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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운 에교협 대표 |
최근 국내 자금시장 사정이 급속히 악화되자 정부가 ‘50조원+α’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 등 대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시중의 돈가뭄은 여전하고 회사채와 기업어음(CP) 금리도 상승세를 지속하고 있다. 이러다간 자금 시장이 패닉상태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시중의 자금난이 심화된 것은 대내외 금융환경이 급속히 나빠진 가운데 강원도가 레고랜드 발행 채권에 대해 지급보증을 거부한 것이 결정타가 됐다. 올 하반기 들어 한국은행의 잇따른 금리 인상으로 회사채금리가 치솟으면서 기업의 자금조달이 어려워지고, 경기악화와 부동산경기 침체로 회사채나 프로젝트파이낸싱(PF)의 디폴트 위험이 커져 자금이 안전자산 쪽으로 몰리는 현상이 심화됐다.
3년물 기준으로 국채와 회사채(AA-)의 금리차(스프레드)가 1.3%포인트 이상으로 벌어져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9월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한 것은 시중 자금이 안전자산 쪽으로 집중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금융시장이 가뜩이나 불안한 가운데 지방정부마저 지급보증을 거부하니 시중자금이 더욱 안전한 곳으로 흐를 수 밖에 없게 됐다.
여기서 주목할게 있다. 바로 국내 최대 공기업인 한국전력이 고신용·고금리 회사채를 찍어내며 시중 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전은 막대한 영업적자를 기록하고 있어 운용자금으로 매월 2조원대 회사채(한전채)를 발행하고 있다. 한전은 신용등급이 최고(AAA)여서 투자자들이 한전채를 다른 하위 등급 기업의 회사채보다 선호한다.
더구나 최근 한전이 회사채 발행 물량을 늘리면서 이를 소화시키기 위해 금리를 6%대까지 올리는 바람에 저신용·저금리 회사채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올해 들어 한전채 발행규모는 23여조원으로 지난해 10조 4300억원의 두배를 넘었다. 한전의 대규모 자금조달 필요성과 투자자의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맞아떨어지면서 자금이 한전채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더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한전의 영업적자와 부채가 한동안 증가세를 지속해 한전채 발행 물량 증가와 자금 싹쓸이 현상이 심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전의 영업적자는 지난해 5조 8601억원에서 올해 상반기에 14조 3033억원으로 늘었고, 올해 연간으로는 30조원을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전의 부채는 올해 6월 말 현재 연결기준으로 1년 전보다 28조 5000억원 늘어난 165조 8000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금융회사를 제외한 국내 기업들중 1위다.
한전의 적자와 부채증가에 제동이 걸리지 않는 한 정부가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아무리 내놓아도 ‘백약이 무효’일 수 있다. 금융당국이 한전의 회사채 발행물량을 제한하고 대신 은행대출을 늘려주도록 하는 조치를 황급히 발표했지만 이는 직접금융시장을 규제하는 임시방편적 조치에 불과하다. 한전이 시중자금의 블랙홀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부실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전이 부실의 늪에 빠진 것은 한마디로 정부의 에너지정책 실패 때문이다. 불합리한 전원믹스와 전기요금 정상화 지연이 부실을 심화시켰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탈원전 정책으로 가스발전이 늘면서 연료비가 증가하고 특히 러·우 전쟁으로 천연가스 가격이 폭등하면서 한전의 전력구입금액이 급증했다. 발전원별 전력구입단가를 볼 때 LNG복합화력은 지난해 1~8월 kWh당 108.79원에서 올해 같은 기간에 213.31원으로 96.1% 늘었지만, 원자력발전은 같은 기간 64.7원에서 54,26원으로 오히려 16.1% 줄었다. 원전축소와 가스발전 증가가 전력요금 인상압력을 키운 것이다.
한전의 전력구입금액은 올해 1~8월에 55조 7987억원으로 전년동기 34조 185억원보다 64% 늘었다. 반면 전력판매수입은 올해 1~8월에 43조 1517억원으로 전년동기 38조 7156억원보다 11.5% 늘어나는데 그쳤다. 전력구입금액과 전력판매수입의 격차만큼 한전의 적자는 커질 수밖에 없다.
현 시점에서 절실한 것은 전력구입금액이 늘어나는데 맞춰 전력요금을 실효성 있게 인상하는 것이다. 그래야 한전의 부실 심화를 막고 전력소비도 줄이며 탄소중립도 실현할 수 있다. 물가안정을 우선시 해 전력요금 정상화를 미룰 경우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는 점을 정책당국이 인식해야 한다.
정책당국은 현재 전력도매가격을 결정하는 계통한계가격(SMP)에 상한제 를 적용한다든지 한전이 발전 자회사에 대해 적용하는 정산조정계수를 0으로 한다는 것과 같은 반시장적 조치만을 취하려 하고 있다. 이는 정공법이 아니며, 오히려 문제를 꼬이게 할 뿐이다.
이제라도 잘못된 에너지정책을 바로 잡아야 한다. 비용절감과 에너지안보를 위해 원전을 충분히 활용하며, 연료비연동제를 실효성 있게 운용해야 한다. 올해 들어 연료비 조정단가와 기준연료비 등을 올리긴 했지만 누적된 요금 인상 압력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5원인 분기별 연료비 조정폭을 확대하고 정부의 유보권한도 축소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연료비만을 반영하는 변동비반영시장(CBP)을 환경비용 등 제반비용까지 포괄적으로 반영하는 가격입찰빙식(PBP)으로 바꿔야 한다. 전력요금의 ‘정치화’를 막는 것은 전력시장 정상화를 위한 선결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