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드바와 실버바(사진=로이터/연합)
국제 금값이 달러 약세와 미중 무역전쟁 격화 등의 요인들에 힘입어 사상 처음으로 4100달러선도 돌파한 가운데 또 다른 귀금속인 은 가격도 1980년에 기록됐던 역대 최고가를 넘어섰다.
13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금 현물 가격은 전장 대비 2% 뛴 온스당 4110.27달러에 거래를 마치며 종가 기준으로 사상 최고치를 또 경신했다. 14일 오전 싱가포르 시장에서도 금값은 온스당 4140.82달러를 기록해 상승세를 이어갔다.
8주 연속 상승세를 이어온 금 값은 올해 들어서만 57% 가량 급등했다.
금 선물 가격도 신기록을 세웠다. 이날 뉴욕상품거래소(COMEX)에 따르면 12월 인도분 금 선물 가격은 3.31% 오른 온스당 4133.00달러에 장을 마쳤다.
은값의 상승폭은 더 가팔랐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이날 장중 은 현물가격은 온스당 52.8983달러까지 치솟아 '은파동 사태' 당시인 1980년 1월의 최고가를 44년 만에 돌파했다. 올해 은 시세 상승률은 81%에 달한다.
앞서 1979년 여름, 미국 텍사스의 석유 재벌 헌트 일가는 은값이 온스당 10달러 이하로 떨어지자 여러 증권사에서 자금을 빌려 대규모 매수에 나섰다. 그 결과 1980년 1월 21일 미 시카고상품거래소(CBOT) 기준 은 가격은 온스당 52.50달러까지 폭등했다. 그러나 불과 두 달 뒤인 3월, 가격은 다시 10달러대로 급락했다.
블룸버그는 백금과 팔라듐을 포함해 “4대 귀금속이 올해 56~81% 급등하며 원자재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제 금값 랠리는 각국 중앙은행의 매입 확대와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하 기대, 연준 독립성 훼손 우려, 미 정부의 셧다운(업무 중단) 사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애나 폴슨 필라델피아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는 이날 전미경제학회(NABE) 연례회의에서 “올해 안에 두 차례 추가 금리 인하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시장에선 연준이 이달에도 금리를 인하할 것을 기정사실로 보고 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에 따르면 연방기금금리(FFR) 선물시장은 기준금리가 10월에 3.75~4.00%로 0.25%포인트 인하될 확률을 98.9%로 반영하고 있다. 12월에 금리가 추가로 인하될 확률도 94.0%에 달한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0일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에 반발해 11월 1일부터 중국에 100% 추가 관세를 부과하기로 밝힌 점도 시장 불안을 자극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개최되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대면하지 않을 가능성도 시사했다.
그는 이틀 뒤인 12일 “중국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라는 글을 올리며 정면 충돌을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를 내놨지만 시장 불안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란 지적이 나온다.
캐피탈닷컴의 카일 로다 애널리스트는 “지정학적·무역 리스크가 잠잠해지려던 시점에 미중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며 “양측이 대화의 여지를 남겨 변동성이 완화되더라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이는 금값 상승에 매우 좋은 소식"이라고 말했다.

▲올해 들어 금·은 현물 가격 상승률(2024년 12월 31일 대비)(사진=블룸버그)
또 최근 월가를 중심으로 글로벌 화폐 가치 하락에 대비해 귀금속 등 대체자산에 자금이 몰리는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debasement trade)'가 확산하는 점도 금·은 등 귀금속 가격을 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 등 주요 선진국들이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재정 확대 기조를 이어가자, 달러 등 통화자산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한 투자자는 “금과 은의 가격 상승세에 굳이 맞설 이유가 없어 보인다"며 “정부의 재정상태 약화, 통화정책 혼선, 정치적 불확실성 등 구조적인 요인들이 금·은 시세를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은의 경우 런던 거래소에서 유동성이 부족할 것이란 우려가 확산해 투자자들 사이에서 '은 확보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골드만삭스는 보고서에서 “은 시장은 금보다 약 9배 규모가 작고 유동성이 낮아 가격 변동성이 크게 확대될 수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트레이더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진행 중인 핵심 광물 국가안보조사 결과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조사 대상에는 은, 백금, 팔라듐 등이 포함됐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결과에 따라 '품목별 관세' 부과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구리에 대해 관세를 부과한 바 있으며, 당시에도 관세 발효를 앞두고 구리 가격이 급등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금과 은 가격 전망치도 갈수록 높여지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소시에테 제네랄은 최근 보고서를 내고 “(ETF 등에) 자금이 유입되는 속도가 우리의 예상치보다 가팔랐다"며 “금 가격이 내년말까지 5000달러까지 오를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내년 은 목표가격을 기존 온스당 44달러에서 65달러로 이날 대폭 상향하면서 “지속적인 공급 부족과 재정 적자 확대, 낮은 금리가 은 가격 상승을 지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은은 금과 달리 산업재 성격도 강해 인공지능(AI) 반도체, 전기차, 태양광 패널 등에 폭넓게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