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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정 공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
2023년도 며칠 남지 않았다. 올 한 해는 그 어느 해보다 국제적인 분쟁과 갈등이 심화했던 해로 기억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지난해 2월에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장기전으로 빠져 든 가운데 지난 10월에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인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이·팔 전쟁이 터지면서 유럽과 중동에서 동시에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자원 부국인 러시아가 자국의 에너지를 무기화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가격은 크게 요동친 가운데 석유 및 가스 매장량이 가장 큰 지역인 중동에서마저 전쟁이 발생하다 보니 에너지 안보에 대한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게다가 이달 초에는 남미의 거대 산유국인 베네수엘라가 옆 나라인 가이아나 영토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땅을 자국 영토에 편입하는 것을 묻는 국민투표를 진행, 무려 90%가 넘는 지지를 획득했다면서 영유권을 주장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가이아나는 2015년 에세퀴보 연안에서 막대한 양의 석유가 매장된 것이 확인되면서 빠른 경제 성장을 보이던 남미의 신흥 산유국이다.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이르판 알리 가이아나 대통령이 14일 회담을 갖고 상대방에 무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하면서 갈등 국면이 일시적으로나마 봉합되는 모양새이기는 하다. 그러나 유럽, 중동에 이어 남미에서까지 국가 간 갈등이 계속되고, 이런 갈등들이 직간접적으로 에너지 문제와 얽히게 되면서 최근 안정세로 접어든 국제 유가에 대해서도 상황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한 상황이다.
글로벌 정세가 이렇게까지 불안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초강대국 미국의 리더십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퇴하면서 미국이 주도해 오던 자유주의 세계질서가 흔들리게 된 것을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더군다나 유엔의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유엔 헌장을 위반하고 다른 주권국가의 영토를 침범한 행위는 유엔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던 글로벌 거버넌스 레짐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이렇다 할 리더십이 부재하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요국들은 각자의 국익을 보호하기 위해 무역정책은 물론 산업 및 금융정책까지 총동원해 경쟁적으로 자국의 기술과 산업을 보호하려 하고 있고,자원 보유국들은 자국의 자원과 에너지를 보호하려는 차원을 넘어서서 무기화하는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국은 주지하다시피 국내에 부존자원이 전무하다시피 할 뿐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과 이어지는 인프라가 부재해 물류를 전적으로 해상 수송에 의존하는 상황이어서 리스크 관리 차원에도 불리하다. 또한 수출에서 가공무역 비중이 큰 만큼, 원자재 수입이 안정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면 수출 역시 원활하게 진행될 수 없는 구조다.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무엇보다 앞선 과제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게다가 EU(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같은 조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화석연료 사용을 극적으로 줄이면서 저탄소에너지원의 사용을 대폭 확대해야 하는 상황이다. 재생에너지의 확대가 궁극적으로 에너지 안보에는 긍정적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들여와야 하는 핵심광물의 지리적 편재성을 생각할 때 석유·가스와는 또 다른 지정학적 경쟁에 뛰어들 수 밖에 없는 것 역시 부담이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Climate School의 제이슨 보르도프(Jason Bordoff) 교수와 부시 행정부에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국가안보부 보좌관을 지낸 메건 오설리번(Meghan O‘sullivan)은 올 4월 Foreign Affairs誌 기고문을 통해 역사적으로 에너지 안보는 저렴한 가격에 충분한 공급이 가능한 상태로 정의되어 왔지만 새로운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에너지 안보의 개념을 다변화(diversification), 복원력(resilience), 통합(integration), 투명성(transparency)이라는 네 가지 원칙에 따라 재정의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들의 주장에 입각해 볼 때 한국의 에너지 안보를 위해서는 에너지원을 최대한 다변화해 특정 에너지원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에 대한 복원력을 향상시켜야 하는데, 이런 목표를 지향하는 데 있어서 현재 가장 우려가 되는 것은 분절된 거버넌스 체제와 경직된 에너지 시장 구조라 판단된다. 특히 한전을 비롯한 에너지 관련 공기업들의 부채 수준은 국가 위험 부담을 눈덩이처럼 키우고 있다.
2024년 새해 전망도 밝지 않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스스로가 안고 있는 내재적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대외 변수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복원력을 확보하는 데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