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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주 한국경제인협회 기업제도팀장 |
우리나라의 공정거래법은 크게 경쟁법과 대기업 집단을 규율하는 부분으로 나뉜다. 경쟁법 분야는 가격 담합,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지위 남용 등 건전한 시장경쟁을 해치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다. 이는 미국, EU, 일본 등 세계 주요국들도 유사한 규정 아래 엄격하게 법을 집행한다.
반면 대기업 집단을 규율하는 부분은 우리나라만의 매우 독특한 제도다. 세계 주요국 중 대기업 집단을 규제하는 법제를 가진 나라는 찾아 볼 수 없다. 이러한 대기업 집단 규제의 연원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 군정이 일본에서 실시한 대기업 집단 규제에서 찾을 수 있다. 미 군정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배경 중 하나를 일본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전범기업 집단으로 보고, 이를 해체하기 위해 대기업집단 규제를 단행했다. 미 군정이 물러난 후 일본은 이 규제가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는 판단에 따라 일찌감치 폐지했다. 그런데 일본 전범기업을 규제하기 위한 미 군정 당시의 규제를 1986년 우리나라 공정거래법에 도입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전범기업으로 대상으로 한 규제인 데다 경제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취지에서 이미 철폐한 구시대적 제도를 왜 하필 우리나라에 끌어들였는지, 그리고 아직까지 당국이 ‘전가의 보도’처럼 쓰는 것이 의아하다.
대기업 집단에 대한 규제에는 대기업집단 지정제도, 동일인 지정제도, 상호출자 금지, 각종 의결권 제한 등이 있다. 이 제도들은 일견 기업에 대한 규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기업 총수를 규제하는 것이 목적이다. 예를 들어 대기업 집단 지정시 계열사에 대한 각종 자료를 공정위에 제출해야 하는데 오기나 일부 자료를 누락하면 기업 뿐 아니라 기업총수를 검찰에 고발해 형사처벌을 부과한다. 공정거래법상 의무 이행의 책임을 총수에게 지우고 있다.
앞으로 총수에 대한 형사책임이 더 무거워질 가능성이 높다. 공정위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등의 위반행위의 고발에 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지침 일부 개정안’(고발지침 개정안)’을 행정예고 했기 때문이다. 공정위 보도자료에 따르면 일감몰아주기 위반으로 법인을 고발하는 경우 특수관계인, 즉 총수도 원칙적으로 고발하겠다는 것이다. 현행 고발지침에는 총수의 법 위반 정도가 중대해야 고발 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법 위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일단 기업 충수를 고발하겠다는 의도다. 문제는 법률도 아닌 지침으로 국민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 사항을 정한다는 것은 ‘권리를 제한 할 때는 법률로서 한다’는 헌법 규정과 충돌 소지가 크다. 더구나 상위법인 공정거래법 제129조 제2항에서는 ‘그 위반의 정도가 객관적으로 명백하고 중대하여 경쟁질서를 현저히 해친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만 공정위가 고발할 수 있도록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런 헌법과 법률의 원칙을 하위법령인 지침으로 거스른다는 것은 우리 법체계를 흔드는 엄중한 사안이다.
공정위에 전속고발권을 부여한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 전속고발권은 공정거래 사건의 전문기관이 공정위가 사건을 조사하고 법위반의 경중을 따져 고발 여부를 결정하라는 취지다. 지침 개정안과 같이 공정위가 법 위반의 경중을 고려하지 않고 기업 총수를 검찰에 고발하게 된다면 공정위 전속고발권의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적, 제도적 모순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기업 입장에서 총수가 검찰 고발을 당한다면 기업의 이미지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특히 해외에서는 경영자의 평판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해외사업에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우리나라 경제는 지금 가시밭길을 지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고유가, 고금리 그리고 주요 수출국인 중국의 경기침체 등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 경영자들이 자유롭게 기업활동을 할 수 있는 정책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정부도 기업을 그 어느 때 보다 중요시하고 정책 환경 개선을 위해 규제개혁을 중요한 정부 정책기조로 삼고 있다. 공정위의 고발지침 개정안은 이런 정부의 정책기조와도 맞지 않는다. 고발지침 개정안은 전면 재검토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