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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 감사는 탈원전 정책 결정의 정당성에 대한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2018년 원자력정책연대가 제기한 8차 전기본 취소 행정소송에서 전기본은 ‘구속력이 없는 행정조치’에 불과하다고 산업부가 이미 자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기본에 원전확대가 반영됐던 탈원전이 반영됐던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속력 없는 행정조치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법으로 정하고(전기사업법 25조), 수십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1년 이상의 기간을 고심한다. 납득하기 어렵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의 근거는 대략 2가지 정도이다. 선거공약에 포함됐고 국민이 선택했다는 것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위원회가 원전비중 축소를 권고한 것이다.
선거마다 수많은 공약이 발표되지만 그 공약이 지켜지는지 유권자들은 그다지 관심없다. 사는 게 바쁘기 때문이다. 공약이 이행되지 않았다고 처벌받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만큼 이행력이 낮은 약속에 불과하다. 역대 정부의 공약이 다 성공적으로 이행됐다면 우리나라는 초강국이 돼 있을 것이다.
공론화위원회의 원전비중 축소 권고는 어떤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구성과 운영을 규정한 국무총리훈령 690호 어디에도 원전비중을 다룬다는 조항은 없다. 훈령에는 신고리 5·6호기의 건설중단 여부에 대한 사항만 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공론화위원회는 ‘시민참여단’ 조사에서 원전정책 방향을 묻는 설문을 끼워 넣었고 한 번의 조사결과에서 원전비중 축소가 우세하게 나오자 원전비중 축소를 권고했다. 총리 훈령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공론화위원회의 원전비중 축소 권고는 월권행위가 분명하다. 공론화위원회가 조사에 왜 원전비중 항목을 넣었는지, 원전비중 축소 권고가 월권인지 아닌지는 공론화위원회 위원장과 당시의 총리에게 물어봐야 한다.
공론화위원회의 권고를 근거로 2017년 10월 24일 국무회의는 ‘탈원전 로드맵’을 의결했다. 이것이 탈원전과 관련된 유일한 공식적 행정행위였다.
국무회의에서 의결하면 간단할 것을 다른 나라들은 왜 장기에 걸쳐 복잡한 방식으로 탈원전을 결정했을까. 탈원전 정책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각국은 의견 수렴과 확정을 위해 공론화, 국회입법, 국민투표 등의 방식을 적용했다.
독일은 공론화 과정에서 ‘안전한 에너지 공급 위한 윤리위원회’를 구성, 운영했고 TV와 인터넷으로 중계하는 장시간의 공개토론회를 개최했다. 23개월간 원전제로를 선언했던 일본은 공론화를 위해 전국 11개 지역에서 의견청취회, 토론형 여론조사와 인터넷 여론조사 등의 방법을 채택했다.
탈원전 선언 국가들은 전부 국회 토론과 입법화를 했다. 국회에서는 수 차례의 공청회, 토론회를 개최함은 물론 여당과 야당 율사출신 의원끼리 치열한 논쟁과 절충과정을 거쳐 법률을 정한다. 그런데도 만들어진 법안이 폐기되는 사례도 있다. 2002년 독일의 사민·녹색당 연정이 밀어붙인 탈원전법은 2010년 기민·기사·자민당 연정에 의해 개정돼 원전 수명연장이 허용되기도 했다.
국회 논의가 원활치 않을 경우 최종적으로 국민들의 의사를 직접 묻기도 했다. 스위스와 이탈리아는 국민투표를 통해 탈원전을 결정했다. 반대로 대만은 2025년까지 탈원전하겠다는 법조항을 국민투표로 삭제했다.
민주국가는 중대사에 대한 의사결정에 있어서 절차적 정당성과 공정성을 중시한다. 이 정당성과 공정성은 의견이 다른 두 집단 간의 주장과 설득, 협상과 타협, 이해와 양보 과정을 통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수용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우리의 탈원전 정책 결정과정은 이와 상당한 거리가 있다. 탈원전 공약은 법 위에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