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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도서] 강제혁신 |
결국 역사의 다음 장은 처절한 혁신을 이룬 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동명의 다큐멘터리 ‘강제혁신’을 연출한 EBS 이주희 PD는 전작 ‘강자의 조건’에 이어 또 한 번 정치와 권력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를 위해 세계적인 석학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더욱 심층적으로 풀어나간다.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의 깔끔한 프레젠테이션과 애플의 세련된 디자인만 보고 혁신을 우아하고 낭만적인 것으로 착각하지만 이는 혁신의 결과물일 뿐이다. 혁신은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는 일이기에 잔인하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전쟁터는 피비린내 나는 혁신의 역사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장소다. 전쟁에서의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전쟁터는 그 어떤 곳보다 승패가 명료한 혁신의 현장이다.
혁신의 현장에는 한 무리의 기득권자와 반역자가 존재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며, 그 옆에는 호시탐탐 이를 노리는 자가 존재한다. 전쟁터에 ‘화약혁명’이라는 새로운 혁신의 바람이 불어왔을 때,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한 국가의 운명은 달라졌다. 혁신으로 쫓겨날 자가 이끄는 나라의 미래는 이미 후퇴의 전조를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혁신에서의 권력이란 역사를 재편하는 핵심 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힘의 총체인 전쟁터에서의 혁신을 살펴보는 일은 가장 강력한 역사의 교훈과 마주하는 일이다.
천적이 없던 13세기 몽골군에게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한 이집트 맘루크 술탄국은 1516년 마지 다비크 전투에서 오스만제국에 패하고 역사에서 이름을 잃었다. 화약 무기를 가진 오스만 앞에 맘루크의 자긍심 넘치는 무예는 속수무책으로 파괴당했다. 권력이 개인이 아닌 집단에게 있던 맘루크와 달리, 권력이 세습되던 오스만은 집단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웠고 새로운 기술을 적극 받아들였다. 엘리트 노예라는 ‘정체성’을 손에 쥔 자와 화약 무기를 손에 쥔 자의 대결에서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종교 갈등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의 시기, 화약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유럽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었다. 가톨릭의 황제군과 신교의 스웨덴군은 브라이덴펠트와 뤼첸에서의 대규모 전투를 통해 서로의 기술을 적극 받아들였다. 스페인의 ‘테르시오(Tercio)’ 군사 편제를 바탕으로 한 창병 중심의 황제군은 교차사격이 가능하도록 구성된 총병 중심의 스웨덴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불과 1년 후, 적군의 기술을 받아들인 황제군의 포탄은 스웨덴군의 리더 구스타프 아돌프에게 박혔다. 미국의 진화 생물학자 리 밴 베일런이 제기한 ‘붉은 여왕 효과’에서 진화를 멈추는 것은 멸종을 의미한다. 근대 유럽은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붉은 여왕의 나라였다. ‘진화’하지 않는 것은 곧 정지가 아닌 후퇴를 의미했다.
대규모의 미사일이 난무하는 현대의 전쟁과 달리 과거 전쟁에서는 무사의 품위나 기예를 중시했다. 그들이 오랜 시간 갈고 닦은 전투기술은 다른 집단과의 차별성을 더하는 권력의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역사의 새로운 장이 펼쳐지는 순간, 이전의 권력은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모든 역사는 기득권 세력과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새로운 권력의 교체에 관한 기록이다.
누군가는 혁신이 강제되기 전, 더욱 철저하게 혁신을 계획하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상식적으로도 좋은 아이디어가 혁신을 이룰 것 같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가 아니다. 혁신을 위해 필요한 것은 기득권을 해체하려는 용기와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권력이다.
그 권력이 주어졌을 때 과감하게 가속 페달을 밟는 자가 바로 다음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 그 순간 운전석에 앉아 있는 자가 혁신가인지, 아니면 혁신으로 도태당할 자인지에 따라 한 국가와 민족의 미래는 결정된다.
제목 : 강제혁신 - 혁신을 원한다면 반역자가 되라
저자 : 이주희
발행처 : EBS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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