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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인 한국기상산업기술원장 |
첫눈, 첫눈이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그런데 내린 눈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잴 수는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매우 어렵다. 아니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눈이 계속해서 내려도 내린 눈이 녹아버리거나 바람에 쓸려 나가고, 또 눈 자체의 무게 때문에 쌓인 눈이 내려앉을 경우 내린 눈이 모두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해서 강우량(降雨量)과 달리 강설량(降雪量)이라는 말은 사전에는 있지만 기상학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적설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적설이란 특정 시점에 쌓여 있는 눈의 양을 말한다. 강설량과 달리 이는 얼마든지 정확하게 측정이 가능하다.
전통적인 적설 관측방법은 적설판이라는 판 위에 높이를 잴 수 있는 자를 세워놓고 쌓인 눈의 높이를 재는 방법이다. 물론 사람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방법이다. 최근 들어서는 사람이 눈으로 직접 관측하는 것이 아니라 초음파나 레이저, CCTV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한국기상산업기술원은 지난 2015년 연구개발(R&D)를 통해 세계 최초로 ‘다초점 레이저 적설계’를 개발했다. 이후 기술원은 R&D 성과를 사업화로 이끌어 그동안 수입에 의존하던 적설계를 국산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실제로 현재 전국 방방곡곡에는 모두 400대가 넘는 다초점 레이저 적설계가 설치돼 있다. 다초점 레이저 적설계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주변 환경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매우 정확하다는 점이다. 초음파 적설계 등 기존의 적설계를 모두 대체할 수 있었던 이유다.
특히 올해는 다초점 레이저 적설계의 성능 시험 방법에 대해 ‘국제표준’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앞으로 다초점 레이저 적설계 성능 시험은 ‘이러한 방법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국제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국제표준으로 등재됨에 따라 우선 기대되는 것은 기상 관측 장비 분야에서 우리나라 기술력에 대한 글로벌 경쟁력 향상과 함께 신뢰도를 끌어 올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국제표준 개발 단계 중 세계적인 기상장비 회사와 해외 판권 계약을 하고 국외에 다초점 레이저 적설계 316대를 수출하기도 했다.
재해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기후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예측하기 어려운 폭설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정확한 관측이 가능한 다초점 레이저 적설계의 등장은 폭설 상황을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폭설의 예측과 대책을 세우는 데도 크게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대응에도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할 전망이다. 폭설을 정확하게 관측하는 것은 기후변화를 감지하고 대응하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산·학·연이 협력해 세상에 없던 새로운 적설계를 개발하고 이를 사업화하고 수입대체뿐 아니라 국제표준까지 만든 점을 인정받아 기술원은 지난 10월 26일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이 주최한 제52회 계량측정의 날 행사에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측우기가 본격적으로 제작된 것은 지금부터 약 600년 전인 1400년대 중반이다. 특히 세종 24년인 1442년 6월 세종실록에는 측우기라는 이름과 함께 측우기의 길이와 직경 등 구체적인 규격까지 기록되어 있다. 전국적인 우량 관측망이 구축된 것도 바로 1442년이다. 조선시대의 이 같은 측우기 제작과 설치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것으로 유럽보다 200년 정도나 앞선다. 유럽에서 측우기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한 것은 1639년이다. 갈릴레오의 제자인 카스텔리가 스승에게 쓴 편지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 빗물을 재는 내용이 들어 있다.
측우기가 제작·설치된 이후, 특히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우수한 기상관측 장비가 속속 개발되고 있다. 하지만 다초점 레이저 적설계의 경우는 측우기 제작 이후 감히 600년 만의 쾌거라고 부르고 싶다. 국내에서 연구개발을 통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기상 관측 장비를 개발하고 사업화로 수입을 대체하고 국제표준까지 만든 것은 다초첨 레이저 적설계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600년 만의 쾌거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물론 작은 것 하나를 이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사실이다. 비록 작은 첫 걸음이지만 소중하게 키우고 성과를 더욱더 확산해야 한다는 뜻이다.
첫눈은 언제 내릴까.
설악산에는 지난달 10일 올 가을 첫눈이 내렸다. 지난해보다 9일 빠른 날짜다. 지난달 24일에는 강원산지 곳곳에 함박눈이 내렸다. 하지만 그 밖의 다른 지역은 아직 첫눈이 내리지 않았다. 서울의 경우 지난해에는 11월 10일에 첫눈이 내렸고 2020년에는 12월 10일 첫 눈이 관측됐다.
전국에 설치된 다초점 레이저 적설계가 이 글의 독자들에게 첫눈의 설렘을 가득 안겨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