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수소와 그린 수소 생산단가 추이. ICIS/SK증권(파란색)그레이 수소(하늘색)블루 수소(회색)그린 수소 |
[에너지경제신문 오세영 기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그레이·블루 수소 생산단가가 그린 수소보다 비싸지자 에너지전환에 속도가 붙을 수 있다는 전망이 높아지고 있다.
재생에너지 확대 등 최소 에너지전환이 10년 정도 지나야 그린 수소 가격이 지금의 그레이 수소 가격까지 낮아진다고 전망했던 것에 비하면 빠른 속도로 지각 변동이 일어나는 모습이다.
2일 SK증권이 인용한 미국 인디펜던트 상품정보서비스 ‘ICIS’의 자료에 따르면 영국 내 그린 수소 생산 단가가 1kg당 3.4파운드 수준을 유지하는 반면 그레이수소와 블루수소 생산 단가는 1kg당 4파운드를 웃돌고 있다.
영국의 그레이 수소와 블루 수소 생산단가는 지난해 초부터 8월까지 2∼3파운드 사이를 오가다가 9월부터 그린 수소 가격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 국제 유가·천연가스 급등으로 그레이수소 생산가 상승
수소 종류마다 가격이 차이나는 이유는 생산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레이 수소는 석유화학 공정의 부산물로 나오는 부생 수소와 천연가스를 개질해서 만들어진다. 블루 수소는 그레이 수소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산화탄소를 포집·저장해 탄소 배출을 줄인 수소다. 그린 수소는 태양광이나 풍력 등 재생에너지에서 나온 전기로 물을 분해해 생산하는 수전해방식으로 추출한다.
그린 수소는 친환경 수소로 꼽히지만 그동안 그레이 수소와 블루 수소보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높다는 단점이 있다. 그린 수소에 필요한 재생에너지가 아직 전 세계 에너지의 주 발전원이 아니고 수전해 기술도 효율성이 낮아 연구 단계에 그치고 있다.
반면 그레이 수소는 질소산화물과 이산화탄소 배출이 많지만 주 에너지원인 천연가스를 이용하는 만큼 세계 수소 생산의 95%를 차지한다. 그레이 수소 생산기술은 세계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으며 생산 단가도 1kg당 1.5~2달러로 가격도 저렴한 수소원으로 꼽혔다.
당초 수소위원회 등은 오는 2030년에 재생에너지가 확대되고 수전해 기술이 발달하면서 그린 수소 생산단가가 1kg 당 1.4~2.3달러까지 낮아진다고 전망했다. 즉 그린 수소 가격이 지금의 그레이 수소 가격까지 낮춰지려면 10년 정도는 탄소중립을 이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이어지던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러시아와 미국·서방 국가들의 전운이 국제 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을 끌어 올렸고 그 영향으로 그레이 수소 생산단가가 그린 수소를 넘어섰다.
러시아는 세계 자원 대국으로 꼽힌다. 유럽은 러시아에 에너지 의존도가 높다. 유럽연합(EU) 석유의 4분의 1, 천연가스 41%, 석탄 47%가 러시아에서 수입된다.
SK증권 나승두 연구원은 "특히 동절기가 유난히 추워 난방을 위한 천연가스 수요가 늘어나 유럽 내 천연가스 저장량이 급격히 감소했고 유럽 천연가스 공급을 담당하는 러시아가 노르드스트림2 개통을 앞두고 공급량을 조절하면서 가격이 올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말에는 야말-유럽 간 파이프라인 천연가스 공급이 중단됐고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유럽 내 천연가스 가격이 높은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 러시아-우크라 사태로 재생E·원전 확대 가속화 전망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로 EU의 에너지전환 흐름도 가파라질 전망이다. EU는 그동안 러시아에 에너지 의존도가 높았고 에너지전환과 더불어 에너지 독립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재생에너지에만 집중한 전환이 아닌 원자력 발전을 활용하기 위한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원전에 대한 이야기는 유럽에서 원래 화두가 됐지만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유일한 대안으로 꼽힐 수도 있다.
실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오는 2050년까지 최대 14기 신규 원전을 건설하겠다며 ‘원전 강화’ 기조를 밝혔다. 탈(脫)원전을 강하게 외쳤던 독일에서도 탈원전 정책을 잠시 미루고 에너지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박호정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지금 미국이나 EU에서 최고의 관심은 러시아로부터 에너지 독립"이라며 "일각에서는 이 기회에 러시아에서 수입하는 천연가스를 줄이고 재생에너지 증가하자고 주장하고 또 다른 일각에서는 재생에너지 전환에 찬성하지만 LNG 터미널을 확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EU에서도 재생에너지 확대를 통한 에너지 자급률을 높이는 건 중요하지만 에너지독립에 기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며 "다양한 에너지 믹스가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술이나 산업에 대한 이해가 없이 정책이나 제도를 수립하면 위험하다"며 "정책이나 제도 수립자들도 산업과 기술에 대한 경제성 등 모든 측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범진 경희대 교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이념이 아닌 진정한 에너지 전환 시기가 도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에너지 전환의 목적은 안정적인 공급, 합리적인 가격, 탄소 제로 등의 여건"이라며 "원전 또한 그 조건에 해당하지만 그동안 이념 싸움의 수단으로 쓰여오면서 배제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EU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로 천연가스 공급이 어렵고 가격이 오르자 그 대안으로 원전이 언급되기도 한다"며 "지난해 영국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이후 프랑스와 미국 등 선진국 중심으로 원전을 안정적 에너지원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