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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채 NH투자증권 사장 |
[에너지경제신문=성우창 기자] "우리는 자본시장의 ‘플랫폼 플레이어’입니다. 이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자본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연결하는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일,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합니다. 시장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고객과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영채 NH투자증권 사장, 2023년 신년사 중 일부)
신년사는 보통 기업의 한 해 사업 방향을 가늠케 한다. 실제로 최근 발표된 여러 증권사 대표들의 신년사에서는 주력 사업방향이나 목표에 대한 직·간접적인 언급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영채 NH투자증권 사장의 신년사는 임직원들에게 ‘쓸모 있는 플랫폼이 되자’라는 당부에 그쳤다. 경쟁사에 비해 원론적·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고객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증권사의 본분을 되돌아보라는 의미가 담겼으며, 최근 조직개편·사업성과를 통해 NH투자증권의 구체적인 방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지난 3일 서울 롯데호텔 ‘2023년 범금융 신년인사회’에서 기자와 만난 정 사장은 최근 발표한 신년사 내용에 대해 "나 자신의 인사이트가 부족해서"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30여년간 경력을 쌓은 ‘투자은행(IB) 대부’ 정 사장의 내공이 실제로 부족할 리는 없었다. 이에 대해 그는 "금리가 여기서 더 인상할지 안 할지, 경기가 더 나빠질지 유지될 지 누구도 알 수 없다"며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뭘 잘하겠다’ 말하는 것은 자칫 기본을 놓칠 수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원점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도 계속될 증권업황 악화로 실적 부진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신성장동력이라는 이름의 다양한 사업을 섣불리 진행하는 것은 자칫 고객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즉 ‘고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기본을 지키면서 고객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의미로 ‘플랫폼 플레이어’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 사장은 "과거 주가연계증권(ELS) 파동 등으로 시끄러울 때도 기본을 지켜왔기에 언제나 당당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 사장은 증권가에서 평소 금융당국을 상대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태도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 기본을 지킨 데서 나오는 ‘당당함’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 사장이 생각하는 현 시점 ‘고객에게 필요한 것’이란 뭘까. 이는 최근 NH투자증권의 연말 조직개편에서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이번 조직개편의 테마는 ‘리테일 사업 경쟁력 및 성장사업 부문 전문성 강화’였으며, 경영상의 편의보다 ‘고객 중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NH투자증권의 조직 구조상 리테일 부문은 자산관리(WM), Namuh(나무), 프리미어블루 등 3개 채널로 구성됐는데, 이번 개편에서 이를 모두 아우르는 ‘리테일 사업 총괄부문’을 신설했다. 이는 작년부터 계속된 실물자산 가치의 하락 현상을 맞이해 ‘개인 고객의 자산가치를 최대한 지키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각 리테일 채널 간 연계, 채널별 전문화 및 육성 전략을 강화해 리테일 성과를 키우고자 한 것이다. 연금컨설팅 본부 산하 100세시대연구소도 편제 변경을 통해 퇴직연금 컨텐츠, 솔루션 기능이 강화됐는데, 이 역시 노후자산 형성에 나날이 관심이 커지는 개인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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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투자증권. |
법인 고객도 놓치지 않았다. 외부위탁운용(OCIO)사업부 내 고객자산운용본부는 신탁본부로 명칭을 변경, 신탁업 전문조직으로 재편됐다. IB 부문에서는 올해 인수합병(M&A), 인수금융 시장 확대가 예상되자 관련 사업을 담당하는 투자금융부서를 확대했다. 운용사업부 내 클라이언트솔루션 본부 직속 탄소금융팀을 신설한 것도 기업 간 탄소배출권 거래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진 데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이미 NH투자증권은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선제적 움직임을 보이고, 그에 따른 성과를 거둔 사례가 있다. 바로 은행이 독점하던 펀드 수탁업에 증권사 최초로 진출한 것이다. 사모펀드 시장은 일련의 사태를 거치며 최근 수년간 크게 위축된 상황이었는데, 정 사장은 여전히 고객들이 사모펀드 상품에 목말라 있다고 판단하고 원활한 상품 공급을 위해 직접 펀드를 수탁하는 길을 택했다. 이를 위해 금융권 수탁 전문인력을 영입하고, 불완전판매 사태를 방지할 수 있도록 운용감시 시스템도 구축했다.
그 결과 지난해 10월경 처음 론칭했던 4개 수탁펀드는 최근 25개, 수탁고 5000억원 규모로 빠르게 늘었다. 시장의 니즈를 잘 파악한 ‘플랫폼 플레이어로서의 기본’을 지킨 결과다. NH투자증권의 성공적인 정착을 본 미래에셋증권, 삼성증권에서도 현재 펀드 수탁업 진출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 사장은 특유의 비유를 통해 다시 한 번 기본을 강조하는 것으로 대담을 마쳤다. "옛날 프로야구의 한 슈퍼스타가 예상보다 빨리 은퇴한 일이 있었습니다. 홈런은 많았지만, 워낙 삼진도 많아 타자로서의 기본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증권사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상황일수록 고객이 어떤 것을 원하는지 잘 파악하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다 보면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suc@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