠재성장률이 0%대로 진입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과거 중진국 진입의 동력이 되었던 인구 구조와 생산성 요소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잠재성장률의 하락은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의 하향을 의미한다. 저출생·고령화, 생산 가능 인구 감소, 노동시장 경직성, 기술 혁신 둔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공급 측의 제약이 커지는 상황에서 수요 측면의 부진도 장기화 조짐을 보인다. 가계의 소비 여력은 떨어졌고, 기업들은 대외 불확실성에 더해 내수회복의 기대마저 낮아지면서 투자 결정을 유보하고 있다. 수요와 공급 모두에서 성장이 막힌 것이다.
금융과 외환시장에도 경기 둔화의 흐름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원화 약세와 고환율 흐름은 외환시장의 불안정성을 키우며 외국인 자금의 이탈 압력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금리와 환율, 물가 등 거시 지표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시장 참여자들의 기대 심리는 약화되고 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통화·재정정책의 실효성도 제한을 받고 있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연 2.75%로 유지하고 있지만 환율 불안정성과 높은 가계부채 부담으로 인해 금리 인하에는 신중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재정정책 역시 국가채무 증가와 재정건전성 우려 속에서 과감한 확장으로의 전환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국 경제는 이제 '성장 여력의 저하'라는 구조적 문제와 '정책 여력의 한계'라는 현실적 벽에 동시에 직면해 있다. 외부 충격이 아니더라도 내부적으로 축적된 리스크가 성장 모멘텀을 끌어내리고 있다는 진단이 유효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조적 전환기에 어떤 정책적 선택을 할 것인가다.
노동시장 유연화, 산업전환과 같은 경제구조 개혁 과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특히 생산성 정체가 잠재성장의 핵심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시급한 현안은 노동개혁을 통한 고용시장 정상화다. 정규직에 대한 과보호 조정, 성과중심 임금구조로의 개편, 획일적 노동시간 규제 완화는 당장 우리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산업전반의 효율성을 높이는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한 달 뒤 들어설 차기 정부의 우선적인 과제로 반드시 자리매김해야 할 대목이다.
수치는 분명하고 방향도 뚜렷하다. KDI의 경고처럼 잠재성장률 0%대 시대는 단지 먼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현재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정치와 정책이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 대가는 결국 국민의 삶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은 진단이 아니라 실행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