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경제 포토

강찬수

kcs25@ekn.kr

강찬수기자 기사모음




“GDP 수치만으로 국가가 정말 발전했는지 알 수 없다”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6.05.19 11:05

UN 전문가 14명에 의뢰한 보고서 공개
‘사람과 지구’ 중심 새 국가 성과지표 제안
“GDP는 속도계일 뿐, 목적지는 아니다”
각국에도 새로운 지표로 발전 측정 권고
국내 정부 정책과 기업 경영에도 영향 예상

#CHINA-ECONOMY-FOREIGN TRADE-GROWTH (CN)

▲중국 동부 산둥성 칭다오 항에 컨테이너선이 입항하고 있디. 지난 9일 드론으로 촬영했다.(사진=신화통신/연합뉴스)


국내총생산(GDP) 중심의 국가 성과 측정 방식을 넘어, 사람의 '삶의 질'과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함께 평가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공식 제안이 나왔다.


유엔(UN) 사무총장이 지난해 구성한 'GDP를 넘어서 - 독립 고위급 전문가 그룹(Independent High-Level Expert Group on Beyond GDP)'은 최근 최종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 제목은 《가치 있는 것을 측정하기: 사람과 지구를 위한 진보의 나침반(Counting What Counts: A Compass of Progress for People and Planet)》이다. 보고서는 브루킹스연구소의 경제연구 프로그램 선임연구원인 캐럴 그레이엄이 총괄 편집을 맡았으며, 컬럼비아대학교의 조지프 E. 스티글리츠 등 세계적인 경제학자와 공식통계 분야 전문가 14명이 공동 집필했다.




이들 전문가는 “우리가 무엇을 측정하느냐가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지를 결정한다"면서 “GDP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벗어나 보다 입체적이고 지속가능한 국가 진보 측정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유엔이 공개한《가치 있는 것을 측정하기: 사람과 지구를 위한 진보의 나침반(Counting What Counts: A Compass of Progress for People and Planet)》 보고서 표지. (자료=UN)


◇GDP 성장의 역설…숫자 늘었다고 삶이 나아졌나


GDP는 일정 기간 한 나라 안에서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의 총가치를 보여주는 대표 경제지표다. 경제 규모와 성장 속도를 비교하는 데 강력한 도구로 활용돼 왔다.


그러나 보고서는 GDP가 애초에 국민 삶의 질(well-being)이나 사회적 안녕을 측정하도록 설계된 지표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 많은 국가에서 GDP는 증가했지만, 불평등 심화와 환경 파괴,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 약화, 사회적 고립 등은 오히려 악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GDP는 무급 돌봄노동이나 디지털 공공재의 가치를 반영하지 못하면서, 산림 훼손이나 자원 고갈처럼 미래 기반을 잠식하는 활동도 경제 생산으로 계산하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단기 경제성장은 포착하지만 장기 지속가능성은 놓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성장의 역설'이라고 규정했다. 경제가 성장해도 시민들이 삶의 개선을 체감하지 못하고, 공동체의 신뢰와 미래 자산이 약화된다면 그것을 진정한 진보(발전)라 보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

▲GDP 상승에도 불구하고 북미 지역 건강(왼쪽)이나 동아프리카 지역의 생물다양성(오른쪽)은 오히려 감소했다. (자료=유엔 보고서)


◇GDP 대체 아닌 보완…31개 핵심지표 제시


전문가 그룹은 GDP를 폐기하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GDP를 보완할 수 있는 'GDP를 넘어서 대시보드(Beyond GDP dashboard)'를 제안했다. 대시보드는 자동차 계기판처럼 여러 핵심 지표를 한눈에 보여주는 종합 표시 체계를 뜻한다.


이 대시보드는 총 31개 핵심 지표를 통해 국가의 현재 상태와 미래 지속가능성을 다층적으로 측정하는 체계다. 대시보드는 네 개 축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축은 '기초 원칙'이다. 평화·인권·지구 존중이라는 세 가지 기본 가치를 측정한다. 분쟁 사망자 수, 차별 경험 비율, 여성 폭력 피해율, 온실가스 배출량, 생물다양성 온전성 지수 등이 포함된다.


두 번째 축은 '현재 삶의 질'이다. 가처분소득, 노동의 질, 건강수명, 교육 수준, 디지털 역량, 치안, 삶의 만족도, 외로움, 공공서비스 만족도, 대기질, 식수 접근성 등 시민이 실제로 체감하는 삶의 조건을 측정한다. 특히 '삶의 만족도'와 '외로움' 같은 주관적 지표가 포함된 점이 눈에 띈다.


세 번째 축은 '형평성과 포용성'이다. 상위 1% 부(富) 점유율, 지니계수, 사회적 빈곤율, 남녀 임금격차, 지역 인프라 접근성, 다차원 빈곤지수 등을 통해 성장의 혜택이 얼마나 고르게 분배되는지를 평가한다.


네 번째 축은 '지속가능성과 회복력'이다. 이는 미래 세대의 안녕을 떠받치는 국가의 자산 기반을 평가하는 영역으로, 생산·인적·사회적·제도적·자연 자본이라는 5가지 자본 개념을 중심으로 측정된다.



◇'5가지 자본'으로 미래를 측정하다


보고서가 제시한 가장 새로운 개념은 '5가지 자본'이다.


①생산 자본은 도로·철도·항만 같은 사회기반시설과 공장·기계·설비 등 경제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자산을 뜻한다. 한 사회가 재화와 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고 공급할 수 있는 기반으로, 전통적인 GDP 성장의 핵심 토대가 되는 요소다.


②인적 자본은 국민이 보유한 교육 수준과 건강 상태, 직업 능력, 디지털 활용 역량, 창의성과 문제 해결 능력 등을 포괄한다. 개인의 생산성과 혁신 역량을 높이고 사회 전체의 장기 경쟁력을 좌우하는 미래 성장의 원천으로 평가된다.


③사회적 자본은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신뢰와 협력, 상호부조, 시민 참여, 사회적 연대 의식 등을 의미한다. 사회적 자본이 높을수록 갈등을 줄이고 위기 상황에서 공동 대응이 가능해져 사회의 안정성과 회복력이 커진다.


④제도적 자본은 정부와 공공기관, 사법·행정 시스템이 얼마나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자산이다. 정책 집행의 신뢰성, 법치주의, 부패 통제, 공공서비스의 질 등이 포함되며, 시민과 시장이 제도를 신뢰할수록 국가 운영의 지속가능성이 높아진다.


⑤자연 자본은 토지와 물, 산림과 토양, 광물자원, 대기, 생태계 서비스와 생물다양성 등 인간 삶과 경제활동을 떠받치는 자연의 기반 전체를 뜻한다. 식량 생산과 기후 조절, 수자원 공급, 탄소 흡수 같은 기능을 제공하며, 훼손될 경우 미래 세대의 삶의 질과 경제적 지속가능성까지 위협할 수 있다.


전문가 그룹은 생산 자본이 늘더라도 자연 자본이나 사회적 자본이 훼손되면 지속가능한 성장이 아니라고 경고했다. 이는 GDP가 놓치는 '자산 고갈'을 포착하기 위한 장치다.


INDIA-POPULATION/

▲2023년 1월 20일, 인도 뭄바이의 한 기차역에서 통근자들이 교외 열차 탑승을 기다리며 플랫폼에 모여 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국가별 도입 권고…2027년까지 대시보드 구축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보고서를 작성한 전문가 그룹은 GDP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GDP는 여전히 경제활동을 측정하는 핵심 지표라는 것이다. 다만 GDP 수치만으로 국가의 발전을 판단하는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 이번 보고서의 핵심 메시지다.


보고서는 “GDP는 경제의 속도를 보여줄 수는 있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세계가 기후위기와 불평등, 사회적 단절이라는 복합위기에 직면한 지금, 국제사회는 '얼마나 성장했는가'보다 '무엇을 위해 성장하는가'를 묻기 시작했다. 이번 보고서는 그 질문에 대한 첫 번째 글로벌 설계도로 평가된다.


한편, 보고서는 각국 정부가 2027년까지 자국 실정에 맞는 'GDP를 넘어서 대시보드'를 구축해 정책과 예산 편성 과정에 반영할 것을 권고했다.


이를 위해 통계 시스템 강화와 정기적 국민 체감조사, 자연자본 회계 구축, 정책 효과 평가 기준 개편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한 유엔 차원의 연례 글로벌 보고서를 통해 국가별 진척 상황을 비교·관리하는 국제 기준도 마련할 계획이다.



◇한국에도 적잖은 변화 예고…정책·기업 평가기준 바뀔 수도


이번 UN 보고서는 한국에 당장 법적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국가 정책 평가와 기업 경영 환경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국가 성과 평가 기준의 확대다. 지금까지 한국은 성장률과 수출, 고용, 물가 등 경제지표를 중심으로 정책 성과를 평가해 왔다. 그러나 새로운 체계가 국제 표준으로 자리 잡을 경우, 앞으로는 삶의 질과 사회적 신뢰, 불평등 수준, 환경의 질, 자연자본 보전 여부 등이 국가 경쟁력을 판단하는 핵심 지표로 부상할 수 있다. 정부 역시 정책 성과를 설명할 때 단순한 성장 수치보다 국민 삶의 개선 정도와 미래 지속가능성을 함께 제시해야 하는 압박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예산 편성 방식에도 변화 가능성이 제기되고 통계 인프라 확충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보고서 권고에 맞추려면 통계청을 중심으로 관련 부처가 협력해 새로운 조사 체계와 자연자본 회계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수도 있다.


산업계에도 영향이 예상된다. 특히 UN이 강조한 자연자본 회계가 본격 도입되면 대규모 개발사업이나 산업단지 조성, 에너지·건설 투자 평가에서 단순 경제효과뿐 아니라 생태 훼손 비용과 복원 가치까지 함께 반영될 수 있다. 이에 따라 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역시 탄소배출 감축을 넘어 지역사회 신뢰와 생태계 보전, 공동체 기여도까지 폭넓게 평가받는 방향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다.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